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382)화 (381/1,192)

제382화

태자는 뒷짐을 진 채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군. 혼인을 하겠다고 몇 번이나 말하던데… 영구 너는 어떠하냐? 기홍과 언제쯤 혼사를 치를 예정이더냐? 큰 선물을 내릴 터이니 날짜를 정하면 꼭 알려 주거라.”

“태자 전하, 그리 과분한 말씀을 해 주시다니요. 소인은 왕야께 충심을 다하려는 마음뿐, 혼사는 생각해 본 적도 없사옵니다.”

“때를 잘 이용해야지. 사내는 혼인을 해야 가정을 일으켜 세우는 법이다. 올해 혼사를 올리고 내년쯤 아이를 낳아 가정을 꾸리면 얼마나 좋겠느냐.”

영구의 표정에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비위를 맞추려는 기색은 먼지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성격을 익히 아는 터라, 태자는 개의치 않고 발길을 돌렸다.

그 시각, 풀숲에 들어선 가동은 바닥에 쓰러진 사장풍을 발견했다. 온몸이 피로 물든 데다 가슴이 들썩거리지 않는 게 숨이 끊어진 것처럼 보였다. 가동은 황급히 초왕을 바라보았다. 초왕의 안색도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는 가슴을 움켜쥔 채 나무에 기대어 겨우 서 있었다.

가동은 불길한 예감에 몸을 떨었다. 설마, 화를 참지 못해 사장풍을 죽음으로 내몰았단 말인가…….

“왕야, 저, 저, 저 애는…….”

손가락으로 사장풍을 가리킨 가동이 더듬거리며 뭔가 말하려 했다.

“죽지 않았으니 데려가거라. 다시는 본왕의 눈에 띄지 않게 하거라.”

그 말에 상태를 확인해 보니, 희미하게나마 숨이 붙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대체 어디로 데려간단 말인가? 숨은 미약하고 몸이 늘어져 있으니 들어 올리기도 힘들었다. 끙끙거리고 있으려니 초왕이 다가와 그의 등에 사장풍을 짊어 주었다.

“위 의원에게 데려가 치료해 주거라. 죽지만 않으면 된다.”

사장풍은 예전과 달리 목숨을 걸고 맞섰다.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기세였다. 하지만 초왕에게 제대로 맹공을 당한 그는 결국 가슴을 움켜쥐었다. 솟구치는 피를 어떻게든 억누르려 했지만, 목구멍 가득 피비린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초왕도 그의 의도를 훤히 꿰고 있었다. 사장풍은 그의 손에 죽으려 하고 있었다. 사장풍을 죽이면 더는 백천범에게 화가 미치지 않을 테니. 그가 자초한 일이니 목숨을 걸어서라도 백천범을 지키려 하고 있었다.

인정 넘치는 사내임은 분명했지만, 그 인정을 엄한 곳에 쏟고 있지 않은가.

그 또한 사장풍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다만 백천범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후 홀로 대청불사를 찾아갔을 때, 그는 보살 앞에서 약속을 했다. 지난날의 살육을 뉘우치고, 앞으로는 살생 대신 덕을 쌓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사장풍의 목숨은 그 때문에 살려 줬을 뿐이다.

관청으로 돌아온 그가 탁자에 놓인 찬합을 발견하고 영구에게 물었다.

“누가 가져왔느냐?”

“왕비 마마께서 가져오셨습니다.”

“언제?”

“왕야께서 권법을 연습하실 때 가져오셨습니다.”

“가동이 입을 놀리진 않았겠지?”

“예. 왕비 마마께서는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묵용감이 탁자를 짚으며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이내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영구가 곧장 그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다가왔다.

“왕야, 혹…….”

“괜찮다. 아무 일도 아니다.”

어릴 때부터 묵용감의 곁을 지켜온 영구다. 그의 상태는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왕야, 소인에게 상처를 보여 주십시오.”

묵용감이 손을 가볍게 내저었다.

“그리 놀라지 말거라. 정말 아무 일도 아니다.”

그 정도 말에 물러날 영구가 아니기에, 담담하게 그를 위협했다.

“왕비 마마께 알리고 싶으시다면…….”

묵용감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담도 크구나!”

성을 낸 탓에 가슴이 욱신거리는지, 그가 기침을 터트렸다.

영구는 끈질기게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왕야, 소인에게 상처를 보여 주십시오.”

묵용감은 입을 꾹 다물었다. 생각해 봐도 별다른 방법이 없기에, 그가 찬합을 가리켰다.

“저것부터 먹어야 하지 않겠느냐.”

영구가 찬합 뚜껑을 열고 접시를 내어주었다.

“드십시오.”

그에게는 초왕의 안위가 언제나 최우선이었다.

묵용감은 밥을 다 먹은 뒤 영구에게 상처를 보여 주었다. 등에 난 커다란 멍이 온 힘을 다해 대적한 사장풍을 설명하고 있었다.

영구가 이를 악물더니 나직하게 말했다.

“소인이 약을 발라 드리겠습니다.”

묵용감은 묵묵히 등을 내주었다. 약을 바른 영구는 곧장 밖으로 향했다. 묵용감이 그를 불러세웠다.

“어딜 가느냐?”

“왕야께 상처를 남기다니, 소인이 그자의 목숨을 끊겠습니다.”

“무엄하구나.”

묵용감이 대번에 호통을 쳤다.

“그놈을 죽이려 했다면 본왕이 직접 했다. 이 일은 여기서 끝낼 테니, 다시는 언급하지 말거라.”

하는 수 없이 영구는 걸음을 멈췄다. 낯빛은 여전히 어두웠지만, 그는 가동처럼 입을 놀리지 않았다.

문득 제방을 떠올린 묵용감은 직접 확인할 채비를 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영구가 그를 말리고 나섰다.

“문제가 생겼다면 보고를 하러 왔을 테니 염려 마십시오. 소인이 한번 다녀오겠습니다.”

영구가 자꾸만 자신을 막으니 묵용감의 기분은 서서히 저조해졌다. 한바탕 성을 내려는데 어느새 태자가 얼굴을 내밀었다.

“누가 우리 초왕의 심기를 건드리기라도 했느냐? 어찌 이리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이야?”

묵용감이 영구에게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평소에 오냐오냐해 주었더니 사사건건 간섭하려 드는구나. 본왕이 너무 잘해 주었더냐?”

태자가 영구를 향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찌 초왕야의 심기를 이리 건드렸느냐?”

영구가 허리를 숙인 채 말했다.

“왕야께서 아침부터 제방에 가야겠다고 하십니다. 왕야의 건강이 걱정되어 말리다가 그만 심기를 상하게 하였습니다.”

태자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 그랬군. 네 충심을 초왕이 어찌 모르겠느냐. 내가 타이를 테니 그만 네 볼일 보거라.”

영구가 밖으로 나간 뒤에도 묵용감의 굳은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태자가 웃으며 그를 달랬다.

“다 널 위해서 한 말인데 무엇 하러 화를 내느냐. 오늘 아침에 내가 확인했으니 그리 걱정하지 말거라. 제갈 선생이 기상을 관측해 보니 비의 세력이 약해져 수위도 곧 낮아질 거라는 구나. 우리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비로소 초왕이 은은한 미소를 보였다.

“그렇다면 마음이 놓이는군요.”

태자가 그를 빤히 바라보더니 불쑥 질문을 던졌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기억하느냐?”

묵용감이 곧바로 기억을 되짚었지만 가물가물할 따름이었다.

“…무슨 날입니까?”

“이런, 이런.”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왕비의 생일만 기억하고 다른 이들의 생일은 간단히 잊어버리는구나.”

묵용감이 마침내 누구의 생일인지 기억해 냈다.

“주아의 생일이군요.”

“맞다.”

태자가 쓴웃음을 지었다.

“실마리를 주었다고 알아맞히는 걸 보니, 양심은 있구나. 예전에는 잊지 않고 선물을 준비하더니, 이제는 그런 마음까진 쓰지 못하겠지.”

묵용감은 옅은 미소만 지을 뿐, 묵묵부답이었다.

“네 고충은 잘 안다. 네게 무얼 하라고 하지도 않겠다. 다만 저녁에 내 처소에서 작은 연회를 하려고 하니 왕비와 함께 오너라. 술이나 한잔하자꾸나.”

묵용감은 고민도 하지 않고 대꾸했다.

“왕비가 홑몸이 아니라 술은 마시지 못합니다.”

태자가 자신도 모르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내가 잊었겠느냐? 그저 이번 기회에 모이자는 것뿐이지. 왕비가 누각에 찾아와 소란을 피웠어도 주아는 넘어갔었다. 이 정도 체면도 봐주지 않으면 너무 인정머리 없지 않느냐. 한집에 살면서 마주쳐야 하는 사이인데 어찌 정 없이 대하느냐?”

묵용감이 지나가듯 물었다.

“주아의 몸은 어떻습니까?”

“그래도 그 애가 아팠다는 건 기억하는구나.”

태자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몸은 많이 나아졌지만진, 영 기운이 없어 보이는구나. 해서 떠들썩한 자리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

결국 묵용감은 태자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태자가 떠난 뒤, 묵용감은 잠시 자리를 지키다 성 밖 주둔지로 향했다.

* * *

얼마 뒤, 마차 한 대가 관청을 빠져나와 오수진으로 향했다.

마차 안에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사장풍이 누워 있었다. 급한 대로 처치를 한 뒤라 짙은 약초 향이 마차 안에 가득했다. 얼굴 곳곳의 핏자국을 닦고 나니 상처가 도드라졌다.

얼굴은 돼지머리처럼 부은 데다 눈을 뜨고 있어도 가느다란 실처럼 보였다. 온통 불그스름한 피멍이 가득해, 보기만 해도 오싹했다.

가동이 죽상이 되어 입을 열었다.

“이게 무슨 고생이냐? 멀쩡히 잘 살던 애가 왜 이런 꼴이 되냐고!”

사장풍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내 손…….”

가동이 언짢은 듯 소리쳤다.

“손은 무슨 손, 죄다 부러졌지!”

사장풍이 한숨을 내쉬더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모습에 가동이 혀를 찼다.

“걱정하지 마. 위 의원이 잘 붙여 줬으니까. 잘만 회복하면 못 쓸 일은 없대.”

사장풍은 퉁퉁 부은 눈을 겨우 깜박거렸다. 한참 후, 그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는?”

“괜찮으시지. 아침 일찍부터 왕야께 아침 식사를 드린다고 신이 나서 달려 오시더라.”

가동이 한심하다는 듯 말했다.

“넌 무슨 귀신에 홀렸냐? 어찌 왕비 마마만 바라보는 거야? 대체 왕비 마마를 해하려는 거야? 너를 해하려는 거야? 왕비 마마는 절대 해할 수 없어. 왕야께서 아무리 화가 나셔도 마마를 건드리시겠어? 하지만 넌 아니야. 네 꼴 좀 봐라. 시체 되기 직전이지.”

사장풍이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

“괜찮으시다니 다행이네.”

그 꼴을 더 지켜볼 수 없었던 가동이 욕을 퍼부었다.

“돼지머리처럼 퉁퉁 부어서는 뭘 웃어. 웃지 마. 소름 끼치니까.”

* * *

“사장풍을 죽이지 않았다고요.”

황보주아가 어처구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런 자를 살려 두셨군요.”

“그래. 나도 의아하다. 그 성격에 사장풍을 살려 두다니.”

태자가 긴 탄식을 내뱉었다.

“더는 우리가 알던 초왕이 아니구나.”

태어날 때부터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그들은 언제나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백성들을 내려다보았다. 천위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으니, 이를 거역하고 대항하는 자는 응당 벌하는 게 옳았다. 한데 묵용감은 이를 참고 넘어간 게 아닌가!

“우유부단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니, 더는 큰일을 할 수 없겠구나.”

황보주아는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태자 오라버니, 설마 셋째 오라버니를 포기하시려는 겁니까?”

“아니, 구제해야지. 예전의 살기 넘치는 군신으로 되돌리겠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