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1화
묵용감이 방을 나설 때, 백천범도 깨어나 있었다. 그녀는 장막에 새겨진 구름 문양을 바라보며 침대를 빠져나가는 다급한 소리를 들었다. 그녀를 떠나는 게 조금도 아쉽지 않은 듯했다.
평소엔 그렇게나 떨어지기 싫어하던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그녀에게서 훌쩍 멀어져 버렸다. 속이 아려 왔지만, 어찌하겠는가.
다시 잠들 수도 없었던 그녀는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월규가 안으로 들어와 시중을 들었다.
“오늘은 마마께서 적극적으로 나서 보십시오. 왕야께서는 식사도 하지 않고 관청으로 가셨습니다.”
백천범은 조금 불안해져 손을 꼼지락거렸다.
“밥도 안 드시고 가신단 말이야?”
“그런 일을 겪고 밥이 넘어가겠습니까?”
월규가 색이 고운 끈으로 머리에 매듭을 묶어 주었다.
“다른 집이었다면 부인이 어찌 되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왕야께서는 모진 말도 한마디 안 하셨잖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그녀에게 했던 말을 잊을 순 없었다.
“나까지 죽이겠다고 하셨어.”
“마마를 죽이신다고요?”
월규가 코웃음을 쳤다.
“왕야의 성격에 그 말만 나온 게 다행입니다. 정작 죽이는 건 고사하고 왕야께서 언제 마마의 손가락 하나 건드리신 적이나 있습니까?”
백천범이 손을 축 늘어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왕야한테 사과하러 가야겠어.”
월규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가셔야지요. 식사도 거르고 가셨으니 마마께서 가져다드리는 게 좋겠습니다. 사근사근하게 몇 마디 건네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넘어가 주실지도 모릅니다.”
백천범이 순순히 받아들였다.
“응, 네 말대로 할게.”
정작 찬합을 들고 관청으로 찾아가니, 영구와 가동만 그녀를 맞이할 뿐이었다.
그녀가 가동에게 물었다.
“사부님, 왕야는요?”
가동이 울상이 된 채 대답했다.
“왕야께서는… 권법을 연습하고 계십니다.”
그녀는 조금 의아해져 재차 물었다.
“왕야께서 권법 연습을 하시는데 사부님은 왜 기분이 안 좋은 거예요?”
“…….”
어찌 기분이 좋을까. 나무 말뚝으로 하던 연습을 산 사람을 상대로 하게 생겼는데. 그가 목숨을 부지할 수나 있을지 장담할 수도 없었다.
백천범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물었다.
“어디에서 연습하고 계세요?”
줄곧 침묵을 지키던 영구가 차갑게 대꾸했다.
“왕비 마마, 왕야께 드릴 말씀이 있으시다면 소인에게 말씀해 주시고, 아니라면 돌아가 주십시오.”
본래 차가운 편이긴 해도, 영구가 이렇게까지 얼굴을 굳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어젯밤 일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들자 멋쩍어진 백천범은 가동에게 찬합을 건넸다.
“왕야께서 아침을 거르셨다고 해서요. 연습이 끝나면 드시라고 전해 주세요.”
가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돌아가려 하자 가동이 다급히 그녀를 불렀다. 백천범이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사부님, 뭐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없습니다.”
재빨리 대답한 쪽은 영구였다. 그가 차가운 눈으로 가동을 훑으며 물었다.
“있습니까?”
가동은 백천범과 영구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반쯤 울상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아무 일도 아닙니다.”
어느 모로 보나 수상쩍었지만, 백천범의 심정도 복잡했던 터라 깊게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발길을 돌렸다.
백천범이 떠나자 영구가 가동을 노려보았다.
“이 일에 관여하려 했다간, 왕야께서 살려 주신다고 해도 제가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가동이 막막함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이 결국 저 꼴이 되니까 내 마음이……. 에휴, 장사나 치러 줘야지, 그래야 죽음이 헛되지 않을 테니…….”
“왕야께서 죽이실 거라고 누가 그럽니까?”
영구가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왕야께서 정말 죽일 생각이셨다면 지금까지 기다리셨겠습니까?”
“왕야께서 안 죽이실까?”
가동이 놀람과 기쁨이 섞인 얼굴로 물었다.
“정말 안 죽이실까?”
“왕야께서도 죽이고 싶으시겠지요. 다만 아기씨를 위해서라도 쉽게 죽이시진 않을 겁니다.”
영구의 침착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죽을죄는 면한다 해도 산 죄까지 면할 순 없을 테니.”
* * *
아침이 밝아오자 사장풍은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은 정신이 몽롱해, 그는 기지개를 켜려 손을 올렸다. 그때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손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숙여 보니 그제야 자신의 상태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밧줄에 휘감긴 채 말뚝에 단단히 묶여 있었다.
희미하게나마 어젯밤의 일이 떠오르자,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후회가 그를 덮쳤다. 목숨을 잃는 건 상관없었지만 백천범에게 엄청난 누를 끼치고 말았다. 홑몸도 아니라 조심해야 하는데 이런 일에 휘말리게 했으니……. 문득 초왕의 분노가 그녀를 향할까 겁이 났다.
서둘러 초왕을 찾아가 사실대로 고해야 했다. 그는 힘껏 힘을 주어 밧줄을 끊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밧줄은 더욱더 그의 전신에 조여들었다.
“괜히 기운 빼지 말거라. 끊을 수 있을 줄 알았느냐.”
앞쪽에서 냉랭하고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나무 아래에 묵용감이 곧은 자세로 서 있었다. 언제부터 저곳에 서 있었단 말인가?
비는 그쳤지만 짙은 먹구름이 낮게 드리운 탓에 사방이 묘하게 어두웠다. 새벽바람이 불어오자 젖은 옷으로 서늘함이 파고들었고, 뼛속까지 아리는 느낌에 그는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축축하게 젖은 말뚝이 닿아 오싹하기 그지없었다.
사장풍은 이를 악문 채 묵용감이 걸어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내디딘 그가 사장풍의 앞에서 멈췄다.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초왕의 표정은 더없이 침착했다. 이내 그의 입가가 가볍게 뒤틀리더니 비아냥거림이 흘러나왔다.
“어젯밤엔 술에 취해 있었더냐?”
“전부 제 잘못입니다. 왕비 마마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가 묻지도 않은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제가 오는 줄 전혀 모르고 계셨습니다. 마마께선…….”
말이 끝나기도 전에 묵직한 주먹이 그의 얼굴을 가격했다. 곧장 비릿한 피가 입가를 타고 흘렀다. 어찌나 강하게 내리쳤는지 잇몸이 다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사장풍이 통증을 억누르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화는 제게 전부 푸십시오. 마마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퍽!
이번엔 그의 머리 옆쪽에 둔중한 충격이 전해졌다. 순간 눈앞이 아득해지는 통증에 사장풍의 고개가 휙 꺾였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마마께선 왕야의 아이를 가지셨습니다. 마마…….”
퍽, 퍼억, 퍽!
연이어 내려치는 주먹이 그의 말을 잘라냈다. 어느새 그의 얼굴은 선홍빛 피로 물들어 있었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모습이었다.
몸을 옭아맨 밧줄만 아니었다면 사장풍은 진작에 쓰러졌을 터였다. 고개를 축 늘어뜨린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너무나도 희미해서, 알아들을 수도 없었다.
잠시 그를 지켜보던 묵용감이 밧줄을 풀었다. 사장풍이 곧바로 무너져내렸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가 고개를 들고 묵용감과 눈을 마주쳤다.
“일어나거라!”
낮은 호통이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네가 그리 지껄여대는 연심을 두고 본왕과 한 판 겨뤄 보자꾸나.”
사장풍은 말뚝을 붙잡아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옷소매로 얼굴의 피를 훔쳤다.
“좋습니다. 관례대로 승자가 마, 마음을 얻겠지요.”
“죽고 싶어서 발악을 하는구나!”
묵용감은 곧바로 그를 걷어차 멀리 내동댕이쳤다.
한참을 밀려간 사장풍이 바닥에 고꾸라지더니 피를 울컥 쏟아냈다. 그러나 그는 전과 달리 재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묵용감의 발차기에 혈기가 되살아나기라도 한 듯, 그의 눈이 이글거렸다. 젖은 도포와 윗옷을 벗어 던진 사장풍이 제대로 자세를 잡았다. 그가 묵용감을 노려보며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덤비십시오. 어차피 생사는 하늘이 정하는 것입니다. 결판을 내면 그간의 빚을 모두 청산하는 걸로 하시지요.”
묵용감이 입꼬리를 비틀며 답했다.
“패배한 장군은 거론할 가치도 없지.”
하지만 그를 얕볼 생각은 없었기에, 묵용감은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려 싸움에 응했다.
둘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격한 싸움을 벌였다. 마음속에 품은 여인을 위해서라면 두 사람 모두 숨이 끊어질 때까지 싸울 수 있었다.
한 사람은 차디찬 살기를 내뿜었고, 다른 한 사람은 죽을 각오로 덤벼들었다. 주먹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묵직한 타격음을 제외하면, 주위는 숨 막히는 침묵에 휩싸여 있었다.
가동과 영구는 멀리 떨어져 있는 나무 아래 서 있었다. 풀숲이 시야를 가리고 있어 이따금 싸우는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왔다.
가동이 초초함을 못 이기고 입을 열었다.
“왕야께서 왜 아직도 안 나오시지?”
“사장풍도 실력이 있는 모양입니다. 형님과 다르게 말입니다.”
“나보다 사장풍의 실력이 더 뛰어나다고?”
가동이 발끈하며 맞섰다.
“한번 데려와 봐. 누가 더 뛰어난지 보여 줄 테니까.”
영구가 그를 노려보며 혀를 찼다.
“지금 말입니까? 나올 때까지 기다리면 숨도 제대로 붙어 있지 않을 텐데요.”
가동이 흠칫 놀라며 목소리를 낮췄다.
“왕야께서 죽이진 않으실 거라며.”
“죽이진 않으셔도 죽기 직전까진 해하실 수는 있습니다.”
가동의 입에서 결국 탄식이 흘러나왔다.
“지난번에는 보름 가까이 못 일어날 만큼 때리셨는데, 이번에는 정말 가만두지 않으시겠네.”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됐어. 그런 애랑 어떻게 겨뤄. 숨만 붙어 있어도 다행이지.”
영구는 풀숲 너머의 소리에 집중하고 있다가 별안간 숲 안쪽으로 향했다.
“끝났습니다. 시신을 수습하러 가 보죠.”
“뭐?”
영구의 건조한 시선이 가동에게 꽂혔다.
“지금 가지 않으면 정말 장사를 치를 수도 있습니다.”
가동이 황급히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영구가 옆을 슬쩍 훑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태자께서 오셨습니다. 먼저 가십시오. 제가 막고 있겠습니다.”
가동은 짧게 대답하고는 서둘러 앞으로 향했다. 영구가 몸을 돌려 태자에게 걸어가 예를 갖췄다.
“전하, 이리 이른 아침에 돌아오셨습니까?”
태자는 늘 초왕의 두 호위 무사에게 온화하고 친절하게 대했다.
“그래, 제방이 철옹성처럼 튼튼하더구나. 다 네 왕야 덕분이지. 어찌, 초왕은 아직 나오지 않았느냐?”
“왕야께서도 금방 오실 겁니다.”
“가동은 어딜 가는 것이냐?”
태자가 가동이 향한 쪽을 응시하며 물었다.
“자신의 여인을 만나러 간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