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0화
“물러나시오!”
그는 처음 보는 사람처럼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백천범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왕야, 오해예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저도 어떻게 된 건지 정말 몰라요…….”
“그만!”
여기서 무엇을 말해야 한단 말인가. 이 늦은 밤, 이 장소에서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그에겐 세상이 무너지는 충격이었다. 정녕 그들이 침대 위에서 부둥켜안고 있는 걸 봐야 한단 말인가? 그의 마음을 얼마나 더 찢어 놓아야 만족하려고?
“마지막으로 말하겠소. 물러나시오. 물러나지 않으면.”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나지막이 내뱉었다.
“당신도 함께 베겠소.”
그는 정말 칼을 휘두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를 향해 퍼부은 사랑만큼이나, 증오심도 끝을 모르고 차올랐다.
오히려 백천범이 냉정함을 되찾았다. 그녀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말씀드렸잖아요. 왜 제 말은 듣지 않으시는 거예요? 모르시겠어요? 지금 사 장군님은 잔뜩 취했어요. 저도 이제 막 발견한 참이라고요. 어떻게 들어 왔는진 저도 잘 몰라요.
무슨 일인지는 술이 깬 뒤에 얘기하세요. 사람을 풀 베듯 쉽게 죽이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절 죽이고 싶으시면, 죽이세요. 아이까지 함께 죽일 수 있으시다면 한번 해 보세요.”
아이를 가졌다고 해도, 그의 눈에는 한없이 가녀린 여인이었다. 나무 아래에서 피어난 작은 꽃송이처럼 연약한 그녀가 결연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 달빛에 비친 장검이 허공을 가르며 시린 빛을 뿜었다.
하지만… 차마 그녀를 내리칠 수는 없었다. 그녀를 죽이는 일은 자신을 죽이는 일과 다름없었다. 그녀는 그의 일부인 동시에 그를 이루는 모든 것이었다. 그는 그녀의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었다.
무력감이 온몸을 내리눌렀다. 검은 허공을 가르며 바닥으로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침대로 돌아가시오. 오늘은 서늘하니 풍한이 들지도 모르오.”
백천범이 뒤쪽을 바라보려 했지만, 그의 외침이 그녀를 붙잡았다.
“저자는 보지 말고, 이리 오시오.”
그가 검을 쥐지 않은 손을 내밀었다.
“어서, 이리 오시오.”
백천범은 조용히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한 손으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그가 무엇을 할지 짐작할 수 없었지만, 피를 보는 일만큼은 일어나지 않길 바랐다.
사장풍은 여전히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그녀가 보인 행동이, 자신을 선택한 거라고 믿는 얼굴이었다.
묵용감은 경멸의 시선을 보내며 품 안의 여인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대체 저놈이 무슨 생각을……. 그가 고개를 숙여 백천범에게 입을 맞췄다. 한쪽 팔로 그녀를 감싼 채 파고들며 열기 어린 입맞춤을 나누었다.
백천범은 자연스레 그의 목을 껴안으며 받아들였다. 너무나 따스하고 격정적인 광경에 사장풍은 자신이 꿈을 꾸는 줄만 알았다. 어찌 자신을 앞에 두고……?
기세등등했던 그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그가 땅을 짚으며 힘겹게 일어났다.
“떨, 떨어지십시오!”
“썩 꺼지세요!”
날카로운 호통이 그를 맞이했다. 백천범은 사장풍을 한껏 노려보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나눈 다정한 입맞춤에 입술은 한결 촉촉했고, 눈빛에는 따스한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사장풍에게 고개를 돌린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서 온기가 사라지고 증오가 차올랐다.
그녀의 표정도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그녀를 찾아와 성가시게 굴고, 자꾸만 그녀의 삶에 들어가고, 주위를 맴돌며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 게 죽도록 싫다는 표정이었다.
그의 세상이 완전한 암흑으로 뒤덮이는 듯했다.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 뭐든지, 뭐라도 해명하고 싶었다. 그는 정말로, 그녀가 무사하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천범 아가씨, 저는……”
“썩 꺼지라니까!”
그녀가 매섭게 소리치더니 새하얀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내 앞에서 당장 사라지세요!”
그는 대꾸도 못하고 방을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그녀를 달래는 묵용감의 목소리가 들렸다.
“화내지 마시오. 아이가 놀랄 수도 있소.”
사장풍은 주인을 잃은 개처럼 처량한 모습으로 방을 나섰다. 바깥방에서 월규가 그에게 혐오스럽다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주인을 꼭 닮은 듯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문으로 향했다. 문 너머의 어둠이 거대한 주둥이를 벌리고 그가 걸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아득한 문 너머를 바라보고 있는데 별안간 목덜미에 강한 충격이 전해졌다. 그는 두 눈을 하얗게 뒤집으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방 안에 있던 묵용감은 월규에게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분부했다. 그는 칼을 갈무리한 후, 물을 한 잔 마시고 걸음을 옮겼다.
그동안 백천범은 침대 옆에서 내내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왕야.”
“씻고 올 테니 먼저 눈 붙이시오.”
“씻고 난 뒤에 돌아오실 거예요?”
여전히 앞을 보고 있는 그가, 넌지시 되물었다.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어디에서 자겠소?”
이곳은 그의 침소였다. 그의 부인은 이곳에 있었다. 그런데 이곳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잠을 청하겠는가?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그녀는 겨우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 옆에 앉은 그녀가 넋을 놓았다. 왜 자꾸만 이런 일이 생기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장풍에게 매섭게 소리친 건 묵용감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였지만, 동시에 잔뜩 화가 난 터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묵용감의 오해를 사다니, 억울하고도 화가 나 죽고만 싶었다.
묵용감이 오해해도 그를 탓할 순 없었다. 종일 고생한 끝에 한밤중에 급히 돌아왔는데 이런 상황을 맞닥뜨렸으니 어떤 기분이었겠는가? 누구라도 아까 같은 상황이라면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누각에서 자신이 소란을 피운 날을 떠올렸다. 그날은 오해에 불과했지만, 이번엔 그녀와 사장풍이 함께 있는 모습을 목격하지 않았는가. 비교할 수 없는 상황에 한숨만이 흘러나왔다.
한편으로는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방을 나서던 묵용감의 뒷모습에서 느낀 위화감이, 여전히 그녀의 주위를 맴돌았다.
* * *
묵용감은 한참 동안 넋을 놓고 있었다. 몸을 감싼 물이 천천히 식어 갔지만 몸 안에서는 불이 끓는 듯했다.
그는 방금 있었던 일을 차분히 곱씹었다. 당황한 그녀의 모습, 두려워하는 표정, 침착한 척 꾸며낸 태도, 유난히 뜨겁게 받아 준 입맞춤, 사장풍에게 소리칠 때 미약하게 떨리던 몸까지…….
그녀는 사장풍과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다. 사장풍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사장풍을 죽일까 무서워서. 그동안 짙은 행복을 누려왔건만, 그녀의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사장풍의 자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그녀의 민낯을 들출 생각은 없었다. 그녀가 이토록 연기를 한다면, 그도 받아 줄 생각이었다.
바깥에서 여전히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숙면을 취하기 좋은 날씨였지만, 오늘 밤 그는 쉽게 잠들 수 없으리라.
큰 사달이 난 탓에 기홍과 녹하도 진작에 일어나 목욕간 앞을 지키고 있었다. 두 시녀도 입을 굳게 다문 채 앞만 바라보았다.
월규는 백천범과 함께 있었다. 침대 옆에 앉은 백천범은 정신이 반쯤 나가 있는 듯했다. 누구라도 오늘의 일을 알게 된다면 초왕의 편을 들 터였다. 월규도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표정을 마주하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고민하셔도 소용없습니다. 어서 주무십시오.”
월규의 권유에, 백천범은 조금 정신이 돌아온 듯 희미하게 물었다.
“왕야는?”
“목욕간에서 안 나오셨습니다.”
“아직도 씻고 계신 거야?”
“그런 듯합니다.”
“왕야께서… 화가 나셨을까?”
그녀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으니, 월규도 몇 마디 보태지 않을 수 없었다.
“마마, 왕야께서는 마마를 무엇보다 애지중지하십니다. 한밤중에 비를 맞고 달려오실 정도면 마마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마께서는 어찌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드셨습니까?”
“그게 내 책임이라는 거야? 사 장군이 여기 있을 줄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월규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곧장 소리를 지르셨어야지요. 그랬으면 소인들이 바로 뛰어와 마마의 결백을 증명할 수 있었습니다. 하, 이 꼴 좀 보십시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단둘이 침소에 계시다니요.”
백천범이 주저하다 말했다.
“그렇게 칠흑 같진 않았어. 등불을 켰거든.”
“어쨌든 소인을 먼저 부르셨어야 합니다. 단둘이 계시는 것보단 세 사람이 함께 있는 게 나을 테니까요. 또, 마마께서는 사 장군을 감싸 주지 않으셨습니까? 왕야께서 사 장군을 죽이시겠다는데, 무엇 하러 막으셨습니까? 화근을 없애면 다 끝나는 일인걸요.”
백천범이 눈을 부릅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람 목숨을 어찌 쉽게 해할 수 있어?”
월규가 문밖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사 장군도 참, 어찌 번번이 마마를 성가시게 한답니까? 마마께서 잘 지내시는 꼴을 못 보겠으니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닐까요.”
“그런 사람은 아니야.”
“보십시오. 지금도 그자를 감싸지 않으십니까?”
성을 내던 월규가 갑작스레 얼굴을 굳히더니 백천범에게 황급히 손짓했다.
백천범은 곧장 침대 위로 올라가 이불 속에 몸을 파묻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묵용감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걸어온 그는 잠시 밖에 서 있더니 장막을 걷었다. 안으로 들어오는 기척과 함께 평소처럼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 누웠지만, 그녀에게 어떤 손길도 닿지 않았다.
등을 돌리고 누워 있던 백천범은 속상함을 느꼈지만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그는 자존심이 센 사내였으니 이런 일 앞에서 쉽게 마음을 추스르지 못할 터였다. 월규의 말대로, 처음부터 소리를 질렀다면 이런 상황이 되지 않았을까.
날이 밝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묵용감은 쪽잠을 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닭이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작은 뒷모습은 아무리 봐도 임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좁은 어깨를 보면 그는 늘 가슴 언저리가 시큰해지곤 했다.
평소처럼 그녀의 어깨에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는 침대를 빠져나갔다.
세안과 환복을 마치고 방을 나서니 영구와 가동이 복도에 서 있었다. 한 사람은 무표정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그는 말없이 영구를 바라보았다. 영구는 곧장 예를 갖추고 그를 안내할 준비를 했다. 가동이 뒤를 쫓아가려 했지만, 영구가 잽싸게 발을 걸었다. 비틀거리는 가동에게 차가운 시선이 내려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였다. 가동은 울상이 되었지만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