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9화
“왕야께선 왜 아직 안 오실까?”
백천범이 찐빵을 조몰락거리다 입안에 넣었다.
“태자 전하께서는 못 오신다던데… 왕야께서도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월규가 바늘을 머리에 대고 몇 차례 긁더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또 비가 내리는군요.”
“어쩔 수 없지, 뭐.”
백천범이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비도 오는데 오가려면 얼마나 번거롭겠어. 그 시간에 쉬시는 게 낫지.”
월규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마마께서는 머리만 닿으면 바로 잠드시지만, 왕야께서는 마마 없이 못 주무시는걸요.”
백천범이 거만하게 목을 치켜세웠다.
“누가 날 그렇게 은애하라고 했나, 뭐.”
월규는 못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곧 어머니가 되시는 분이, 걸핏하면 그런 말씀만 하십니까.”
월규가 실을 이로 끊어내고 완성된 호랑이 신발을 건넸다.
“한번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예뻐.”
백천범이 손에 묻은 부스러기를 쪽쪽 빨더니 신발을 들고 유심히 살폈다.
“정말 잘 만들었는걸. 녹하 언니 솜씨도 곧 따라잡겠어.”
“마마, 녹하 언니 앞에서 그 말씀은 절대 하지 마십시오. 더는 알려 주지 않으려고 하실 테니까요.”
“에이, 녹하 언니는 그렇게 쩨쩨한 사람 아니야.”
백천범이 신발 두 짝을 나란히 놓았다.
“녹하 언니한테 토끼 신발도 만들어 달라고 해야겠어. 여자아이일 수도 있잖아? 토끼 신발을 신으면 얼마나 귀여울까!”
“마마께서는 세자 아기씨를 원하시지 않습니까?”
백천범이 헤벌쭉 웃으며 답했다.
“왕야께서는 나처럼 예쁜 여자아이면 좋겠대.”
월규는 더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왕야 눈앞에 선녀가 있어도, 마마가 훨씬 더 예쁘다고 하실 겁니다.”
백천범이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더니 히죽거렸다.
“내가 그 정도는 아니라는 거야?”
“어휴, 예쁘긴 예쁘십니다.”
월규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만 단정하게 행동하실 순 없으십니까? 어찌 낯 두꺼운 장난만 치십니까? 세자 아기씨는 왕야를 닮으시면 좋겠습니다. 단정하고 고귀한 데다 위세도 부리지 않는 깨끗한 기개를 물려받으실 수 있게 말입니다.”
백천범이 말만 들어도 피곤하다는 듯 진저리를 쳤다.
“그렇게 살면 얼마나 피곤해. 나는 그렇게 살기 싫어. 사람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아야지. 남한테 보여 주려고 사는 인생도 아니잖아? 내가 좋으면 그만이지.”
“마마를 어찌 말로 당해 낼까요. 늦었으니 그만 침소에 드십시오. 소인이 시중을 들겠습니다.”
백천범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알겠어. 왕야께서는 돌아오지 않으실 테니 편히 잘 수 있겠다. 왕야가 계시면 밤새 성가시게 하실 거야.”
“마마, 부디 말씀 좀 조심하십시오, 전 아직 출가 전인 여인입니다. 마마께서는 아무렇지 않으셔도 전 부끄럽습니다.”
그 말에 백천범은 한 술 더 뜨기 시작했다.
“사실 침소에서의 즐거움은 말이야…….”
월규는 귀를 막고 걸음을 재촉했다.
“안 듣습니다, 안 들어요! 소인까지 나쁜 물을 들이지 마십시오. 소인도 시집은 가야지요.”
주인과 종은 시시덕거리며 목욕간으로 향했다. 월규는 백천범의 목욕 시중을 든 뒤 안채로 데려가 이불까지 꼼꼼히 덮어 주었다. 그녀의 침대 맡에 작은 등잔불을 켜두자, 월규의 하루도 마무리되는 듯했다.
* * *
기름을 먹인 횃불이 이글거리며 제방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이슬비를 뚫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횃불의 행렬은 꼭 웅크린 용처럼 보였다.
묵용감은 비옷을 걸친 채 제방을 순찰하고 점검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각종 문제를 겨우 해결할 수 있었다. 그는 제방 주변에 막사를 설치하고 교대로 당직을 설 수 있도록 병사들의 순번을 정해 주었다. 며칠 전처럼 비가 퍼붓지만 않는다면, 큰 문제는 없으리라.
막사로 돌아오니 태자가 좌식 탁자 옆에 앉아 차를 끓이고 있었다. 그가 웃으며 묵용감을 맞이했다.
“마침 잘 왔구나. 따뜻한 차 좀 들거라.”
묵용감이 웃으며 말했다.
“형님께서는 어디서든 여유를 잃지 않으십니다.”
태자가 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 하러 초조해하겠느냐. 이리 자그마한 취미라도 즐겨야지. 심신을 안정시키는 차다. 한 잔 마시고 푹 쉬거라.”
묵용감은 밀려오는 피곤함에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병풍 뒤에 놓인 침대를 발견한 그가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
“형님, 이곳에서 주무실 생각이십니까?”
“물론이지. 이대로 돌아가면 마음이 놓이지 않을 듯하구나. 내일 아침에 틈을 메운 부분이 무탈한지, 수위가 불어나진 않았는지 확인하고 돌아가도 늦지 않는다.”
묵용감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들이켜고는 예를 갖췄다.
“둘째 형님께서 노고가 많으십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묵용감은 곧장 몸을 일으켰고, 태자는 멍한 표정으로 따라 일어났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전 돌아가야 합니다.”
묵용감이 머쓱히 웃음 지었다.
“전 형님과 달리 처실이 있지 않습니까. 걱정하고 있을 테니, 돌아가야 합니다.”
“저런, 저런.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한단 말이냐.”
태자가 난감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정녕 왕비와 단 하루도 떨어지지 못하느냐?”
묵용감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부끄러운 듯 웃었다.
“홑몸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 많은 하인이 시중을 들거늘, 걱정될 게 있단 말이냐? 더욱이 멀지도 않은데……. 무슨 일이 있으면 반 시진도 안 되어 전갈이 오지 않겠느냐.”
태자가 그를 차분히 타일렀다.
“오늘은 너무 늦었다. 종일 고생했으니 웬만하면 이곳에서 쉬어 두거라.”
그러나 묵용감의 의지는 흔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늦어도, 언제가 되어도 그는 그녀의 곁으로 돌아가야 하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곁에서 눈을 감는 순간만이 묵용감에게 완전한 안식을 안겨다 주었다.
먹물을 뿌린 듯 새까만 하늘에서 가는 빗줄기가 쉼 없이 내리고 있었다. 조용히 지면에 스며드는 빗물을 짓밟으며, 말들은 힘차게 내달렸다. 세 마리의 말이 쏜살같이 달려가다 어둠 속으로 완전히 녹아들었다.
태자는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못난 놈, 정 때문에 기어코 일을 그르치는구나.”
* * *
몸을 보양하는 찜과 탕을 많이 먹어서인지 아랫배가 자꾸 당겨왔다. 혼미한 와중에도 몸을 일으킨 백천범은 측간에 가기 위해 신발을 신었다. 월규를 깨우고 싶지 않았던 터라, 직접 등불을 켜고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
익숙한 빗소리가 이어지고 있었다. 처마 끝에서 줄에 꿴 구슬처럼 줄줄 이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던 백천범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녀는 묵용감을 떠올리고 있었다.
감정 기복이 심했을 땐 그녀가 묵용감을 성가시게 했지만, 지금은 반대였다. 묵용감은 공무를 보다가도 몇 번씩이나 안채로 돌아왔고, 그녀가 보이지 않으면 사방을 이 잡듯 뒤져 그녀를 찾아냈다.
정말 성가신 일이었다. 그러나 막상 종일 떨어져 있으니 그가 몹시도 보고 싶었다. 밥도 잘 먹고, 즐겁게 수다도 떨고, 다른 일도 잘했지만 온종일 그가 그리웠다.
그도 분명 그녀를 그리워하리라. 그녀를 안고 있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늘 밤 그는 긴긴 시간을 뒤척일 터였다.
볼일을 마친 그녀가 등불을 들고 방으로 돌아갔다. 다시 침소에 들려고 하는데 희미하게나마 기이한 소리가 들렸다. 작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마치 누군가 코를 고는 듯했다.
자세히 들어 보니 소리는 병풍 뒤쪽에서 흘러나왔다. 그녀는 반색하며 소리없이 웃었다. 설마 자리를 비운 사이에 돌아와 그녀를 놀라게 하려고 병풍 뒤에 숨어 있는 걸까?
그녀는 등불을 탁자에 내려놓고 천천히 병풍으로 다가갔다. 역시나 누군가 병풍 뒤에 누워 있었다. 고개를 바닥에 파묻고 웅크린 이는 잠이 든 모양이었다.
짧은 사이에 잠이 들다니, 그렇게나 피곤했단 말인가. 그토록 지친 와중에 돌아왔다니, 놀라고도 가여운 마음에 그녀가 서둘러 몸을 숙였다.
“왕야, 어서 일어나세요. 침대에 가서 주무시어요.”
술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녀가 대번에 미간을 찌푸렸다. 또 술에 취해서 오다니…….
그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했다. 가까스로 병풍 뒤에서 빠져나온 그가 뭉개진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천범, 와주셨군요…….”
이 목소리는……! 백천범은 부축하던 손을 그만 놓아 버렸다. 어깨에 기대고 있던 사람이 쿵 소리를 내며 미끄러졌다. 황급히 등불을 들어 비춰 본 그녀는 깜짝 놀라 물러났다.
“당신이 어떻게 여길?!”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찬바람이 훅 끼쳐왔다. 비바람을 헤치고 돌아온 묵용감이 활짝 웃으며 그녀를 불렀다.
“부인, 나 왔…….”
묵용감은 마지막 한 글자를 내뱉지 못했다. 그는 바닥에 쓰러진 사장풍을 알아보고 금방이라도 죽일 듯 노려보았다. 백천범은 너무 놀라 얼이 빠진 듯 우두커니 서 있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고요함만이 감돌았다. 공기가 어찌나 무겁던지, 숨을 쉬기도 버거웠다. 그러나 사장풍의 웃음소리가 터져나오는 순간, 적막은 날카로운 조각이 되어 모두를 찔러 댔다. 사장풍은 묵용감의 심기를 자극하려는 것처럼 환한 미소마저 머금었다.
오랜 시간 묵용감에게 억눌리기만 했다. 이제야 모든 원한을 갚은 듯했다. 초왕이 아무리 백천범을 가졌다 한들, 그녀는 완전히 그의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처럼 그가 자리를 비우면, 이 몸은 그녀와 만날 수 있었다! 혼미한 와중에도 점차 또렷해지는 생각이 사장풍의 위세를 강하게 만들었다.
묵용감에게 들킨 건 두렵지 않았다. 그저 백천범이 자신의 진심을 알아 주면 그만이다. 그녀를 위해서라면 그는 언제든, 어디서든 목숨도 버릴 수 있었다.
정신을 차린 백천범이 가까스로 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어찌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그녀가 서둘러 묵용감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왕야. 저도 모르는 일이에요. 저, 저자가 어찌…….”
그녀는 말을 이을 수 없었다. 온기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그에게서, 섬뜩한 살기가 줄줄 흘러나왔다. ‘군신’이라는 칭호가 어찌하여 생겼는지, 그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에게 이렇게 두려운 모습이 있었다니…….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탓에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장풍은 여전히 바닥에 앉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죽임을 당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죽으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테니.
묵용감이 천천히 칼집으로 손을 가져갔다. 서늘한 소리와 함께 예리한 검신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한 줄기 창백한 빛이 방 안을 스쳤다.
백천범이 황급히 묵용감의 앞을 막아섰다.
“왕야, 제발, 죽이지 마세요.”
묵용감의 눈빛에 슬픔이 스며들었다. 늦은 밤까지 비를 맞으며 고생했지만, 태자의 제안도 거절하고 서둘러 돌아왔다. 그녀가 보고 싶으니까, 그녀가 그를 보고 싶어 할까 봐…….
오직 그 생각만으로 달려왔건만, 그는 무엇을 보았는가? 그녀는 정인과 밀회 중이었다! 그의 아이를 가지고도 사장풍과 만나지 않았는가. 그것도 깊은 밤, 두 사람의 침소에서.
그녀는 여전히 사장풍을 지키려 했다. 그의 앞을 막고 제발 죽이지 말라며 간청하고 있었다. 대체 누구의 부인이란 말인가, 이 여인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