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8화
술로 슬픔을 달래면 더 깊은 슬픔의 늪에 빠지는 법이었다. 완전히 취한 사장풍은 탁자에 엎드려 뭔가를 웅얼거렸다. 그녀도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정신은 어느 때보다 또렷했다.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생각이 자꾸만 그녀의 머릿속을 떠 다녔다. 지금 그녀는 사장풍을 좋아하고 있었다. 아니,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분풀이로 시작한 일이었다. 거만하고 냉담한 콧대를 꺾고 그가 그녀를 마음에 품길 바랐다. 그 순간이 왔을 때, 그를 매정하게 차 버리겠다고 몇 번을 다짐했던가.
그 순간만을 위해 죽기 살기로 매달린 탓일까? 어느새 사장풍을 향한 감정이 움트기 시작하더니, 사앵앵도 모르는 틈에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났다.
사장풍은 줄곧 냉담한 표정과 성가시다는 태도를 보였지만, 적어도 전범처럼 그녀를 피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차가운 표정이, 듬직하고도 매정한 뒷모습이, 무심한 태도가 자꾸만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녀는 전범처럼 예쁘장한 사내가 취향이라고 믿었었다. 그러나 사장풍을 만나며 그녀의 취향도 바뀐 모양이었다. 그녀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땀을 쏟는 그의 모습이 좋았다. 구령을 외치는 거친 목소리도 좋았다. 그녀에게 꽂히는 차갑고 담담한 시선마저 그녀의 세계를 밝히는 빛이었다.
한 가지 사실이 그 모든 감정을 부질없게 만들었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은 백천범이지 않은가…….
* * *
비바람이 한번 몰아친 후로, 하늘에 난 구멍은 닫힐 줄 몰랐다. 끊임없이 빗방울을 흩뿌리니 수성은 줄곧 짙은 연무에 휩싸이곤 했다. 강과 개울이 불어나고, 난강의 수위도 높아졌다. 사람들의 걱정은 가뭄에서 수해로 바뀌어 갔다.
처마에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굵은 물줄기가 떨어졌다. 도랑을 따라 물이 콸콸 흘러가는 소리는 거세게 쏟아지는 폭포수를 연상케 했다. 바깥의 소음만이 가득한 방 안에서, 묵용감은 조심스레 백천범을 옆으로 돌려 눕혔다. 천천히 그녀의 품을 비집고 들어가 입술을 살짝 깨물려던 그는 미간을 구기고 말았다.
“집중 좀 하시오.”
백천범이 창밖을 보던 시선을 겨우 그에게 돌렸다.
“왕야, 빗소리가 너무 커요.”
“어찌 비에 신경을 쓴단 말이오? 나한테 집중하시오.”
그녀가 어처구니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왕야는 스스로 즐거움을 찾으시는 줄 알았는데요.”
어느새 그의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다. 묵용감이 옅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대가 느끼는 감정이 더 중요하오. 그대가 즐거우면 나도 기쁘오.”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더니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살살 하세요. 조심해야 한다고요.”
“걱정하지 마시오.”
그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서책에 나와 있는 대로 할 테니, 문제없소.”
* * *
며칠간 이어진 비는 결국 문제가 되었다. 겨우 빗줄기가 멈추긴 했어도, 하천의 수위가 높아진 탓에 제방이 위험하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치수를 담당하는 초왕은 곧장 부하들을 데리고 제방으로 향했다.
마침 술 약속이 있어 관저를 찾아온 사장풍은 가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가동은 초왕을 따라 관저를 떠난 뒤였다.
사장풍은 안개처럼 어른거리는 후원을 바라보다 희미한 탄식을 내뱉었다. 발걸음을 돌리려는데 어느새 이소로가 나타나 그를 붙잡았다.
“어렵게 오셨으니 함께 한잔하시지요.”
사장풍의 얼굴엔 수염이 덥수룩했다. 그가 먼발치를 바라보며 담담히 말했다.
“되었네. 가동이 한가한 날로 다시 약속을 잡지.”
“에이, 그러지 마시고요. 태자 전하와 초왕야 두 분 다 관저를 비우셔서 모처럼 여유로운 날입니다. 이런 날에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셔야지요.”
이소로는 사장풍의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어찌나 적극적으로 권하는지, 더는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사장풍은 어쩔 수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술을 구했습니다. 제갈 선생께서 직접 빚은 술이지요. 가동 형님도 쓰러지실 때까지 드셨다니까요.”
이소로가 살갑게 말하며 술 한 잔을 따라 주었다.
“한번 드셔 보십시오.”
사장풍이 한 입 들이켜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가동이 언제 취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이소로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습니다. 사실 주량은 초왕야께서 굉장하시지요. 하지만 왕야께서도 이 술을 드시고 취하셨습니다.”
사장풍은 술을 한 모금 더 들이켜더니 직접 술잔에 술을 채웠다.
평소와 다른 모습에 이소로가 넌지시 말려왔다.
“천천히 드십시오. 정말 취하십니다.”
사장풍이 담담하고도 맥없는 웃음을 흘렸다.
“난 가동이 아니라네.”
이소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그건 그렇지요. 형님의 주량이 가동 형님보다 훨씬 세니까요. 잠시 드시고 계십시오. 안주를 가져오겠습니다.”
사장풍은 짤막하게 대꾸하고는 술잔을 살짝 흔들었다. 저절로 코웃음이 나왔다. 초왕의 주량이 아무리 세다고 해도, 자신만 할까?
초왕을 떠올리면 늘 경쟁심이 이는 사장풍이기에, 다시 잔을 채웠다. 마치 이 술을 마시고 멀쩡한 쪽이 승자라고 여기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소로가 통닭구이를 들고 나타났다.
“오늘 운이 정말 좋군요. 왕비 마마의 통닭구이를 얻어 왔습니다. 기홍 아가씨가 만들었다는데 한번 드셔 보십시오.”
왕비가 언급되자마자 사장풍은 자신도 모르게 아득한 그리움에 휩싸였다.
“…왕비께서는 어떠하신가?”
이소로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매우 잘 지내십니다.”
“회임 후 무척 힘들어하신다고 들었네. 좀 나아지셨는가?”
이소로는 아는 일들을 죄다 털어놓았다.
“소문에는 드시는 것마다 전부 게워 내셨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기홍 아가씨께서 맛있는 음식을 잔뜩 해 드리는데도 도통 드시질 못하고요. 그러니 왕비 마마께서 물리시는 음식이 매번 앞뜰로 오곤 하지요.”
그 말처럼 통닭구이는 젓가락을 댄 흔적조차 없었다. 그가 통닭구이를 내려다보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왕비 마마를 뵈었는가?”
“아뇨. 후원에 쉽게 갈 수는 없습니다. 가동 형님한테서 들은 것뿐입니다.”
이소로가 짧게 혀를 찼다.
“기운이 통 없으신 듯합니다. 많이 수척해지셨어요. 성질도 자주 부리시니 왕야께서 앞뜰도 잘 오지 않으십니다. 오늘은 제방에 틈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가실 수 있었지요. 왕야께서 북쪽의 치수를 담당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마침 태자 전하께서도 함께 가셨습니다.”
사장풍은 그와 잔을 가볍게 부딪치곤 한입에 술잔을 비워 버렸다.
이소로가 손을 내저었다.
“장풍 형님, 천천히 드시지요. 그러다 금세 취하십니다.”
사장풍이 코웃음을 쳤다.
“코가 삐뚤어질 때까지 마시자고 하지 않았나? 당직을 서지도 않는데 겁날 게 뭐가 있을까.”
이소로가 문득 창밖을 내다보았다.
“날이 저물어 가는데 태자 전하께서 오지 않으시는군요. 아무래도 오늘은 돌아오지 않으실 듯합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병사가 급히 들어와 이소로에게 고했다.
“이 나리, 태자 전하께서 오늘 돌아오지 않으실 거라고 하셨습니다. 제갈 선생께 바둑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전해 달라고 하십니다.”
이소로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가 사장풍에게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슬그머니 일어섰다.
“전해 드리지 않으면 걱정하실 테니 잠시 다녀와야 할 듯합니다.”
“알겠네. 마시고 있을 테니 다녀오게.”
어느새 취기가 올랐는지, 사장풍은 눈까지 빨갛게 충혈되었다. 그가 그는 이마를 쓸어내리더니 다시 술병을 집었다.
이소로는 미묘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 곧 발걸음을 돌렸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이소로는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새 술병도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사장풍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소로를 찾아 술을 한 병 더 내오라고 할 생각이었다. 문 앞까지 도달하자 그의 입가에 기세등등한 미소가 떠올랐다.
독하긴 개뿔, 한 병을 혼자 마시고도 이렇게 멀쩡한데……. 역시 초왕보다 자신이 술에 강한 게 확실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복도는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장풍은 연신 벽에 몸을 부딪히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옷자락이 이리저리 휘날렸다.
어느 순간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그는 기둥을 붙잡고 천천히 미끄러지다가 복도 난간에 주저앉았다.
이소로를 찾아가고 있었건만, 사방에 안개가 낀 듯 눈앞이 흐릿했다. 마치 꿈속에 들어와 있는 듯했다. 어디선가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어떡한담, 왕비 마마께서 또 구토를 하시다니! 드신 것도 없어서 담즙까지 다 게워 내셨어.”
“왕야께서도 안 계시는데 울며불며 성까지 부리시니… 누가 말릴 수 있겠어.”
“정말 가여워서 못 봐주겠네. 멀쩡하던 분이 저렇게 고통을 겪으시다니.”
“누가 아니래. 어휴, 가여운 왕비 마마…….”
사장풍은 있는 힘껏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시야에 두 사람의 뒷모습이 비쳤다. 시녀들인 모양이었다. 역시 이건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그는 난간에 기댄 채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젖은 면사를 덮은 듯 차가운 기운이 얼굴에 닿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그는 내리는 비를 알아차렸다. 부슬부슬 내리는 가는 빗줄기가 밤하늘에 흩날리고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내렸다. 정신이 조금 맑아진 듯했다. 기둥을 붙잡고 다시 일어난 그가 방향을 확인하더니 어딘가로 향했다.
한 번 가 본 적이 있는 길이라 발이 자연스레 움직였다. 가는 내내 마주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둠 속에 모습을 숨긴 채, 그는 잽싸게 반월문을 들어섰다. 올려다보니 등불이 켜진 안채가 보였다.
저곳에 그녀가 있다.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으리라. 지난번 그녀가 오수진을 찾아왔을 때, 초왕의 부름이 없어 그는 나설 수 없었다. 먼발치에서나마 그녀를 볼까 고민했지만, 그때는 마음을 접었다. 그녀만 괜찮다면, 만나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안 그래도 야윈 그녀가 더 수척해졌다니……. 피골이 상접한 수준이 된 게 아닌가?
찾아가선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알고 있음에도 그녀가 걱정되어 마음이 술렁였다. 그저 한 번만, 얼굴 한 번만 보면 굶주림과 같은 이 그리움이 메워질 듯했다. 그는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녀의 모습만 몰래 확인하고, 곧바로 돌아가자. 절대 그녀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