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7화
“…부족한 게 없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 부족한 의원을 수행 의관으로 두고 싶어 하시는 거야?”
영구는 입 아프게 설명하고 싶지도 않아 화제를 돌렸다.
“왕야의 일을 물을 시간이 있으면 맡은 일이나 잘하십시오. 이소로와 어울리는 일은 어찌 되어 갑니까?”
가동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였다.
“걱정하지 마. 나한테 수작을 부린다 해도 내 적수가 안 돼. 며칠 뒤에 사장풍이랑 술 마시기로 했는데, 너도 올래?”
“또 취하면 정말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아휴, 그럴 일 없어.”
가동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그땐 어쩔 수 없었어. 술이 독해도 너무 독했거든. 왕야도 취하셨을 정도였잖아.”
영구가 그를 흘겨보았다.
“주인께서 술을 드실 땐 마땅히 옆을 지키십시오. 어찌 본인도 진탕 취한단 말입니까? 제가 그날 밤에 있었다면, 형님을 빗속에 내던졌을 겁니다.”
* * *
“무슨 일인가. 앉아서 말해 보게나.”
묵용감이 손짓으로 권하며 위중청을 훑어보았다.
위중청은 품위를 유지하며 입술을 떼었다.
“소인, 의술을 배운 자는 마땅히 부모의 마음으로 환자를 돌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병세를 알고도 알리지 않는다면 의원으로서 부끄러운 행위이지요. 요즘 왕비 마마께서는 매우 건강하십니다. 초기 증세도 다 나으신 듯합니다. 하오나 왕야께서…….”
묵용감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을 잘랐다.
“본왕에게 문제라도 있단 말인가?”
위중청은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예. 왕야의 충혈된 두 눈과 솟아오른 양혈로 내재한 화가 왕성함을 알 수 있사옵니다. 화를 제대로 다스리지 않으면 간과 폐에 손상이 올 수도 있습니다. 소위 음과 양의 조화는 천지의 조화처럼 다스려야 화합을 유지하는 법입니다.
천지는 교접지도交接之道를 얻어 그 끝이 없고, 인간은 교접지도를 잃어 해를 입는 기간이 생겨났지요…….”
묵용감이 장황한 말을 듣기 싫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본왕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위중청이 입꼬리를 올렸다. 순간 기품 있는 모습이 자취를 감췄다.
“하하, 소인도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은애하시는 마음이 아주 특별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왕비 마마께서 회임하신 뒤로 마음을 억누르시느라 힘이 들지 않으셨습니까?”
“허튼소리!”
묵용감이 정색하며 언성을 높였다.
“어찌 감히……!”
“왕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소인은 의원이니 한눈에 알아볼 수 있습니다. 왕비 마마께서 회임하신 지도 만 석 달이 되었으니 태아도 안정을 찾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조심만 하신다면 적당한 범위 내에서는 가능합니다.”
순간 부끄러워졌지만, 묵용감은 위중청 앞에서 위엄을 잃고 싶지 않았다. 그가 애써 평온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니까 위 의원의 말은…….”
“소인에게 화첩이 있습니다. 임신 중인 부부를 위해 만들어진 화첩이지요. 여기에 나와 있는 대로 하신다면 아기씨에게 해를 가하지 않을뿐더러 두 분의 애정에도 도움이 될 겁니다.”
그가 품에서 책자를 꺼내 묵용감에게 건넸다.
묵용감은 환호성을 지르고 싶은 마음을 겨우 억누르고 담담한 태도로 책자를 건네받았다. 그가 책자를 대충 넘겨 보다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부모의 마음으로 살핀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로군. 직분과 직책을 다하는 모습은 마땅히 칭찬받을 일이네.”
위중청이 허리를 숙이고 공손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저 소인의 본분을 다할 뿐입니다. 마땅히 그리해야지요. 그럼 더는 방해하지 않고 물러가 보겠습니다.”
묵용감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정중히 배웅했다.
“조심히 가게, 위 의원.”
그는 멀어지는 위중청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곧장 가동을 불렀다.
“위 의원의 사령장에 인장을 받아오너라. 곳간에서 공복도 챙겨 가져다주고.”
“…왕야, 위 의원을 내보내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묵용감은 책상에 있던 책자를 품에 넣으며 태연히 답했다.
“위 의원은 의술도 뛰어나고 인품도 훌륭한 사람이다. 본왕이 지금껏 오해했으니 더는 묻지 말고 서둘러 처리하거라.”
* * *
최근 사성성은 사앵앵의 변화를 기이하게 여겼다. 자신의 딸은 워낙 집념이 강해서 원하는 바를 이룰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그간 전범을 쫓아다니던 힘을 끌어모아 사장풍을 쫓아다니는 데 쓰더니, 어느 날부터 집에 틀어박혀 거울만 바라보는 시간이 늘었다.
“앵앵아.”
그가 화장대 옆에 앉아 있는 그녀를 조심히 불렀다.
“무슨 일이 있거든 이 아비에게 말해 보거라. 혹 사 장군이…….”
“아버지, 만약 저랑 사 장군이 똑같은 사람을 좋아했다면… 우린 어떤 관계인 거예요?”
사성성은 그녀의 질문을 듣고 한참을 웃었다.
“물론 연적 관계지… 하지만 너와 사 장군이 어찌 그런…….”
사앵앵이 씁쓸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 말씀대로예요. 저희는 연적 관계네요.”
사성성은 영문을 모르고 어리둥절했다.
“너와 사 장군이 어찌 연적 사이가 되겠느냐?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
사앵앵은 긴 한숨을 내쉬며 화장대 위에 엎드렸다. 그래, 일반적으로는 사성성의 말이 맞다. 사앵앵과 사장풍은 연적 관계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사이에 백천범이 끼어 버리자 말도 안 되는 관계가 가능해지고 말았다.
백천범이 여인이라는 걸 안 뒤, 그녀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그녀는 장사꾼으로 자라나며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 보았다. 온갖 지역의 행상들이 그녀의 주루에서 요기를 하지 않는가. 그만큼 사람을 보는 눈이 있다고 자부했는데…….
여인에게는 전혀 관심 없는 그녀였지만, 여인을 좋아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백천범에 대한 감정은 다른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과 결이 달랐다.
사장풍이 마음에 품은 여인이 있다는 사실을 안 뒤로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었다. 언뜻 내비치는 그의 고통이 혹독한 시련을 거쳤음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마음을 품은 상대가 전범임을 알게 되며, 사앵앵의 하루는 매일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하필 사장풍과 똑같은 사람을 좋아했단 말인가. 그녀는 설명할 수 없는 답답함에 한숨만 내쉬었다.
며칠 전, 그녀는 술과 음식을 들고 사장풍의 거처를 찾았다. 그 역시 거절하지 않고 상을 차려 함께 술을 마셨다. 그녀가 가져간 술은 주루에서도 극상품이었다. 그윽한 향을 머금은 술은 시원하면서도 깔끔한 맛이 일품이었다.
그러나 사장풍은 맛을 즐기기는커녕 근심 가득한 얼굴로 술을 들이켤 뿐이었다. 그녀가 말을 걸어도 대꾸하지 않았다.
그녀가 참다못해 혼잣말을 내뱉었다.
“…장군님이 이토록 정이 깊은 분인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다른 사람을 마음에 품었으니 어떤 기분인지 알지요. 그러나 닿지 못할 사람에게 어찌 시간을 낭비한단 말입니까. 영원히 사 장군님의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절 보고 배우시지요. 가능성이 없다는 걸 알고 바로 포기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찾으면 그만인걸요. 이 넓은 천하에 제 짝 하나 없겠습니까? 무엇 하러 그리 죽기 살기로…….”
묵묵히 술을 들이켜던 사장풍이 대뜸 입을 열었다.
“남장을 한 초왕비를 좋아했다던데, 맞습니까?”
그녀는 이 이야기가 끔찍이도 싫었다. 생각만 하면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벌컥 성을 냈다.
“그게 사 장군님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지금은 왜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퍼부었다.
“초왕비가 뭔가 잘못이라도 저질렀습니까? 왜 지금은 좋아하지 않습니까?”
그녀도 술을 제법 마신 탓에 울컥 성이 났다. 사앵앵이 날카롭게 맞섰다.
“여인이니까요. 제가 어찌 여인을 좋아합니까?”
“저는 아가씨와 다릅니다. 그분이 어떤 모습이든 좋습니다. 너무 좋습니다. 평생을 좋아할 겁니다.”
그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의 성질을 건드리고 있었다.
“그 여인이 남자로 변해도 좋아할 겁니까?”
“예. 그분이라면 좋습니다.”
“고양이로 변해도요? 강아지로 변해도 좋아할 수 있단 말입니까?”
“좋아할 겁니다.”
그가 턱을 괴더니 드물게 눈을 반짝였다.
“그리도 좋은데 제가 어찌 싫어하겠습니까?”
“이런 머저리!”
그녀는 분을 터트리며 술을 들이켰다.
“그분이라는 사람이 대체 누군데요? 들어나 봅시다.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한번 봐야겠습니다.”
사장풍은 피식 웃으며 말을 돌렸다.
“아가씨야말로 전범으로 분장한 초왕비를 왜 좋아하게 되었습니까?”
“잘생겼으니까요.”
“그렇죠. 볼수록 예뻐지십니다. 여인은 크면서 열댓 번도 더 바뀐다더니, 점점 예뻐지십니다.”
그가 바보같은 웃음을 흘리다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외모 때문에 그분을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무엇 때문인데요?”
“잘 웃으니까요. 절 향해 웃어 주시니까요.”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추억을 곱씹었다.
“착하고, 강인하고, 말도 재미있게 하고, 솔직하고…….”
말을 늘어놓던 그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취기가 오른 그녀도 그의 말에 조금씩 빠져들며, 천천히 속내를 털어놓았다.
“저도 범이를 정말 좋아했어요. 착하고, 강하고, 늘 웃는 얼굴에 말도 재미있게 하고. 진짜 사내였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 장군님보다는 범이가 훨씬 낫거든요.”
그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보다 훨씬 낫지요. 저도 그래서 좋아했으니까요.”
“전범을 좋아했다고요?”
그녀는 취한 탓에 상황이 잘 이해되지 않는 듯했다.
“범이는 제 거예요.”
“이젠 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전 아직 좋아합니다.”
“좋아해도 소용없어요. 범이는 초왕비잖아요.”
그녀가 허탈한 탄식을 내뱉었다.
“동병상련이네요. 둘 다 가질 수 없는 사람을 좋아하다니.”
“초왕비면 어떻습니까? 칭호일 뿐입니다.”
그가 고집스레 말을 이었다.
“전 계속 좋아할 겁니다. 몰래 좋아하는데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초왕야가 뭐라 하시겠지요. 목숨처럼 아끼는 부인인데, 가만 계시지 않을 겁니다.”
사장풍이 코웃음을 치며 또다시 술을 들이켰다.
“초왕야, 이 뻔뻔한 놈!”
그녀는 별안간 취기가 확 가셨다. 사장풍이 초왕을 욕해서가 아니라 그에게 서린 포악한 기운 때문이었다. 짙은 눈썹과 부리부리한 눈매, 위엄 있는 기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기운이었다.
필시 뼛속 깊이 서린 분노와 증오심이 뒤엉켜 저런 기운을 만들어냈으리라. 술이 잠시 깬 그녀는 진실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내내 같은 사람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전범을, 사장풍은 백천범을 좋아한다!
어쩐지 초왕비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에 혼이 나가더라니. 그러니 가슴에 한이 맺혀 더위까지 먹고 그녀에게 이상한 말들을 늘어놓은 것이었다.
그야말로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그것도 연이어 내리치는 날벼락이었다. 충격이 컸던 그녀는 차라리 까무러치고 싶었다. 이만큼 우스운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을까. 그녀와 사장풍은 졸지에 연적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고 마냥 원망할 수도 없었다. 백천범이 어떤 사람인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존재였고, 사앵앵도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