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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76)화 (375/1,192)

제376화

묵용감만을 의지했던 모습은 완벽히 자취를 감추었고, 백천범에게서는 예전처럼 활기가 넘쳤다. 걸을 때도 자꾸만 속도를 높이는 탓에 월규가 몇 번이나 그녀를 불러 세워야 했다.

“왕비 마마, 천천히 가십시오. 홑몸이 아니십니다.”

백천범은 씩씩하게 배를 토닥거렸다.

“괜찮아. 위 의원이 건강하게 잘 있다고 했어.”

그녀는 황보주아의 누각을 다시 찾았다. 진지하게 사과를 할 생각이었다. 백천범은 황보주아를 보자마자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며 진심으로 사과했다. 황보주아도 선선히 사과를 받아 주었다. 회임 중에는 감정 기복이 심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이해할 수 있다는 회답이 돌아왔다.

이야기를 주고받던 두 여인은 서로에게 미소를 지었고, 이 일은 그렇게 일단락되었다.

다만 묵용감은 그녀가 누각을 다시 찾아갔다는 사실에 의아함을 느꼈다.

“지난 일이거늘, 굳이 찾아갈 이유가 있소?”

백천범이 그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사과는 언제 하더라도 늦지 않아요. 제가 가지 않았다면 주아 언니는 계속 마음에 가시가 박혀 있었겠죠. 그 가시를 빼려면 제가 가야 했어요.”

다른 이의 마음을 완벽히 움직일 순 없지만, 그녀는 적어도 진심을 전했다. 이걸로 황보주아의 원망이 풀리고, 두 번 다시 그녀와 마찰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묵용감은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누각까지 오를 수 있다면 큰 문제는 없는 듯하구려. 석 달도 거의 된 듯하니 오늘 밤부터 그대와 함께 자겠소.”

어느새 백천범이 한 발짝 물러서며 그를 흘겨보았다.

“그건 다른 문제죠. 석 달이 되려면 며칠 남았을 거예요. 언제 아이가 들어섰는지도 확실히 모르잖아요. 제가 볼 땐 한 달은 더 두고 봐야 안전해요.”

묵용감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손가락을 흔들었다.

“좋소. 똑똑히 기억하시오.”

그는 성을 내며 휙 나가 버렸다. 꼭 사탕을 주지 않는다며 화를 내는 어린아이처럼 굴고 있었다.

백천범은 꺄르르 웃으며 그의 등 뒤에서 소리쳤다.

“초왕야, 가지 마시어요. 저랑 좀 더 얘기를 나누어요.”

그녀가 심술을 부리긴 했지만, 어찌 아이처럼 토라질 수 있을까? 정작 식사 시간이 되자 초왕은 화가 풀린 듯 그녀에게 음식을 덜어 주기 바빴다.

“왕비가 좋아하는 반찬이지 않소? 많이 드시오.”

백천범의 접시에는 음식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그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그녀를 잔뜩 먹여야 성이 풀릴 듯했다. 마침 위중청이 한 손에 주머니를 들고 들어왔다. 신분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던 백천범이 웃으며 손짓했다.

“위 의원, 아직 식사 전이면 같이 들어요.”

수행 의관이 감히 초왕과 겸상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가 서둘러 예를 갖추며 인사를 올렸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왕비 마마. 소인은 이미 식사를 마쳤습니다.”

위중청은 얼른 손에 들고 있던 주머니를 보여 주었다.

“왕비 마마께서 몸이 간지럽다고 하셔서 약초를 배합해 보았습니다. 땀띠를 완화해 주는 약초니, 씻으실 때 사용하시면 며칠 안에 좋아지실 겁니다.”

“위 의원이 고생 많아요.”

백천범이 활짝 웃어 보였다.

“지나가는 말이었는데 마음을 써 주다니요.”

“왕비 마마의 건강을 지키는 일이 소인의 직분이니 마땅히 그리해야지요.”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위 의원은 왕야의 수행 의관이잖아요. 소관이라고 칭해야지요.”

위중청은 묵묵히 초왕만 바라보았다.

“엥?”

백천범은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채고 말을 이었다.

“위 의원이 관저에 온 지도 제법 지났는데 어째서 공복을 입지 않나요? 태자 전하의 의관은 늘 청색 공복에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다니잖아요. 얼마나 위풍당당해 보였는데요.”

위중청은 묵묵히 초왕을 바라보았다.

묵용감은 일부러 놀라는 척하며 답했다.

“맞소. 위 의원이 공복을 입은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구려. 아무래도 불편하겠지. 상관없소. 본왕이 사소한 일에 신경 쓰는 사람도 아니고. 위 의원, 이곳을 집이라 여기고 편한 대로 하게나.”

위중청이 눈을 내리깔고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왕야께 아뢰옵니다. 소인은 사령장도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래?”

묵용감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대체 일 처리를 어찌 한단 말인가? 본왕이 분명 명을 내렸거늘.”

그가 위로하듯이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말게. 부하가 일을 소홀히 처리한 모양일세. 녹봉은 한 푼도 빠짐없이 챙겨주겠네.”

위중청이 고개를 조아리며 공손히 답했다.

“대수롭지 않은 일에 마음 쓰지 마십시오, 왕야. 사령장이 없어도 소인은 마음을 다해 왕비 마마와 아기씨를 돌보겠습니다.”

그때 백천범이 끼어들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그건 아니죠. 의관이라면 사령장과 공복, 녹봉까지 제대로 갖춰야 해요. 왕야, 누가 담당한 일이에요? 위 의원이 피해 보지 않게 말씀 좀 해 주세요.”

묵용감이 눈을 가늘게 뜨며 기억을 되짚었다.

“…가동에게 맡긴 듯하오.”

백천범은 곧장 이해하며 곧장 위중청에게 설명했다.

“가동 무사님이… 워낙 바빠서 잊으셨나 봐요. 제가 말씀드릴게요.”

“그대가 신경 쓸 것 없소. 내가 처리하겠소.”

묵용감이 생선 살을 발라 백천범의 입에 넣어 주었다.

“그대의 임무는 잘 먹고 살을 찌우는 일이오.”

위중청이 산더미처럼 쌓인 그녀의 접시를 힐끗 보았다.

“왕비 마마, 식욕이 정말 좋으십니다.”

“저택에서부터 이리 좋았다네. 아이가 생겼으니 2인분을 먹어야지.”

묵용감이 흐뭇하게 웃으며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은 밭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배추를 뿌듯하게 보는 농부 같았다.

위중청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겨우 참았다. 쓸데없는 일은 하지 않는 게 나은 법이었다. 초왕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를 관저에 머무르게 하면서 아직도 의관으로 임명하지 않다니, 무슨 까닭이란 말인가?

지금까지 사령장을 주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뛰어난 의술에 그보다 어린 나이, 준수한 외모까지 가졌으니 초왕이 위기감을 느꼈을 뿐이다.

그의 부인은 경국지색에 활발하고 귀여웠다. 성격도 어찌나 좋은지 모든 사람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가. 사장풍처럼 죽을 각오로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는 와중에 또 다른 사장풍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법은 없었다. 정말 그런 상황이 온다면 그는 어찌 살아야 한단 말인가.

사람을 부르긴 쉬워도 보내긴 어려운 법이다. 백천범은 요즘 위중청의 말이라면 뭐든 믿고 따랐다. 조금만 불편해도 곧장 그를 부를 정도였다. 그런 그를 내쫓자니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한참이나 고민해 보았지만 역시나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가동을 불러 괜히 혼쭐을 냈다.

“애당초 진중한 의원을 데려오라고 하지 않았느냐. 한데 스물이 갓 넘은, 얼굴에 솜털도 가시지 않은 자를 데려오다니. 일을 어찌 하는 것이냐. 본왕이 저자에게 왕비와 훗날 태어날 아이를 마음 놓고 맡길 수 있겠느냐?”

가동이 서둘러 해명했다.

“위 의원은 그리 어리지 않습니다. 이미 스물다섯이라 했습니다.”

초왕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훑었다.

“쉰둘을 찾진 못할망정.”

아무튼 자신보다 어리니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러니까 왕야 말씀은… 소인에게 좀 더 연배가 있는 의원을 다시 찾아오라는 뜻이지요? 그럼 위 의원은 어찌합니까? 왕비 마마께서 위 의원을 무척 믿으시는 것 같던데요.”

가동은 초왕의 성질을 건드리고 있었다.

애당초 백천범은 의원을 만나길 거부했다. 그 와중에 위중청이 사맥을 볼 줄 안다고 하여 데려갔을 뿐이었다. 사맥을 볼 줄 아는 의원의 수가 적고 위중청이 태맥胎脈(임신 때 나타나는 맥상)을 짚어 냈으니, 기쁨에 눈이 멀어 그를 관저에 남기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은 백천범의 상태도 좋아졌으니 더는 이 젊은 준걸을 곁에 두고 싶지 않았다.

“왕야께서는 위 의원의 어느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으십니까?”

가동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왕야, 소인에게만 말씀해 보십시오. 소인이 넌지시 귀띔해 보겠습니다.”

전부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젊고 단정한 외모, 훌륭한 의술, 고상한 말투까지. 생각할수록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자연스레 가동을 걷어차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

가동이 그의 안색을 살피더니 눈을 굴렸다.

“왕야, 정말 그자를 내쫓고 싶으시다면 간단한 일입니다.”

“그래? 한번 말해 보거라.”

“아주 간단하지요.”

가동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가까이 다가왔다.

“누명을 씌우면 됩니다.”

묵용감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그를 응시했다.

“무슨 누명?”

“적과 내통한 밀서를 작성해 그자의 방에 두면 됩니다. 나중에 방을 수색하여 밀서를 찾아내면 그만이지요. 적과의 내통은 변명할 수 없는 대역죄니, 그자를 내친다 한들 왕비 마마께서도 막지 못하실 겁니다.”

묵용감이 천천히 손짓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가동이 화들짝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왕야, 또 발로 걷어차시려고요?”

가동은 요즘 들어 눈치가 빨라졌다. 왕비가 돌아오면서 초왕의 포악함은 거의 사라졌다. 예전과는 달리 너그러워진 분위기에 가동도 담이 커진 듯했다. 주인과 장난을 치는 일은 호랑이 수염을 만지듯이 용기와 지혜가 필요한 법이다.

묵용감이 웃으며 답하려는데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곧장 웃음기를 거두고 호통을 쳤다.

“대체 일을 어찌하는 게냐? 위 의원에게 아직도 사령장을 주지 않다니!”

가동이 입을 뻐끔거렸지만, 묵용감이 힘껏 헛기침을 해 가로막았다.

“위 의원, 무슨 일로 본왕을 찾아왔는가?”

위중청이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리더니 가동에게도 짧게 인사를 건넸다.

“왕야, 부디 가 대인을 책망하지 말아 주십시오. 왕야께서 소인의 의술을 믿어 주시고 소인을 남기셨으니 이미 감읍할 따름입니다. 의관이 되든 되지 않든, 소인은 신경 쓰지 않사옵니다.”

묵용감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찾아왔는가?”

위중청이 가동을 바라보며 머뭇거리자 묵용감이 즉시 가동을 물렸다.

가동은 나가고 싶지 않았지만 초왕의 명을 거역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밖으로 나서자마자 문 근처에서 두 사람의 말을 엿들었다.

그때, 별안간 영구가 나타나 그의 귓불을 붙잡아 질질 끌고 갔다. 눈물이 찔끔 나올 지경이었지만 크게 소리를 지를 수도 없었기에 가동은 손을 싹싹 문지를 뿐이었다. 영구는 인적이 드문 곳에 이르러서야 그를 놓아주었다.

“요즘 들어 더욱 경거망동하십니다. 감히 왕야의 말을 엿들으려 하다니요. 곤장이 그리우십니까, 아니면 채찍이요?”

가동이 히죽거리며 귀를 문질렀다.

“너 마침 잘 왔다. 안 그래도 물어볼 게 있었거든. 위 의원이 대체 어디가 부족한 걸까? 왕야께서 왜 위 의원을 내보내려고 하시는 거지?”

영구가 그를 흘겨보며 말했다.

“부족한 게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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