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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75)화 (374/1,192)

제375화

황보주아의 안색이 단번에 창백해졌다.

“태자 오라버니, 저를 비웃으러 오셨습니까?”

“내가 어찌 그러겠느냐?”

태자가 도포를 젖히고 의자에 앉았다.

“난 영원히 네 곁에 있을 텐데.”

그가 그녀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며 물었다.

“몸은 좀 나아졌느냐?”

황보주아가 옅은 한숨을 내뱉으며 시선을 피했다.

“그저 죽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주아야, 네 투지는 어디로 갔느냐?”

태자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며 말을 이었다.

“기세등등하던 대학사의 적녀 황보주아는 어디로 갔단 말이냐? 피맺힌 원한도 갚지 못했다. 네 정혼자도 이제는 필요 없단 말이냐?”

황보주아가 처량한 웃음을 흘렸다.

“지금 제 처지가 어떤지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제가 무얼 내세워 원한을 갚을까요? 정혼자는 이제 전생의 일이나 다름없습니다. 셋째 오라버니에게 저는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그러니 더는 태자 오라버니께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라버니께서 군대를 이끌고 임안성을 함락하시어 황보 가문의 원한을 갚아 줄 날만 기원하겠습니다. 그리해 주신다면 저 또한 구천에서 편히 눈을 감겠지요.”

태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노기를 내비쳤다.

“멀쩡히 살아 있는데 구천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더냐? 허튼 생각을 하는 게냐? 초왕비의 증세가 전염되기라도 했느냐”

“그게 진짜인지 누가 알겠습니까. 증세를 핑계로 절 업신여겼을지도 모를 일이지요. 지금껏 이렇게 수치를 당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셋째 오라버니는 일언반구도 없으십니다. 실망스러울 뿐입니다.”

태자 역시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사내가 정을 끊기 시작하면 저리되는 모양이다.”

황보주아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태자 오라버니는요. 내년이면 천하를 통치하실 텐데, 제게 약속했던 일을 지킬 수 있으시겠습니까?”

태자가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 입술을 달싹였다.

“너도 알지 않느냐. 내가 원하는 건 남쪽뿐인 천하가 아니다. 지금 확언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구나.”

황보주아가 자조하며 고개를 돌렸다.

“셋째 오라버니는 제가 아니면 혼인하지 않겠다고 하시더니 금세 다른 여인을 은애하셨습니다. 태자 오라버니는 절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으로 만들어 주시겠다더니 끝을 모르는 기다림만 주시는군요.

오라버니, 이대로라면 제가 먼저 늙고 말겠습니다. 후궁에는 여인들이 넘쳐날 텐데, 오라버니께서 절 기억이나 해 주실까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태자가 자리를 옮겨 그녀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가 그녀의 손을 꼭 감싸 쥐며 올곧은 시선을 보냈다.

“주아야, 넌 내게 늘 변함없는 존재다. 네게 했던 약속은 반드시 지키마. 천하를 군림하는 그날, 네가 부귀한 삶을 평생 누리게 해 주겠다.”

비로소 황보주아의 눈이 반짝였다.

“오라버니께서 말씀하시는 천하는 동월국 전체입니까?”

“한 나라에 두명의 군주가 가당키나 하더냐. 초왕의 생각은 단순하기 짝이 없다.”

태자가 미간을 좁히며 나지막이 말했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그 애가 이천행의 군대를 서북 지역으로 옮겼다. 일부를 먼저 보내더니 최근에는 남은 무리도 이동시키더구나 만약 황제가 강을 넘어 쳐들어오기라도 한다면……. 하, 꼼짝없이 당하고 말겠지.”

황보주아가 흠칫 놀라며 물었다.

“대체 무엇 하러 군대를 서북 지역으로 옮긴단 말입니까?”

“그 애 말로는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업을 발전시키겠다는구나. 서북 땅을 풍요롭게 만들고 싶은 모양이다.”

태자가 드물게 코웃음을 쳤다.

“선황께서도 하지 못한 일에 저리 마음을 쓸 줄이야. 서북 지역은 나도 가 보았지만, 너무나도 척박해 농사를 지을 땅이 아니다. 게다가 기후도 열악하지. 늘 바람이 심하니 흙이 날려 죄다 쌓이더구나.

여건이 되는 자들은 이미 그곳을 벗어났고, 남은 자들은 산을 점령해 도적이 되었지. 그러니 서북 땅이 그리 산적이 들끓지 않느냐. 이제 초왕이 병력을 다 옮겼으니, 전쟁이 나면 손쓸 방법이 없구나.”

황보주아는 초조한 듯 손톱을 잘근거렸다.

“즉위식은 내년 가을로 예정되어 있지 않습니까? 다른 방도를 생각하지 않으시면 때를 놓칠지도 모릅니다.”

“그 애는 지금 부인 외에 다른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애당초 군대를 일으킨 이유도 황제가 왕비를 잡아갔다고 여겨서지. 그러니…….”

“초왕비를 건드리자는 말씀이시지요.”

황보주아가 답했다. 그녀의 눈에서 사그라들었던 투지가 다시 피어올랐다.

“태자 오라버니, 말씀해 보십시오. 제가 무얼 하면 되겠습니까?”

태자가 그녀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기다리거라.”

“언제까지 기다려야 한단 말입니까?”

태자가 처음 앉았던 자리로 돌아가며 차분하게 일렀다.

“주아야, 참을성이 있어야 하는 일이다. 큰일을 하려거든 조급함을 버려야 한다. 좀 더 기다리며 지켜보자꾸나.”

황보주아의 머릿속이 뒤엉키는 듯했다. 더 기다렸다간 초왕의 아이가 태어나고 만다. 그땐 정말로 희망이 없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그녀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 * *

태자와 황보주아가 상의를 하는 동안, 녹하는 기홍과 어젯밤 일을 되짚고 있었다.

“아무래도 수상해. 황보주아가 눈속임을 한 게 틀림없어.”

그녀가 잔뜩 열을 올렸다.

“보초병들이 왜 말도 제대로 못 했겠어? 게다가 은옥이랑 채봉이는 계속 뼈 있는 말을 했어. 너희가 오기 전엔 왕야가 안에 계신 것처럼 말했다니까? 왕야가 어디서 주무시든 왕야의 마음이라고 하질 않나.

왕야가 얼마나 고단한지 알고 있지 않냐고, 내일 아침이면 어련히 돌아가실 거라니……. 이게 다 무슨 뜻이겠어?”

기홍이 나물을 손질하다 말고 고개를 저었다.

“황보 아가씨도 마음이 편친 않을 거야. 입장이 애매하잖아. 누각에만 틀어박혀 있는데 병이 나도 왕야는 들여다보지도 않으시니……. 화가 나서 모호한 말로 왕비 마마의 화를 돋우려고 했겠지.

어쨌든 우리 왕비 마마는 빨리 잊으시는 성격이니, 너도 지난 일을 괜히 들추려 하지 마.”

“만약 음모를 꾸미는 거라면?”

녹하가 눈썹을 치켜세웠다.

“누각에 틀어박혀 있는 게 꼭 못된 마음을 먹은 것 같단 말야. 왕야와 왕비 마마를 이간질하려는 계략을 꾸미는지도 몰라.”

기홍이 가볍게 웃고 말았다.

“왕야께서는 목숨을 거실 만큼 마마를 아끼시는데, 누가 두 분을 갈라놓겠어? 다 쓸데없는 걱정이야.”

“우린 지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황보주아한테는 아닐 수도 있어. 자기 처소에서 소란을 겪었으니 왕비 마마가 자신을 업신여겼다고 고자질할 게 뻔해.”

마침 백천범이 발을 걷고 안으로 들어왔다.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는지 그녀는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젯밤에는 제가 충동적이었어요. 이불까지 젖히다니, 지나쳤네요.”

“안 되긴요.”

녹하가 발끈하며 거들었다.

“누가 그런 말을 하랍니까? ‘요즘 너무 고생해서 얼굴이 수척해졌네요. 가엽기도 하지. 아이참, 그렇게 움직이지 마세요. 간지럽습니다. 어서 눈 감고 쉬세요.’ 어떻게 들어도 왕비 마마께서 오해하라고 한 말이 아닙니까? 일부러가 아니라면 제 성을 갈겠습니다.”

백천범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녹하를 바라보았다.

“녹하 언니, 기억력이 정말 좋네요. 어떻게 한 글자도 안 틀리고 기억했어요?”

“…….”

대체 왕비는 어디에 신경을 쓰고 있단 말인가? 그녀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더욱더 황당한 소리를 해 댔다.

“성은 무엇으로 바꿀 건데요?”

녹하는 그녀의 태도가 영 불만스러웠다.

“왕비 마마, 정말 중요한 일입니다. 진지하게 받아들이십시오.”

“알겠어요.”

백천범이 기홍의 일거리를 도와주며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니, 배고파요.”

기홍이 서둘러 손을 탈탈 털었다.

“푹 곤 찜 요리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전 족발이 먹고 싶은걸요.”

“…아침부터 누가 그런 걸 먹습니까. 너무 기름지니 개구리찜을 내어 드리겠습니다.”

“닭 다리도 먹고 싶어요.”

기홍이 조곤조곤 타일렀다.

“찜부터 드시고, 더 드실 수 있으면 닭 다리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백천범이 눈을 반짝이며 웃었다.

“당연히 더 먹을 수 있어요.”

녹하가 한숨을 쉬며 자리에 앉았다.

“왕비 마마, 어찌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십니까. 황보주아가 왕야께 고자질을 할지도 모르는데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백천범이 태평하게 히죽거렸다.

“걱정되죠. 그래도 배를 채워야 혼날 힘이 생기잖아요.”

곱씹어 보면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의도가 분명한 일들도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깊게 따지고 싶지 않았다. 잘잘못을 가리기 시작하면 그녀의 잘못이 우선이었다. 묵용감은 누각에서 소란을 피운 일로 그녀를 혼내지 않았다. 그저 비바람이 부는 날씨에 밖을 돌아다닌 일만을 책망했다.

나중에 듣기로는 태자가 묵용감에게 위문 차 황보주아를 찾아가라고 제안했고 묵용감은 거절했다고 했다. 그녀가 오해를 할까 봐 가고 싶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역시 묵용감에겐 백천범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그가 내보이는 달콤한 감정은 남들에게 설명할 방법이 없을 만큼 짙고도 강렬했다. 그 때문에 백천범은 미묘한 죄책감도 느꼈다.

다른 이들에게 그는 부인을 무서워하는 사내가 되어 있었다.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그처럼 위엄 있는 사내가 어찌 그녀를 두려워하겠는가. 그저 그녀를 너무나도 아끼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성격으로 변했을 뿐이다.

지난 두 달간 그녀는 심한 감정 기복을 겪었다. 본인의 고통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 또한 고초를 함께했다. 그러나 이제는 힘든 시기의 끝이 다가오는 듯했다. 그녀는 평화를 되찾았고 입맛도 예전처럼 좋아졌다. 아니, 예전보다 더 좋아진 듯했다. 이제 그녀는 구토도 하지 않고 뭐든지 원하는 만큼 먹을 수 있었다.

위중청은 매일 그녀를 진맥했고 태아와 왕비 모두가 건강하다는 결과를 들려주었다.

묵용감도 무척 기뻐했다. 점점 좋아지고 있으니 굳이 매일 진맥을 받지 않아도 되리라. 위중청이 가느다란 두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목을 짚을 때마다 괜히 그의 기분이 미묘해지던 차였다.

아직 배는 부풀지 않았지만, 백천범의 얼굴에 살이 조금 붙었다. 뾰족했던 얼굴이 동글동글해지며 윤기가 흘렀다. 어찌나 보기 좋던지, 그는 틈만 나면 그녀의 볼을 가볍게 꼬집었다. 보드라운 살갗이 손가락에 닿으며 전해지는 탱글탱글한 촉감은 헤어 나올 수 없을 정도로 중독적이었다.

다만 예전의 모습을 찾은 그녀는 좀처럼 그에게 의지하려 들지 않았다. 그녀는 가급적 시녀들과 시간을 보냈다. 기홍과 음식을 만든다거나 녹하와 아기 옷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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