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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74)화 (373/1,192)

제374화

녹하는 가차없이 말하며 자리를 떴다.

멀어지는 그녀의 하늘거리는 옷을 바라보던 가동이 낮게 투덜거렸다.

“인색하긴, 두고 봐. 꼭 본때를 보여 줄 테니까!”

그때 가동의 뒤에서 불쑥 목소리가 들렸다.

“뭘 그리 혼자 중얼거리느냐?”

어느새 묵용감이 다가와 있었다.

“어젯밤 너도 과음을 했더냐?”

“예.”

가동이 곧장 허리를 숙이며 불안한 얼굴로 답했다.

“소인, 조금 뒤 곤장을 맞으러 가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본왕도 과음을 했으니.”

묵용감이 뒷짐을 진 채 천천히 거닐었다. 겨우 비가 멎은 터라 발이 닿는 곳마다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태자께서도 많이 취하셨다. 그 술이 독하긴 정말 독하더구나.”

“오는 길에 이소로에게 들었는데, 태자 전하께서 숙취 때문에 몸이 편치 않으시다고 합니다.”

“그래?”

묵용감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리하다니 응당 가 봐야지. 위 의원에게 태자 전하의 맥을 짚어 보라 이르거라.”

가동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왕야, 잊으셨습니까? 태자 전하께서는 이미 수행 의관이 있습니다. 벌써 의원이 전하의 상태를 확인했다고 합니다. 다행히 문제는 없고 그저 과음이 원인이라 하옵니다.”

묵용감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영구는 돌아왔느냐?”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비가 많이 왔으니 지체된 모양입니다. 성 밖 주둔지는 멀지 않으니 곧 돌아오겠지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왕야.”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앞뜰로 향했다. 누각을 지나치는 순간, 묵용감의 시선이 잠시 닿았다가 사라졌다. 안개가 서린 누각은 한층 더 처량하고 쓸쓸해 보였다. 어젯밤 백천범이 벌인 일을 떠올린 그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역시나 태자의 안색이 파리했다. 창 앞에 앉은 그는 흰 도포를 입고 머리만 청색 끈으로 대강 묶은 탓에 더 힘이 없어 보였다.

그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다른 손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묵용감이 들어오자 그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역시 우리 초왕은 대단하구나. 그리 많이 마시고도 아무렇지 않다니. 이 형은 아무래도 늙은 모양이다. 머리가 깨질 듯 아픈 걸 보니, 예전만 못하구나.”

“한창 혈기 왕성하실 때인데 늙었다니요.”

묵용감이 그의 안색을 유심히 살피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 술이 독해도 너무 독했습니다. 그리 독한 술은 저도 오랜만이었습니다. 어디서 나신 술입니까?”

“제갈 선생이 직접 빚었다. 본인도 그리 독할 줄은 몰랐는지 아침부터 찾아와 죄를 고하더구나.”

태자가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해서 무슨 잘못이 있냐고 했다. 술이 독하지 않으면 술이라 할 수 있겠느냐?”

묵용감이 자리에 앉으며 웃음을 흘렸다.

“정말 대단한 선생입니다. 직접 차도 만들고 술도 빚다니요. 제갈 선생이 하지 못하는 일은 손에 꼽겠습니다.”

태자는 가볍게 웃으며 추억에 잠겼다.

“원래는 유유자적하며 떠도는 자였지. 내가 억지로 곁에 두었다.”

태자는 하인들에게 다기를 가져오라고 분부한 뒤, 직접 차를 내려 주었다.

“내가 다도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다도를 보고 나니 얕은 지식에 불과하더구나.”

“이 아우는 형님께 좋은 스승이자 유익한 벗이 있다는 사실이 그저 부러울 따름입니다.”

태자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날 부러워하다니! 네겐 귀중한 처와 자식이 있지 않으냐. 내가 널 부러워해야 마땅하지. 그래, 어제 주아를 보러 간다더니, 가 보았느냐?”

묵용감이 흠칫 놀라며 되물었다.

“제가 그런 말을 했었습니까?”

“그래, 네 입으로 직접 꺼낸 말이다. 내 귀로 똑똑히 들었지.”

묵용감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껌뻑일 뿐이었다.

“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 취했으니, 기억이 나지 않을 수 있겠구나.”

“형님은 어찌 기억하십니까?”

“취하면 자신이 한 말은 잊어도 다른 사람이 한 말은 기억하는 법이지. 내가 어제 무슨 말을 했는지 떠올려 보면 되지 않겠느냐?”

묵용감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맞습니다. 어제 주아를 찾아가 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래, 이제야 기억이 나느냐? 내가 그리 말했다. 왕비가 있으니 모든 게 만족스럽다는 것 잘 안다. 그래도 주아와 너는 특별한 사이가 아니더냐. 다른 건 몰라도 그 애가 네 목숨을 구해 주었다. 몸이 편치 않다는데 들여다보지 않으면 우리 묵용씨가 몰인정하다는 소리를 들을 테지.”

묵용감이 자그마한 옥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답했다.

“왕비가 주아에게 위 의원을 보내 병세를 살피게 했습니다. 그저 풍한이 들었다고 하니, 문제 없을 겁니다.”

태자가 짧게 혀를 찼다.

“문제가 없다 해도 가 봐야지. 어쨌든 병이 나지 않았느냐.”

묵용감이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형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최근 왕비의 증세가 좋지 않습니다. 쉽게 동요하고 성급하게 판단하니 괜한 오해를 사고 싶지 않습니다. 시일이 좀 더 지난 뒤에 주아를 찾아가 보겠습니다.”

“이런, 이런.”

태자가 그를 손가락질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예전의 위엄 넘치던 모습은 다 어디로 갔느냐. 군신으로 명성이 자자한 초왕이 이리 공처가일 줄이야. 누가 믿기나 하겠느냐? 그래도 초왕비의 증세도 심각하다고 하니 어쩔 수 없지.

듣자니 어젯밤에도 초왕비가 주아의 처소를 찾아가 소란을 피웠다더구나. 침소까지 들어가 이불을 젖혔다던데, 그건…….”

그가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네가 그리 버릇을 들였겠지.”

묵용감이 부끄럽다는 듯 웃어넘겼다.

“어젯밤 일은 왕비가 심했습니다. 다만 홑몸이 아니니 지켜보고 있습니다. 저조차도 어찌하지 못하는데 누각에 올라가겠다는 왕비를 누가 말리겠습니까? 한데… 누각 밑에 보초병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형님께서 보내셨겠지요.”

“그래. 내가 보냈다.”

태자가 곧바로 긍정했다.

“왕비는 회임을 하였고 주아는 몸이 편치 않은데 넌 한 사람만 돌보지 않느냐. 해서 대신 신경을 썼을 뿐이다. 병이 났을 땐 안정을 취하는 게 우선이니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야지. 고민 끝에 보초병을 두었다. 그래야 마음이 놓이겠더구나.”

묵용감이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이곳에서 주아를 괴롭힐 사람이 있습니까? 분명 왕비를 막으려 하셨겠지요.”

태자도 부인하지 않으며 담담히 답했다.

“알고 있다면 되었다. 내가 안채를 자주 찾진 않아도 소식은 다 듣고 있다. 요즘 왕비가 심하게 굴어도 네가 잘 견디고 있다더구나.”

묵용감은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 부인인데 제가 견디지 못하면 어찌하겠습니까? 아이를 가졌으니 남들보다 힘든 게 당연합니다. 힘든 사람이 소란을 피우는 게 대수겠습니까.”

태자는 묵용감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네 고충은 나도 잘 안다. 내가 잠시 뒤에 한번 가 보겠다. 몸이 아플 땐 다른 이들의 관심이 절실한 법이지. 내가 가도 될 것 같구나.”

“주아에게 그리 관심을 가져 주시니, 제 마음이 놓입니다.”

“이런, 곡해하지 말거라. 그저 널 대신해서 갈 뿐이다. 잊지 말거라. 주아는 네 정혼자였다!”

묵용감은 어느새 웃음기를 거두며 건조하게 말했다.

“주아에게 분명히 말해 두었습니다.”

“그리하였더라도 그 애가 널 단번에 지울 수 있겠느냐?”

태자가 코웃음을 쳤다.

“이렇게도 생각해 보거라. 네가 왕비를 찾지 못했다면 그대로 잊을 수 있었겠느냐?”

묵용감은 눈을 내리깔고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인연은 억지로 맺는다고 이어지지 않습니다. 주아도 차차 깨닫겠지요.”

“널 저를 배신한 사내로 기억할지도 모르지.”

태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세상에서 헤쳐 나갈 수 없는 유일한 난관은 아무래도 연정인 모양이다.”

그때, 가동이 들어와 묵용감의 귓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가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형님, 급한 용무가 생겨 물러가 보겠습니다. 다음에 형님의 차를 마시러 오지요.”

태자도 붙잡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가 보거라.”

묵용감이 떠난 후, 태자는 이소로를 불러들였다.

“영구가 돌아왔더냐?”

“예. 보고할 일이 있어 가동에게 왕야를 모셔오라고 한 듯합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태자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 생기거든 후원으로 찾아오거라. 황보 아가씨를 보고 오겠다.”

“예, 전하.”

이소로가 태자를 따라 문을 나섰다.

“전하, 왕야께서 어젯밤 일을 의심하지 않으셨습니까?”

태자가 그를 훑어보며 되물었다.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더냐?”

이소로는 싱거운 웃음소리를 내고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누각에 오른 태자는 주변을 모두 물렸다. 푹신한 의자에 기대어 있던 황보주아는 서둘러 예를 갖추려 했지만 그가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눌렀다.

“몸이 편치 않으니 예를 갖추지 말거라. 남도 아니질 않느냐.”

기분이 좋지 않았던 터라, 황보주아는 예를 갖추기도 성가셨다. 그녀는 다시 등을 기대며 태자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태자 오라버니?”

“왜, 날 보고 싶지 않으냐?”

태자가 그녀를 바라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네 계책은 서로에게 좋은 일이었다. 일이 어찌 되든 셋째를 네게 보내려 했는데 아쉽게도 실패했구나. 방금도 그 애를 한참 설득했지만 왕비가 오해하는 게 걱정이라며 날 보내더구나.”

어젯밤 일은 황보주아와 그의 합작이었다. 그는 초왕을 완전히 취하게 하여 후원으로 돌려보내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 소식이 초왕비에게 들어가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초왕비가 크게 성을 낼 게 분명했으니. 게다가 바람도 심하게 불고 비가 억수같이 퍼부으니, 그런 날씨에 소란을 피우면 아이를 잃을 가능성도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과정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계획이었다. 초왕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기에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진행한 뒤, 빠져나갈 구멍도 만들어야 했다.

그렇게 많은 고민과 준비 끝에 진행한 일이었지만 초왕이 걸림돌이 되었다. 그는 고주망태가 되었음에도 후원에 돌아가는 일만큼은 잊지 않았다. 어찌나 완강한지, 그를 막을 수 있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그다음 변수는 초왕비였다. 설마 여인의 이불까지 젖힐 줄이야. 그나마 황보주아가 대처를 잘한 덕분에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결국 이 일은 질투에 눈이 먼 초왕비가 소란을 피운 일로 마무리되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아무리 초왕이 그녀를 피하고 있다고 해도 직접 찾아와 위로를 건네는 게 옳았다.

그러나 여기서 마지막 변수가 생겨났다. 초왕은 체면 따위보다 초왕비를 소중하게 여겼다. 태자와 황보주아는 초왕비를 향한 초왕의 충절을 너무 과소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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