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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73)화 (372/1,192)

제373화

밤새도록 사납게 지붕을 두들기던 비는 아침이 다가올수록 잦아들었다. 어느덧 부슬부슬 내리는 게 봄비를 연상케 했다.

일찍 잠에서 깬 백천범은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자 때마침 월규가 장막을 걷었다. 일어나 있는 그녀를 보고 다소 놀란 듯했다.

“왕비 마마, 어찌 이리 일찍 일어나셨습니까?”

그녀가 눈을 비비며 태연하게 말했다.

“배고파.”

그 말에 월규가 다시 한번 놀랐다. 이 말을 얼마 만에 듣는지! 어쨌든 좋은 일이 아닌가. 적어도 왕비가 무엇인가를 먹고 싶어 하니, 기쁘기 그지없었다.

“어서 일어나세요. 소인이 세안 시중을 들겠습니다.”

월규가 백천범을 부축해 침대에서 일으켰다.

“아직 비바람이 몰아치니 옷을 조금 두껍게 입는 게 좋겠습니다.”

백천범이 평소와 다름없이 물었다.

“왕야는 일어나셨어?”

“예. 서재에서 영구 무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계십니다.”

“아침은 드셨고?”

월규가 장난스럽게 답했다.

“왕야께서 왕비 마마보다 먼저 드신 적이 있었습니까? 왕야가 먹여 주지 않으면 마마께서는 한 입도 못 드시지 않습니까.”

백천범의 뺨이 은은하게 물들었다.

“지난 말을 왜 해, 앞으로가 중요하지.”

“세상에, 갑자기 개과천선이라도 하시겠단 말씀이십니까?”

그녀가 입술을 삐죽이더니 웅얼거렸다.

“개과천선? 내가 했던 건 애교야. 왕야께서도 좋아하셨어.”

월규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왕야께서 안 좋아하실 수 있을까요. 고개만 돌리면 눈물을 훔치시니, 우리 마마께서는 아무래도 물로 만들어지셨나 봅니다.”

모처럼 그녀의 기분이 좋아 보이기에 월규가 농담을 건넸다. 왕비의 기분이 좋지 않았다면 금세 눈시울을 붉혔으리라. 초왕이 보기라도 했다면 월규는 혼쭐이 날 터였다.

백천범이 배가 고프다는 소식에 기홍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매일 수많은 음식을 만들었지만 왕비가 입에 대는 양은 극히 적었다. 그토록 마음을 졸이며 기다리던 말을 이제야 듣다니! 뛸 듯이 기뻤던 기홍은 서둘러 음식을 내어왔다.

담백한 죽부터 우유가 들어간 전병, 단팥죽, 만두, 동충하초를 넣은 탕까지……. 귀한 재료를 듬뿍 넣은 다양한 음식이 한 상 가득 차려졌다.

상이 차려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백천범은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이런 감각은 너무나 오랜만이었다. 배가 고프고 입맛이 돌았다. 그녀는 굶주린 사람처럼 모든 음식을 먹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녀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물었다.

“왕야는 아직 안 오시는 거예요?”

“벌써 말씀드렸습니다.”

녹하가 웃으며 말했다.

“배가 고프시거든 먼저 드시라고 하셨습니다.”

문득 어젯밤 일이 떠올라, 백천범은 얼른 먹고 일어날 생각이었다. 그와 마주치면 왠지 민망함을 느낄 것 같았다.

결국 그녀가 젓가락으로 만두를 집어 들었다. 한 입 베어 물려던 찰나 긴 도포를 늘어뜨리고 성큼성큼 들어오는 묵용감이 보였다.

그는 헛기침만 몇 차례 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왕비의 입맛이 좋다던데, 사실이소?”

백천범은 고개를 숙인 채 그의 허리춤에 달린 패옥만 바라보았다.

“네. 일어나자마자 배가 조금 고팠어요.”

“배가 고프다니 좋은 일이오.”

맞은편에 앉은 그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어젯밤 일에 대해서는 절대 언급하지 않으려는 듯했다.

“많이 드시오. 보아하니 오늘은 내가 먹여 주지 않아도 되겠구려.”

백천범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저는 이제 어린아이가 아닙니다, 먹여 주지 않으셔도 되어요.”

“늘 그대를 어린아이라 여기고 돌봐 주었소.”

그가 감격이 스민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대가 곧 아이를 낳게 될 줄이야.”

먹여 주지 않겠다고 했으면서도 그는 습관적으로 국물을 떠서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따뜻할 때 먹어 보시오.”

월규는 입을 가리고 웃다가 기홍에게 끌려나갔다. 식사 시간에는 초왕의 보살핌이면 충분했다. 적어도 지금은 시녀들이 필요없는 순간이었다.

두 사람만 남자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백천범은 괜스레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며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묵용감도 켕기긴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어젯밤 누각을 찾아간 일 때문인지 다른 일 때문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를 곁눈질하며 기묘한 탐색을 이어갔다.

결국 그가 목청을 가다듬으며 침묵을 깼다.

“어젯밤에 비를 많이 맞았는데, 감기가 들진 않았소?”

“아뇨.”

그녀가 헤헤 웃으며 말했다.

“전 몸이 튼튼하잖아요. 잠깐 비 좀 맞은 건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가 그녀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어쨌든 홑몸이 아니니 조심하시오.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안 되오. 이번엔 그대의 체면을 봐서 넘어가겠지만, 또 이런 일이 생긴다면 저 애들에게 벌로 곤장 서른 대를 내리겠소.”

백천범이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서둘러 약속했다.

“앞으로 이런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그가 장난스레 코웃음을 쳤다. 믿지 않는 기색이 역력했다.

“부디 그러길 바라오.”

그녀는 넉살 좋게 만두를 집어 그의 그릇에 놓아주었다.

“연한 양고기를 넣었대요. 하나도 안 비리고 맛있으니 드셔 보세요.”

그가 그녀의 체면을 살려 주려는 듯 한입 베어 물었다.

“음, 맛있구려.”

그리곤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어젯밤에 잠은 잘 잤소?”

“네.”

그녀가 곧장 답했다.

“어찌나 피곤했는지 침대에 눕자마자 곯아떨어져서 아침까지 한 번도 안 깨고 잤어요.”

듣기엔 자연스러웠지만, 단숨에 내뱉는 걸 보니 영 수상쩍었다. 그가 침착한 척 질문을 이어갔다.

“빗소리 때문에 시끄럽진 않았소?”

“아뇨, 전혀요.”

그녀가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그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또다시 눈길을 피했다.

“아주 깊게 잠들어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어요.”

그럴 리가. 잠귀가 유독 밝아 자그마한 인기척에도 쉽게 잠에서 깨는 백천범이 아니던가. 그가 곁에 있을 때만 깊게 잠드는 그녀가 혼자서 깊이 잠들었을 리 없었다.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했지만, 그보다…….

그의 얼굴에 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자신의 보잘것없는 체면이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만약 그녀가 봤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라고 방도가 있었을까? 매일 밤 달콤함을 맛보다 별안간 도를 닦게 되었다. 며칠간 솟구치는 마음을 억누른 데다 어제는 취기까지 오르니 타오르는 불씨를 끌 길이 없었다. 그저 맹렬한 갈망이 원하는 대로 하는 수밖에.

그가 난처해하는 걸 알아차린 그녀가 화제를 돌렸다.

“왕야, 오늘부터는 관청에 나가셔요. 전 월규랑 있으면 돼요. 제가 보고 싶으시거든 잠시 보러 오세요.”

묵용감은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그릇에 담긴 죽을 내려다보았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오. 게다가 이렇게 먹었는데도 구토를 하지 않으니, 증세가 다 사라진 것 같소. 그럼 관청에 나갔다가 일이 별로 없거든 바로 돌아오겠소.”

“급히 돌아오시지 않아도 돼요. 비도 오는데 오가기 힘들잖아요.”

백천범이 정말로 괜찮다는 표정을 보였다.

“그저 점심에 같이 식사를 하러 돌아오시면 돼요.”

묵용감은 짧게 대답하고는 입가를 닦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 의원을 불러줄 테니 증세가 다 나았는지 확인해 보시오. 그간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기홍에게 음식을 많이 차리라고 분부하겠소. 그간 들지 못한 것들도 맘껏 드시오.”

백천범이 그를 따라 일어났다.

“왕야, 벌써 가시는 거예요? 제가 바래다 드릴게요.”

“그러지 않아도 되오.”

그녀는 단번에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결국 그는 참지 못하고 그녀를 품에 다정히 안았다. 사실 관청에 가고 싶지 않았다. 며칠간 그랬듯이 계속 그녀의 옆에서 머물며 그녀에게만 온 정성을 쏟아붓고 싶었다.

그녀가 화를 내든 우울해하든, 솔직하게 흘러나오는 감정을 받아주는 일도 나쁘지 않았다. 어쩐지 보통의 남편이 된 듯한 기분이 썩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기뻐하기만 한다면, 그는 무슨 일이든 해낼 각오가 되어 있었다.

백천범은 입가를 닦지 않아 그의 옷을 더럽힐까 걱정이었다. 최대한 고개를 뺐지만, 어느새 그의 손이 그녀의 동그란 뒤통수를 꾹 눌렀다.

그녀가 민망한 듯 웅얼거렸다.

“왕야, 아직 입을 닦지 않았단 말이에요.”

그가 웃음을 흘리며 그녀를 놓아주었다. 이윽고 그의 시선이 그녀의 눈망울에 깊이 머물렀다. 그녀 앞에서 난처하고 민망할 일이 뭐가 있을까. 두 사람은 어엿한 부부이거늘. 그녀에게 추한 모습을 보였다고 해도 어떻단 말인가? 그녀가 그의 고충을 알게 된 셈이니, 오히려 잘되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와는 달리 조금 민망했던 백천범은 차마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줄곧 다른 곳을 보았다. 그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며 장난스럽게 웃었다.

“뭐가 그리 부끄럽소? 다음번엔 한번 제대로 보시오.”

깜짝 놀란 그녀의 입술이 나팔꽃처럼 동그랗게 오므라들었다. 이때다 싶었던 그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다정하게 얼굴을 감쌌다.

정원에 숨어서 몰래 들여다보던 이는 갑작스레 귓불을 붙들려 나무 뒤로 끌려갔다.

“어젯밤 일은 어떻게 된 거야? 대체 어디 갔었어?”

가동이 앓는 소리를 내며 손을 휘저었다.

“놔 줘, 귀 떨어지겠어! 악, 진짜 떨어진다……!”

그제야 녹하가 손을 풀었다. 아리따운 얼굴에 분노가 가득했다.

“얼른 말해. 어디 갔었어? 왕야께서는 왜 그리 늦게 돌아오신 거야?”

가동이 귀를 문지르며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왕야는 태자 전하랑 함께 계셨어. 술을 많이 드셔서 늦게 오신 거지.”

“너는? 설마 너도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신 거야?”

“나…도 과음을 하긴 했지…….”

그가 슬쩍 물러나더니 경계심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나한테 손댈 생각하지 마. 왕야께서 안에 계신다고. 내가 소리를 지르면 네 체면이 구겨질 거야.”

녹하가 실소를 흘렸다.

“내 체면이 구겨질까, 아니면 네 체면이 구겨질까? 계산은 똑바로 해야지.”

그녀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며 물었다.

“그런데 너! 왕야께서 술을 드시는데 곁을 지키지 않은 거야? 어딜 내뺀 거야!”

“이, 이소로가 억지로 끌고 간 거야. 태자 전하께서 왕야께 허락을 받아 주셔서, 어쩔 수 없이……!”

녹하가 발을 들어 올렸다. 초왕처럼 가슴팍을 걷어찰 수 없는 게 한스러울 뿐이었다. 낌새를 알아차린 가동이 얼른 몸을 움츠렸다.

“녹하야, 너는 아가씨야. 이런 건 배우지 않아도…….”

녹하가 코웃음을 쳤다.

“걷어차더라도 지금은 아니야. 기억해 두었다가 한 번에 갚아 줄 거니까!”

마침 묵용감이 대문을 나서고 있었다. 그녀는 가동에게 썩 꺼지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얼른 가. 왕야 나오셨으니까. 왕야를 제대로 모시지 않으면 진짜 발로 차 버릴 거야.”

가동은 재깍 답하긴 했지만, 왠지 뭉그적거리며 뜸을 들였다. 그가 은근슬쩍 떠보듯이 운을 뗐다.

“그런데 부인, 혼사 문제는 생각해 봤어? 왕야께서는 곧 아버지가 되시는데…….”

녹하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이젠 질투까지 하셔? 일은 제대로 안 하면서 아버지는 되고 싶은 거야? 꿈 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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