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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72)화 (371/1,192)

제372화

그는 평소 기홍과 녹하에게 예를 갖추었지만, 지금은 인정을 봐주지 않고 호되게 꾸짖었다.

“어찌 그리 멍청한 짓을 했단 말인가? 왕비 마마께서 회임하셨음을 잊었는가?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간 왕야께서 자네들 가죽을 벗기실 걸세!”

시녀들은 고개를 숙였다. 차마 할 말이 없었다.

백천범의 마음이 빠르게 술렁였다. 치솟았던 분노가 사그라지자 죄책감이 고개를 들었다. 무턱대고 밖으로 나온 자신 때문에 애꿎은 시녀들까지 죄를 뒤집어쓰지 않는가.

“제가 직접 나왔습니다. 저들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왕비 마마, 감싸 주지 마십시오. 저희에게는 주인의 안위가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조차 모른다면 내보내는 게 낫습니다. 소인이 듬직하고 믿을 만한 시녀로 구해 드리겠습니다.”

백천범은 그의 초조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화를 낼 리가 없었다. 그녀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왕야께선 언제 돌아오신 거예요?”

“방금 돌아오셨습니다. 술을 많이 드셨는데, 마마께서 보이지 않으시니 술이 거의 깨셨습니다. 하인 전부에게 왕비 마마를 찾으라고 하셨습니다.”

학평관이 빗속에서 아른거리는 등불들을 가리켰다.

“보십시오, 후원에서 마마를 찾지 못해 앞뜰까지 왔습니다.”

“다들 돌아가라 분부하십시오.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그녀가 우물쭈물하다 입술을 달싹였다.

“…다 제 잘못입니다.”

“왕비 마마만 문제가 없으시다면 비를 맞는 게 대수겠습니까.”

학평관이 우산을 들어 들이닥치는 비를 막았다.

“왕비 마마, 안으로 드십시오. 옷이 다 젖으셨으니 정말 큰일입니다…….”

그는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우산을 백천범에게 가까이 대었다. 그리곤 온몸으로 비바람을 막으려 애썼다.

백천범은 학평관을 비롯해 다른 이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자신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서서히 실감이 났다. 치솟는 화를 못 이기고 멋대로 행동하지 않았던가. 그 순간엔 배 속의 아이마저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더구나 이 비바람을 헤치고 많은 이가 그녀를 찾고 있다니! 그녀는 차라리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소문이라도 나면 다들 그녀를 어찌 생각하겠는가? 질투에 눈이 먼 초왕비가 한밤중에 규방의 이불을 젖혔다고 손가락질하고도 남을 터였다.

마침내 백천범은 처소로 돌아왔다. 기홍과 시녀들은 서둘러 따뜻한 물을 준비하러 갔고, 백천범은 불안한 얼굴로 안채에 들어갔다. 커다란 팔걸이 의자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묵용감이 앉아 있었다. 두 눈을 꼭 감고 있는 게 선잠이 든 듯했다.

백천범이 조심스레 다가가 그를 불렀다.

“왕야, 왕야.”

묵용감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어딜 갔었소?”

“그게…….”

그녀는 왠지 솔직히 털어놓을 수가 없었다.

“잠시 밖을 돌아다니다 왔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데 밖을 돌아다녔다?”

묵용감이 천천히 이마를 문질렀다. 그의 눈매에 피곤한 기색이 묻어났다. 그가 어쩔 방법이 없다는 듯 탄식을 흘렸다.

“천범, 그대가 하고 싶다는 대로 모두 해 주지 않았소. 하지만 오늘처럼 비가 많이 오는 날에 그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나더러 어찌하란 말이오?”

“제 잘못이에요. 왕야께 걱정만 끼쳐드렸어요.”

백천범이 조심스럽게 그의 이마를 짚었다.

“미열이 있으신 것 같아요. 술을 많이 드셨어요? 진한 차를 내어 오라고 분부할게요.”

묵용감은 손을 내젓더니 그녀를 살폈다.

“난 괜찮소. 어서 따뜻한 물로 씻고 옷을 갈아입으시오. 감기라도 들면 안 되오.”

백천범은 얼른 고개를 숙인 채 밖으로 나갔다.

옷을 벗고 욕통에 몸을 담그자 후끈한 열기가 노곤함을 지워 주었다. 그녀는 편안함을 느끼면서도 작게 중얼거렸다.

“왕야께서 화가 나신 것 같아.”

월규가 그녀의 등을 닦아 주며 말했다.

“화가 안 나시겠습니까? 소인이 무릎을 꿇고 그렇게 빌었는데, 들은 척도 않고 나가지 않으셨습니까. 마마께서는 왕야를 못 믿으십니까? 아니면 마마를 못 믿으시는 겁니까? 왕야께서는 아무리 취하셔도 마마께 돌아오시는데, 마마는 왜 안절부절 못하시는지요? 설령 황보 아가씨를 만나러 가셨다 한들, 반드시 돌아오셨을 겁니다.”

“난 그저 잠시…….”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정신이 나간 것 같아.”

“증세가 심하니 위 의원이 조심하라고 당부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마마의 증세는 마음의 병에서 비롯되었을 테지요. 약으로 치료할 수 없으니 마마께서 이겨 내셔야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좋아진다고는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마마께서 마음을 다스리셔야만 합니다.

소인이 이리 간청하겠습니다. 제발 의심을 줄이십시오. 왕야 같은 부군은 천하에 유일하십니다. 또다시 왕야를 오해했다간 하늘도 용납지 않을 겁니다. 보셨지요, 하늘도 노해서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까? 오늘 내리는 비는 다 마마 때문에 내리는 줄 아십시오.”

백천범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하늘을 울리다니, 나한테 그런 능력도 있었구나.”

월규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잔소리를 이어갔다.

“왕야께서 뭐든 마마께 맞춰 주시지 않습니까. 가끔 마마께서 하시는 행동은 소인도 차마 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두고 보십시오. 아기씨만 태어나시면 왕야께서 지난 일들을 다시 꺼내실 겁니다.”

“안 그러실걸.”

백천범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왕야는 이 세상에서 나한테 가장 잘해 주는 사람이야. 어떤 잘못을 해도 용서해 주시지. 그런데 나는 늘 생트집만 잡으면서 왕야를 성가시게 한 거네…….”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희미해졌다.

“난 나를 못 믿는 거야. 내가 모자란 사람이라 왕야랑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 언젠가 왕야가 내게 질릴까 봐, 다른 사람이 왕야를 빼앗아갈까 봐…….”

그녀의 목소리가 완전히 잦아들 즈음,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럴 리가. 그자가 그대에게 질리는 일은 영원히 없을 것이오. 누군가 그자를 빼앗아갈 일은 더더욱 없을 테고.”

따스하고 커다란 손이 그녀의 등을 상냥하게 감쌌다.

“그는 그대 한 사람만의 것이오. 영원히 그대만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오.”

깜짝 놀란 백천범이 뒤를 돌아보았다.

“왕야, 언제 오신 거예요?”

먼저 목욕을 마친 묵용감은 머리를 늘어뜨린 채 마른 수건으로 그녀의 몸을 닦아 주었다.

“말하지 않았소. 이제 내가 그대의 시중을 들겠다고.”

그는 그녀에게 옷까지 입혀 주었다. 옷깃을 단단히 여민 그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늘 밤부터는 각자의 방에서 자는 게 좋겠소.”

백천범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왕야, 아직 화나신 거예요?”

묵용감이 쓴웃음을 짓더니 그녀의 손을 아래로 끌었다.

“이렇게 되었는데 모질게 내칠 수 있겠소?”

얼굴이 빨갛게 물든 백천범이 손을 빼냈다. 괜스레 먼 곳만 바라보던 그녀가 겨우 입술을 달싹였다.

“다, 다른 사람을 찾아보시든가요…….”

묵용감이 입꼬리를 올리더니 놀리듯 말했다.

“어느 여인이 내 곁에 있으려 하겠소? 그대가 한밤중에 찾아와 이불을 젖히면 어찌하려고?”

백천범이 흠칫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벌써 들으셨어요?”

묵용감이 코웃음을 치며 그녀와 함께 밖으로 향했다.

“그리 소란을 피웠는데 내가 모를 것 같소?”

백천범이 그의 눈치를 살피느라 힐끔거렸다.

“왕야, 화나셨어요?”

“그렇소.”

“주아 언니가…….”

“그 애 때문이 아니오. 그대 때문에 났소.”

그가 그녀의 엉덩이를 가볍게 때렸다.

“또 함부로 밖을 뛰어 다니면 가법家法에 따라 다스리겠소.”

각방을 쓰자는 묵용감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입을 맞추자마자 그대로 방을 나섰다.

홀로 남으니 공허함이 밀려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슬픔을 못 이겨 눈물을 흘리는 일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었다. 간밤의 소란 이후에 기분마저 영향을 받은 듯했다. 그녀는 비로소 지난 두 달을 냉정하게 돌이켜볼 수 있었다.

그동안 매일 넋을 놓고 지냈을뿐더러, 몸도 편치 않으니 늘 울적했다. 말없이 축 처져 있거나 걸핏하면 성질을 부리던 모습을 떠올리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틈만 나면 울고불고 난리를 치던 사람이, 말도 안 되는 일로 소란을 피웠던 사람이 자신이었다. 도무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사실이었다. 생각할수록 면목이 없었다.

꼭 한바탕 꿈을 꾼 듯했다. 이제 꿈에서 깨어났으니 예전처럼 행동하진 않을 터였다. 어쨌든 정말 아이를 가진 걸 보면, 모든 일은 현실이었고 그녀의 정신만이 잠시 꿈속에 있었던 모양이다.

배에 손을 얹은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아기에게 말을 걸었다.

“너도 부끄럽겠지? 그간 너희 아버지께서 고생이 많으셨어. 앞으로는 내가 더 잘할게. 그러니 아가, 얌전히 지내다가 건강히 나와야 해. 너만 건강하다면 어떤 힘든 일도 다 참을 수 있어. 네가 나오면 우리는 완전한 가족이 되는 거야…….”

아기에게 말을 걸어보니 조금씩 정신이 맑아졌다. 그녀는 혹시라도 아이가 성가셔할까 봐 더는 말하지 않았다. 다만 아무리 잠을 청해도 묵용감이 없으니 잠들 수가 없었다.

그녀는 귀를 쫑긋 세우고 바깥의 소리를 들었다. 월규도 잠이 든 모양이었다. 비는 여전히 요란하게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녀는 살며시 일어나 신발을 신고 바깥방으로 향했다. 역시 월규는 곤히 잠들었는지 이따금 코 고는 소리만 들려왔다. 월규의 침대를 돌아 옆문으로 들어간 그녀는 곧장 뒤쪽 곁채로 다가갔다.

곁채 입구에는 가느다란 대나무 발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조용히 발을 걷고 들어가 조심스럽게 발을 내려놓았다. 침대를 힐끗 살펴보니 그 역시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한 걸음씩 조심히 내디뎠다. 특별히 뭔가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를 보고 싶었다. 그가 늘 그녀에게 하듯이, 이불을 덮어 주고 자는 모습을 확인하면 마음이 놓이지 않을까.

어둠에 섞여 들었던 그녀는 얼마 가지 않아 걸음을 멈췄다. 따갑게 울리는 빗소리에 미묘한 소리가 섞여 있었다…….

그녀는 그대로 귀를 기울였다. 사내가 가쁜 숨을 몰아쉬는 듯한 소리였다. 잔뜩 억눌렸지만 거칠게 울리는 소리에 그녀의 머릿속에서도 벼락이 쾅쾅 울려 댔다. 순식간에 그녀의 목까지 빨개질 정도였다. 그간 밤마다 그녀의 귓가에 머물던 그 소리가 틀림없었다.

그녀는 숨을 참으며 황급히 방을 빠져나왔다. 그 바람에 대나무 발이 문틀에 닿아 작게 달그락거렸다. 별안간 침대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뚝 끊기더니, 잠시 후 낮은 호통이 이어졌다.

“누구냐!”

조그만 그림자가 쏜살같이 사라졌다. 처소로 돌아오며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월규가 눈을 떴다. 얼핏 그녀의 모습을 본 듯해, 월규가 목소리를 내었다.

“왕비 마마…….”

“얼른 자, 나는 괜찮으니까.”

그녀는 얼른 신발을 벗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심장이 어찌나 쿵쿵 뛰는지, 온몸이 펄떡이는 듯했다. 한참이 지나도 쿵쿵거리는 소리가 가라앉지 않았다.

당황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입을 가리고 숨죽여 웃었다. 이게 각방을 쓰자고 했던 이유였다니…….

사실 그가 가엾기도 했다. 삭막한 삶에서 겨우 달콤함을 맛보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금지당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그에게 꼭 안겨서 자려고 했으니… 물고기를 뜨거운 볕에 말리는 일과 무엇이 다를까?

그녀는 줄곧 그녀 자신과 아이를 생각했다. 그의 입장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이제 생각해 보면, 자신을 잘 억제하던 이가 얼마나 참기 힘들었으면 그리했을까.

그의 말이 맞았다. 그를 힘들게 하기보단 지금처럼 떨어져서 자는 편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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