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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71)화 (370/1,192)

제371화

백천범의 뒤에 기홍과 월규도 서 있었다. 마찬가지로 비에 흠뻑 젖은 그들은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녹하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럽게 하나의 상황이 펼쳐졌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으니, 결국 왕비가 나섰으리라.

백천범이 계단을 향해 발걸음을 뗐다. 보초병들은 검을 뽑진 못했지만 계단 앞을 막아섰다.

“왕비 마마, 송구하오나 올라가실 수 없습니다.”

백천범의 눈매가 사납게 올라가며 노기를 드러내었다.

“어째서? 왕야께서 계시기 때문인가?”

보초병들이 우물쭈물하다 겨우 내뱉었다.

“소인들은 누구도 올리지 말라는 명을 받았을 뿐입니다. 왕비 마마, 이러시면 소인들이 난처하옵니다.”

“내가 기어이 올라가야겠다면?”

이미 마음이 조급해진 터라, 그녀는 더욱더 강압적으로 나왔다.

“마마…….”

그녀가 앞으로 나아가며 배를 살짝 내밀었다. 그 걸음에 망설임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날 막거든, 배 속의 아이를 건드리는 일이다! 왕야께서 절대 용서치 않을 것이야!”

이렇게 나오는데 어찌 그녀를 막을 수 있을까. 그녀가 다가올수록 보초병들은 꼼짝없이 뒤로 물러났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계속 그녀를 타일렀다.

“왕비 마마, 그만 돌아가시지요.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부디…….”

“비키라니까.”

더는 참을 수가 없다. 백천범은 아예 그들을 밀치고 계단을 올라갔다.

임산부는 높은 곳에 오르면 안 되었지만, 백천범은 고민할 겨를이 없었다. 그녀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아무도 그녀를 말릴 수 없었기에 기홍과 월규는 서둘러 그녀를 부축했고 녹하가 뒤를 따랐다.

당황한 은옥은 왕비의 앞을 막아섰다.

“왕비 마마, 저희 아가씨께서는 조금 전에 침소에 드셨습니다. 몸이 편치 않으시니 부디 참아 주시옵소서…….”

월규가 그녀를 노려보았다.

“왕야께서 이곳에 계십니까, 계시지 않습니까?”

“왕야께서는… 그러니까…….”

은옥이 누각을 보며 한참을 망설였다.

“안, 안 계십니다.”

거짓말을 하는 게 뻔했다. 백천범이 그녀를 힘껏 밀쳐냈다.

“내가 직접 보겠네.”

입구에 다다른 백천범은 정신을 가다듬고 주렴을 걷어 올렸다. 그 소리에 다른 시녀가 허리를 깊이 숙이고 나타났다.

“소인,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백천범은 대꾸도 없이 침소로 향했다. 채봉이 서둘러 그녀의 앞을 막았다.

“왕비 마마, 저희 아가씨께선 침수에 드셨습니다. 이러지 마시옵…….”

그때 녹하가 그녀의 팔뚝을 밀치며 매섭게 말했다.

“감히 왕비 마마의 앞을 막다니, 살기 싫은가?”

침실 입구에 주렴이 길게 드리워 있었다. 불빛을 받은 푸른 구슬이 맑은 빛을 흘렸다. 약하게 부는 바람에도 파도가 일듯이 한 줄기 빛이 춤을 추었다. 백천범이 발을 들어 올리려는 순간, 황보주아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피곤하지요? 그만 눈 붙이시어요…….”

백천범은 손을 뻗은 채로 굳어 버렸다.

기홍과 시녀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초왕이 정말로 여기에 있단 말인가? 다시 은옥과 채봉을 바라보니 민망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두 시녀는 눈을 굴리며 우물쭈물할 뿐이었다.

어느덧 비바람은 폭풍우가 되어 창문을 거세게 두드렸다. 별안간 내려친 번개가 어두운 하늘을 가르며 창백한 빛을 흩뿌렸다. 순간이나마 백천범의 동공에 발보상이 똑똑히 새겨졌다. 얇은 부용장芙蓉帳(부용을 그리거나 수놓은 장막) 너머로 움직이는 희미한 윤곽이 비쳤다.

“요즘 너무 고생해서 얼굴이 수척해졌네요.”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에 깊은 동정이 담겨 있었다.

“가엽기도 하지. 아이참, 그렇게 움직이지 마세요. 간지럽습니다. 어서 눈 감고 쉬세요.”

번개가 지나간 자리에는 깊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부드러운 목소리는 어둠을 달래듯이 들려오고 있었다. 백천범은 주렴 앞에 서서 미동도 하지 않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몸을 돌렸다.

그녀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저 안으로 들어가서 무엇을 하겠는가? 왜 거짓말을 했냐며 따지기라도 할까? 그가 벼랑 끝까지 내몰린 기분이라면, 그녀는 그 절벽에 매달려 있는 이나 마찬가지였다. 입버릇처럼 그녀밖에 없다고 했으면서, 어느새 다른 여인 곁을 찾다니.

황보주아가 제 발로 침소를 찾아왔을 땐 꿈쩍도 하지 않았다면서 지금은 왜……. 그래, 더는 자신의 곁에서 밤을 보내는 게 즐겁지 않았던 걸까.

그녀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가만히 문 앞 계단에 섰다. 사납게 몰아치는 비바람에 머리카락이 마구 흩날렸다. 젖은 머리카락이 흐르는 눈물처럼 얼굴에 달라붙기 시작했다.

기홍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마마,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따뜻한 물에 씻고 푹 주무시지요. 오늘 일은 내일 생각하심이 어떻겠습니까.”

녹하와 월규는 차마 왕비를 타이를 수 없었다. 그녀들도 속상하긴 마찬가지였다. 친왕에게 어찌 한 여인만 있을까. 다른 이들을 생각해 보면 묵용감이 올곧게 버텨 왔을 뿐이었다.

어쨌든 이 일엔 순서와 편애가 있었다. 왕비는 초왕에게 가장 중요한 여인이고, 다른 이들은 첩에 불과하다. 첩이 어찌 부인을 뛰어넘겠는가. 세자 아기씨를 낳는다면 그녀의 자리는 완전히 견고해질 터였다.

그런 순서를 알면서도 이처럼 마음이 아픈 건… 그간 초왕이 보였던 헌신 때문이리라.

결국 월규도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 그만 가시어요. 찬기라도 들면 아기씨께 좋지 않습니다.”

그때, 문이 닫히며 주렴이 흔들렸다. 거센 빗소리 사이로 빗장을 잠그려는 소리가 백천범의 귀를 파고들었다. 마치 그녀와 묵용감의 사이에 지울 수 없는 선을 긋는 소리처럼 들렸다. 발밑이 훅 꺼지는 듯한 기분에 그녀는… 몸을 돌려세우고 문을 열어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왕비 마마!”

기홍이 소리쳤지만, 녹하가 그녀를 붙잡고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문을 잠그려던 은옥이 백천범을 보고 화들짝 놀라 입술을 달싹였다.

“와, 왕비 마마, 아, 아직 안 가셨…….”

백천범은 대꾸도 하지 않고 쏜살같이 침대로 향했다. 채봉이 아연실색한 얼굴로 그녀를 막아섰다.

“왕비 마마, 무얼 하시려고 다시 오셨습니까?”

그녀가 냉랭한 얼굴로 채봉을 밀치더니 곧바로 장막을 걷어 올렸다. 침대 맡에는 작은 등불이 놓여 있었다. 그녀의 손이 어떤 망설임도 없이 불룩 솟아오른 이불을 젖혔다.

모두의 입가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여러 개의 시선이 침대로 향했다. 마침내 황보주아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가 곧 얼굴을 굳히더니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왕비, 대체 이게 무슨 짓입니까?”

백천범은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황보주아의 품에는 작은 삵이 안겨 있었다.

“…이 애랑 얘기한 거예요?”

“그럼요?”

“어찌 삵한테 고생해서 수척해졌다고…….”

은옥이 서둘러 대신 해명했다.

“설흔雪痕이 요즘 쥐 잡는 연습을 해서 그러하옵니다.”

백천범이 황당함을 감추지 않으며 재차 물었다.

“쥐를 잡게 하면 더러워지잖아요? 몸은 잘 씻기고 있나요?”

“…….”

“언니, 안색이 좋지 않네요. 내일 위 의원을 보내 진맥을 봐 달라고 할게요.”

“필요 없습니다.”

백천범이 말을 내뱉을 때마다 황보주아는 뺨이라도 맞은 듯 안색이 어두워졌다.

“한밤중에 제 이불을 젖히시다니요. 대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백천범이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언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지 오래인데, 짬이 나지 않아서 오늘…….”

“이렇게 늦은 밤에 말입니까?”

옆에 서 있던 채봉이 나직하게 말했다.

“왕비께서 왕야를 찾으러 오셨답니다.”

성이 난 황보주아가 입을 여는 순간 기침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가슴을 움켜쥐고 거칠게 기침을 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왕야를 찾아 이곳에 오다니! 제가 왕야를 숨기기라도 했겠습니까?”

백천범이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시녀들을 바라보았다. 녹하가 서둘러 나섰다.

“마마, 황보 아가씨 얼굴을 봤으니 그만하시지요. 비를 맞으셨으니 어서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기홍 역시 백천범을 부축하며 밖으로 나갔다.

“녹하의 말이 맞습니다. 어서 돌아가 옷부터 갈아입으셔야 합니다. 감기라도 걸리시면 정말 큰 일입니다.”

황보주아의 매서운 목소리가 그들을 붙잡았다.

“멈춰!”

녹하가 언짢은 얼굴로 돌아보았다.

“어찌 소리를 지르십니까? 왕비 마마께선 홑몸이 아니심을 잊으셨습니까? 함부로 놀라게 하지 마십시오. 하실 말씀이 있으시거든 내일 하시지요.”

그녀는 기홍과 월규에게 눈짓을 보내며 버티고 섰다.

정작 황보주아는 그녀를 이대로 보낼 마음이 없었다.

“왕비, 이대로 가시다니요!”

황보주아가 침대에서 내려와 신발을 신었다. 백천범과 단단히 결판을 내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녹하가 그녀를 가로막고 백천범이 가는 동안 시간을 끌었다.

황보주아가 성난 얼굴로 녹하를 노려보았다.

“오밤중에 찾아와 이리 소란을 피운 것, 아가씨도 다 봤지요? 내일 셋째 오라버니께 전부 고하고 말겠습니다.”

녹하가 가소롭다는 듯 냉소를 머금었다.

“예. 그리하시지요. 다만 아가씨께서도 연기를 그만하십시오. 제가 모를 줄 아셨습니까? 이 일은 다 아가씨께서 꾸민 일이지요?”

“그게 무슨 말인지요?”

“시치미는 우리 마마께서 아가씨보다 훨씬 더 잘 떼십니다. 거의 신의 경지에 올랐다고 할 수 있지요.”

녹하는 코웃음을 치더니 못을 박았다.

“왕야와 왕비 마마 사이를 간섭하려 들거든, 반드시 발등을 찍는 꼴이 될 겁니다!”

* * *

후원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월규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누각에도 안 계시다니, 왕야께서는 어디로 가셨단 말입니까?”

이젠 어디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황보주아의 누각에만 없으면 되었다. 어둠 속에서 백천범이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묵용감은 그곳에 없다는 걸, 마지막 순간에 알게 되었다.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알게 된 건지도 모른다.

정말 그가 누각에 있다고 생각했다면, 절대 이불을 걷지 못했으리라. 얼마나 체통 없는 짓이란 말인가.

그때 맞은편에서 두 개의 등불이 떠올랐다. 누군가 다가오는 듯했지만 날이 어두운 탓에 형체가 잘 보이지 않았다. 꼭 등불만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거리가 좁혀지자 그자가 잰걸음으로 달려오더니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고,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어찌 나와 계십니까, 마마! 어서 돌아가십시오. 왕야께서 술에 취하셔서 마마를 애타게 찾으십니다.”

등불을 들고 온 이는 다름 아닌 학평관이었다. 하필 비바람이 이리도 몰아치는 밤에 왕비가 사라졌으니, 그는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더군다나 초왕이 술에 취해 있어 하마터면 목이 날아갈 뻔했다. 그 바람에 하인들은 오밤중에 야단법석을 떨며 왕비를 찾고 있었다. 학평관도 그중 한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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