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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70)화 (369/1,192)

제370화

그녀가 초조하게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 힘없이 말했다.

“…왕야도 참느라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입을 잘못 놀린 녹하가 황급히 수습에 나섰다.

“왕비 마마, 소인이 실언을 하였습니다. 부디 깊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천하에 우리 왕야처럼 일편단심인 분이 어디 있겠습니까? 떨어져 지내실 때도 늘 마마 생각뿐이셨습니다. 황보 아가씨가 제 발로 침소를 찾아와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으셨…….”

“제 발로 침소를 찾아왔다고요?”

녹하의 말을 끊은 백천범의 눈이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언제요?”

기홍이 녹하를 매섭게 노려보더니 서둘러 찬합을 열었다.

“지난 일입니다. 지금 꺼내 봤자 소용없는 일이랍니다. 왕비 마마, 과자 좀 드셔 보십시오. 유피 과자는 따뜻할 때 드셔야지, 식으면 맛이 없습니다.”

백천범이 고집스럽게 도리질을 했다.

“입맛 없어요.”

“입맛이 없으셔도 드셔야지요. 홑몸이 아니시지 않습니까. 아기씨가 배를 곯으시면 어찌한단 말입니까?”

여느 때처럼 아기로 설득하면, 백천범은 고집을 꺾곤 했다.

입덧이 심해진 터라, 지금은 음식을 입에 넣기만 해도 구토를 했다. 그 때문에 왕비가 음식을 먹을 땐 일종의 절차가 정해져 있었다. 시녀들은 그녀가 모두 게워 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깨끗한 물로 입을 헹구게 했다. 그녀의 얼굴을 꼼꼼히 닦아 주던 기홍이 조심스레 권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마마께서는 이만 쉬시지요. 빗소리가 들리니 금방 잠드실 수 있을 겁니다.”

백천범이 굳은 얼굴로 물었다.

“몇 시진이에요?”

“시간은 신경 쓰지 마시고 부디 푹 주무십시오. 그러면 몸도 한결 편안해지실 겁니다.”

그러나 백천범은 자리에 앉아 입술만 움직였다.

“몇 시진이에요?”

하는 수 없이 월규가 탁자 뒤로 돌아가 시간을 확인했다.

“해시(밤 9시~11시)입니다.”

백천범의 굳은 표정이 슬픔으로 무너지며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렇게 늦었는데도 오지 않으시다니, 절 잊은 게 아닐까요? 그 누각에서 무슨 비를 피하겠어요. 분명 자러 가신 거겠죠…….”

기홍과 시녀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왕비가 더 이상 생각하면 정말 큰일이 벌어질 듯했다. 속앓이를 하고 괴로워할뿐더러, 울음을 터뜨릴지도 몰랐다.

위 의원은 그런 모습도 신경증의 일환이라고 했다. 시간이 흘러야 나아질 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자연히 시녀들은 그녀를 깨지기 쉬운 유리구슬처럼 조심스레 돌보고 다독이기 바빴다.

기홍이 다시 백천범을 다독이려 했으나, 그녀가 탁자를 쾅 내리치며 언성을 높였다.

“이 시간까지 돌아올 생각도 하지 않다니! 혼쭐이 나고 싶어 근질근질한가 보죠? 안 되겠어요, 직접 데리러 가야겠어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문을 향해 걸어갔다.

기홍과 시녀들이 서둘러 그녀를 붙잡았다.

“왕비 마마, 제발 진정하십시오. 이렇게 비가 많이 오지 않습니까. 지금은 홑몸이 아니십니다. 부디 아기씨를 생각하시어요…….”

아이는 지금의 백천범에게 가장 큰 약점이다. 아이를 언급하니 그녀는 어렵게나마 안정을 되찾았지만, 여전히 온몸으로 포악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폭발해 날뛰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인격을 품은 듯했다.

하나는 조급하고 화를 잘 내는 인격, 하나는 슬프고 우울해하는 인격이었다. 그녀는 불시에 두 인격을 번갈아 드러내는 터라 시녀들은 늘 가슴을 졸이고 있었다.

“소인이 가겠습니다. 소인이 왕야를 반드시 모셔오겠습니다.”

보다 못한 기홍이 나섰다. 초왕이 돌아오지 않는 한 왕비의 화를 잠재울 길이 없을 듯했다.

그때, 녹하가 그녀를 가로막았다.

“아냐, 내가 갈게.”

녹하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왕비를 바라보다 덧붙였다.

“넌 왕비 마마 곁을 지켜 드려. 내가 얼른 다녀올 테니까.”

기홍이 붙잡을까 봐 녹하는 서둘러 달려 나갔다. 마음이 여린 기홍은 누각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하인들에게 발이 묶일 게 뻔했다.

기홍도 녹하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워낙 욱하는 성격이니 자칫하면 일을 더 크게 만들지도 몰랐다. 그러나 녹하가 어찌나 빠르게 뛰어가는지, 시녀들은 별수 없이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녹하가 떠나자 백천범은 다시 자리에 앉더니 하염없이 문만 바라보기 시작했다.

월규와 기홍이 다시 왕비를 달랬지만, 그녀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두 시녀는 초왕이 빨리 돌아오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녹하는 오늘의 상황이 아무래도 수상쩍었다. 초왕 곁에서 4년을 일했으니 그의 성격이나 천성은 훤히 꿰고 있었다. 지금껏 그의 마음은 애처로울 정도로 왕비에게 향하지 않았던가. 임신 초기 증세로 힘들어하는 왕비를 보살피기 위해 공무도 뒷전으로 미루고 곁을 지키는 초왕이었다. 그런 이가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니!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비가 어찌나 퍼붓는지, 복도에는 수막水幕이 생긴 듯했다. 거센 바람에 휘어진 빗줄기가 몸을 적셨다. 녹하는 벽에 바짝 붙어서 걸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흠뻑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어 으스스한 냉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등불도 바람에 떠밀려 정신없이 춤을 췄다. 요동치는 불씨가 구불거리는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니, 담이 큰 녹하마저 등골이 오싹해졌다. 그녀는 황급히 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불씨가 약해지더니 미약한 빛마저 어둠 속에 잠기고 말았다.

낮게 소리를 지른 그녀는 복도 기둥에 기대어 주변을 경계했다. 홀로 뛰쳐나온 게 후회막심한 순간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화절자火折子(불을 붙이는 휴대용 도구)를 지니고 있어 등불을 다시 켤 수 있었다. 그녀는 아예 등불을 품에 꼭 안고 누각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기름을 먹인 우산은 퍼붓는 비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그녀가 누각 밑에 도착했을 땐 온몸이 비에 쫄딱 젖다 못해, 물에 몸을 담그고 왔다고 해도 믿을 듯했다.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녹하는 밀려오는 피로를 느꼈다.

이런 꼴로 누각을 오르면 황보주아에게 비웃음을 사겠지. 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발을 옮겼다. 계단에 발을 디디는 순간, 예리한 빛을 내뿜는 두 자루의 검날이 그녀의 앞에서 번뜩였다.

녹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검은 옷을 입은 보초병들이 검을 겨누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보초병이 황보주아의 누각을 지켰단 말인가?

의아함이 솟구쳤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져 물을 때가 아니었다. 고작 보초병 두 명이 초왕을 모시는 시녀를 가로막을 수 있을까.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누군지 모르십니까? 비키십시오. 당장 올라가야 합니다.”

보초병은 물러서지 않은 채 예를 갖춰 말했다.

“아가씨, 저희를 난처하게 하지 말아 주십시오. 황보 아가씨께서는 침소에 드셨으니 볼일이 있거든 내일 오십시오.”

녹하가 모르는 척하며 물었다.

“당신들은 누구길래 이곳을 지키고 있습니까?”

“저희는 황보 아가씨를 호위하기 위해 군영에서 파견된 병사들입니다.”

군영에서 파견되었다는 말인즉슨, 초왕이 보냈다는 뜻이었다……. 황보주아를 호위할 병사를 보내는 일은 대수롭지 않았지만… 어째서 자꾸 석연찮은 느낌이 든단 말인가?

그녀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왕야께서는 안에 계십니까?”

두 병사가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게… 소인들은 왕야의 일은 모르옵니다.”

무슨 말인가? 계신다, 안 계신다도 아니고 모른다니.

“난 왕야를 모시는 녹하라고 합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으니 부디 양해해 주십시오.”

병사가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돌아가십시오. 저희도 직무를 다해야 합니다. 황보 아가씨께서 몸이 불편하시니 누구도 들이지 말라는 왕야의 명이 있었습니다.”

“그럼 하나만 알려 주십시오. 왕야께서 위에 계십니까?”

그때, 누각에서 누군가 내려오더니 등불로 그녀를 비췄다.

“아이고, 녹하 아가씨가 아닙니까. 어찌 이리 홀딱 젖으셨답니까? 옷부터 갈아입으시지 않고 남정네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다니요.”

화가 난 녹하는 얼른 두 팔로 몸을 가렸다. 얇은 여름옷이 빗물을 머금은 탓에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어느새 두 병사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대놓고 그녀를 훑어보고 있는 게 아닌가! 아무리 당차도 녹하는 출가 전인 아가씨였다. 노골적인 시선에 못 이겨 하마터면 발을 돌릴 뻔했다.

그러나 수치심보다도 미심쩍음이 녹하의 발을 굳게 붙들었다. 그녀는 당당히 허리를 펴고 서서 되물었다.

“왕야가 위에 계십니까? 왕야를 모시고 가야 합니다.”

밑으로 내려온 자는 황보주아의 시녀 은옥이었다. 그녀는 계단 위에 서서 경멸스러운 시선을 보냈다.

“늦은 시간에 어찌 왕야를 찾아 헤매십니까? 왕야께서는 어디든 원하는 곳에서 주무시는 법입니다. 왕야께서 아가씨의 분부를 따라야 한단 말입니까?”

녹하는 울컥하는 마음을 꾹 누르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몸이 편치 않으셔서 왕야를 찾으십니다.”

“제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군요.”

은옥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듣자니 왕비 마마께서 회임을 하신 후 제정신이 아니라고 들었습니다. 저희 아가씨께서도 왕비 마마를 찾아뵐 생각이지만, 편찮으셔서 갈 수 없었습니다. 오늘도 겨우 침수에 드셨으니 돌아가 주십시오. 소란을 피우신 걸 알면 왕야께서도 좋아하시진 않을 겁니다.”

대답할 틈도 없이 은옥의 말이 이어졌다.

“왕야께서도 힘드실 테지요. 왕비 마마께서 그렇게 들볶으시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싫은 내색 없이 정성을 다해 돌봐 주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리 시달리시니 왕야께서도 쉬고 싶으실 때가 있으시겠지요.

아가씨도 왕야께서 얼마나 고단하신지 알지 않습니까. 마음이 아프지도 않으십니까? 그만 돌아가세요. 내일 아침이면 왕야께서도 돌아가실 겁니다.”

초왕이 안에 있다고 확실히 말하진 않았지만, 말하는 내내 그런 의미를 담고 있었다.

녹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은옥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왕비는 아이를 가진 뒤로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해 버렸다. 말 한마디라도 잘못하면 불같이 성을 내거나 울적해하기 일쑤였다. 초왕으로서도 버거웠을 터. 민가의 사내들도 하기 힘든 일을 황실 친왕이 하고 있었으니…….

망설이던 그녀는 곧 정신을 차렸다. 설령 초왕이 다른 곳에서 기분을 풀어야 하는 상황이라 해도, 그 상대가 황보주아라면 받아들일 수 없었다.

녹하가 맞받아치려는데 등 뒤에서 냉랭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물러나게.”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단호한 어조가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두 보초병은 황급히 검을 거두고 허리를 숙여 예를 갖췄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은옥도 목청을 높였다.

“소인,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녹하가 뒤를 돌아보니 등불을 등진 왕비가 꼿꼿한 자세로 서 있었다. 다 젖은 소맷단과 축 처진 치맛자락, 가녀린 몸이 꼭 연약한 새싹처럼 보였다. 그녀의 뒤로 여전히 퍼붓는 비는 당장에라도 그녀를 쓰러트릴 듯 거세기만 했다. 빗속을 헤치고 온 탓에 안색이 창백하고 어딘가 처량해 보이는 눈매였지만, 동시에 얕볼 수 없는 기개가 풍겨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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