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9화
“그럼요.”
월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어머니도 큰언니를 낳으실 땐 매사에 조심하셨대요. 그 뒤론 출산을 많이 하셔서 대범하게 다니셨지만요. 제 여동생을 가지셨을 땐, 혼자 아이를 낳으러 집으로 가셨대요. 어머니 말로는 갈수록 수월하다고 하셨어요.”
백천범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니가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어?”
월규는 그제야 부끄러워진 듯 얼른 덧붙였다.
“저희 어머니는 조금 거칠게 말씀하시는 편이라서요.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도 유모 손에서 컸으니 거친 말은 많이 들었지. 오랜만에 그런 말을 들으니 정겹기만 한걸.”
그녀가 문득 탄식을 흘렸다.
“유모가 살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유모는 뭐든 다 알았어. 옆에 있으면 얼마나 든든했을까.”
어느새 그녀는 기운이 잔뜩 빠져 버렸다. 월규가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안 그래도 어르신께서 경험 많은 보모와 유모를 찾고 계신답니다. 사람을 구하면 마마께서도 마음이 놓이실 겁니다.”
“지금은 찾을 필요 없다고 했어. 안 그래도 예민한데 낯선 사람을 들이는 게 내키지 않아. 날도 선선해지고 몸도 편해지면 그때 찾는 게 좋을 것 같아.”
“마마의 말씀이 맞습니다. 사람이 늘면 아무래도 소란스럽겠지요. 왕야께서도 그 때문에 처음에는 동의하지 않으셨답니다.”
백천범이 호랑이 머리가 장식된 아기 신발을 만지작거리다 입술을 뗐다.
“월향이한테도 같은 걸로 한 켤레 만들어 줘.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을 테니까.”
그녀가 신발을 요리조리 살피며 말을 이었다.
“생각해 봤는데, 둘 다 남자아이를 낳으면 의형제, 여자아이를 낳으면 의자매를 맺게 하려고. 성별이 다른 아이를 낳으면 정혼을 맺게 할 거야.”
월규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정혼이라니요, 마마. 당치도 않습니다. 의형제나 의자매는 그렇다 쳐도, 정혼은 절대 안 될 일입니다. 아무리 마마와 월향이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아기씨는 묵용씨입니다. 천하에서 가장 존귀한 성씨이자 까마득히 높으신 분이 태어나는 거라고요.
무엇보다 왕야의 적자이니 왕야의 지위를 물려받으셔야지요. 어찌 시골 아이와 혼인을 맺겠습니까! 왕야께서 들으시면 불쾌해하실 테니 그런 말은 절대 하지 마십시오.”
백천범이 아쉬운 표정으로 따져 물었다.
“왜 꼭 문벌가와 혼인해야 하는데? 두 아이가 진심으로 사랑에 빠지면 어떡해? 비운의 한 쌍이 되는 거잖아.”
“세상이 다 그런 법입니다.”
월규가 단호하게 말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마께서 백 승상 댁 따님이 아니셨다면, 어찌 왕야와 혼인을 하셨겠습니까?”
그 말에 백천범은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그럼 의형제, 의자매만 맺으라고 해야지, 뭐. 성별이 같은 아이로 낳아야겠네.”
월규가 피식 웃고 말았다.
“아이의 성별이 어디 마음대로 되겠습니까?”
백천범은 월규와 수다를 떨면서도 자꾸만 문 쪽을 힐끔거렸다. 매일 그녀를 정성스레 돌봐 주던 그와 갑자기 떨어져 있으니 어색하고 미묘한 기분이었다. 괜스레 불안한 마음까지 들어, 그가 조금이라도 빨리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저녁 식사를 할 때가 되어도 묵용감은 돌아오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이 와서 묵용감의 말을 전했다. 아직 태자와 논의가 끝나지 않아 그쪽에서 저녁 식사를 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백천범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없으니 밥을 먹고 싶지도 않았고, 낯빛은 잔뜩 굳어 도자기 인형을 연상케 했다. 기홍과 녹하, 월규가 달라붙어 왕비의 기분을 풀어 주려 애를 썼고, 온갖 방법을 동원하여 겨우 죽 몇 숟갈과 탕을 먹일 수 있었다.
창문 밖을 내다보니 저 멀리 하늘에서 불그스름한 빛이 옅게 퍼지고 있었다. 이내 침대를 둘러싼 장막이 펄럭일 정도로 거센 바람이 몰아치며 백천범의 머리칼도 흩날렸다.
“아이고, 마마. 창가에 서 계시면 안 됩니다.”
월규가 기겁하며 그녀를 의자에 끌어 앉혔다.
“바람 좀 쐬는 게 뭐 어때서. 겨울도 아닌걸.”
그녀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너무 더워서 바람 좀 쐬고 싶었단 말이야.”
“홑몸일 땐 괜찮아도 배 속에 아기씨가 계시지 않습니까, 뭐든지 조심하셔야 합니다.”
백천범이 푹신한 의자에 몸을 깊게 파묻으며 말했다.
“몇 시진이야?”
월규가 경루更漏를 바라보았다.
“술시(오후 7시~9시)입니다.”
“왜 아직도 안 오시는 거지?”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또 술을 드시는 걸까.”
“아직 이른 시간 아닙니까? 왕야께서 한동안 공무를 보지 않으셔서 나누실 말씀이 많으시겠지요.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금방 오실 겁니다.”
백천범은 그 말을 믿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명상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잠시 뒤, 방으로 들어온 녹하가 호들갑을 떨었다.
“바람이 엄청나게 부네. 곧 비가 내리겠는데?”
월규가 선선히 답했다.
“비가 오면 다행이지요. 성 밖 곳곳이 가뭄으로 메말랐다던데, 비가 온다니 반가운 소식입니다.”
월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창밖이 번쩍이더니 굉음이 머리 위에서 울렸다. 갑작스러운 천둥소리에 백천범은 몸을 흠칫 떨었다. 녹하가 서둘러 그녀를 감싸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놀라지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그저 천둥이 쳤을 뿐입니다.”
백천범이 쿵쿵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물었다.
“비가 오는 거예요?”
“천둥이 쳤으니 곧 쏟아지겠지요.”
월규가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릴 거면 빨리 좀 내리지. 그래야 마음이라도 편해질 텐데.”
그녀의 말 때문인지 곧이어 빗줄기가 쏟아졌다. 장대처럼 굵직한 빗방울이 처마와 창틀, 불투명한 유리를 거세게 때리며 흩어졌다. 말이 떼를 지어 달려오는 듯 잡음이 끊이지 않아 소란스러울 지경이었다.
창문과 문틈 사이로 들어온 바람이 온 방을 싸늘하게 훑고 지나갔다. 월규와 녹하가 서둘러 창문을 닫고 바람에 날린 헝겊과 종잇조각을 주워들었다.
그때 백천범이 무언가 생각난 듯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왕야께 우산을 가져다드려야겠다.”
월규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태자 전하께 우산이 없을까 봐서요? 같은 관저에 계시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마마.”
반면 백천범의 마음을 읽은 녹하가 월규에게 눈짓을 보냈다.
“시간도 늦었고 비도 많이 오니까 왕야를 모셔올 사람을 보내는 게 좋겠어.”
월규는 그제야 백천범의 마음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숙였다.
“예, 소인이 곧바로 보내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초왕을 모시러 갔던 하인이 돌아왔다. 문 앞에 선 하인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왕야께서는… 황보 아가씨를 만나러 누각에 가셨답니다.”
녹하와 월규는 무의식적으로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정작 그녀의 얼굴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오히려 옅은 미소까지 띠고 있었다.
“안 그래도 병문안을 권해 드렸는데, 지금 가셨구나.”
한껏 예민해진 그녀를 시녀들도 잘 알고 있었다. 백천범의 안색은 멀쩡해 보였지만, 시녀들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그들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맞습니다. 왕비 마마께서 그날 왕야께 가라고 하지 않으셨다면 절대 가지 않으셨을 겁니다.”
“소인이 황보 아가씨를 싫어하긴 하지만, 정말로 병세가 좋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돌아오시는 길에 잠시 들르셨나 봅니다. 짬이 나신다면 마땅히 가 보셔야지요. 왕야께서 인정 없는 분이라고 소문이라도 나면 안 될 일입니다.”
“아가씨의 상태만 보시고 금방 돌아오실 겁니다.”
백천범은 입을 꾹 다문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축 늘어져 있던 몸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월규가 베개를 가져와 그녀의 등 뒤에 놓아 주었다.
“왕비 마마, 여기 기대십시오. 좀 더 편하실 겁니다.”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귀가 아프도록 내리는 빗소리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사이로 들려올 다른 소리를 기다리듯이.
그때, 밖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군가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백천범의 살짝 커진 눈에 찬합을 들고 온 기홍이 비쳤다.
“찬합에 빗물이 들어갈까 봐 걱정돼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기홍이 말을 멈추고 녹하를 바라보았다.
녹하는 별 수 없다는 표정을 보였지만 이내 활짝 웃었다.
“오늘은 뭘 만든 거야?”
“그러게요, 고소한 향이 엄청납니다.”
월규도 밝게 맞장구를 쳤다.
“새로운 요리를 만드셨습니까?”
“유피乳皮(우유에서 얻는 지방질로 버터 등의 원료로 사용됨)로 만든 과자야.”
백천범의 저조한 기분을 눈치챈 기홍이 급히 말했다.
“왕비 마마, 한번 맛보십시오. 왕야께서 주신 ‘궁중 요리 모음집’을 보고 만들었습니다. 제대로 맛이 나는지 한번 드셔 보십시오.”
하지만 백천범은 유피보다는 묵용감의 이름에 반응했다. 그녀가 슬픈 탄식을 내뱉었다.
“왕야께서 아직도 안 오시네요.”
기홍은 그제야 초왕이 원인임을 알아차렸다. 위 의원은 왕비의 임신 초기 증세가 제법 심각하니, 혼자 고민에 빠지지 않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했다. 깊은 고민에 빠져 있다가 우울감을 느끼기라도 하면 큰일이 아닌가.
이제 막 왔던 터라, 기홍이 월규를 다그쳤다.
“어서 왕야를 모시러 갈 사람을 보내! 마마께서 걱정하시잖아.”
그러나 월규 대신 백천범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왕야는 제가 걱정하는 걸 모르시나 봐요. 주아 언니를 보러 누각에 가셨대요.”
월규가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마마께서 가라고 하셔서 가시지 않았습니까. 그날 소인이 옆에서 들었습니다. 왕야께 책임을 떠넘기시면 안 됩니다.”
기홍은 그제야 정황을 깨닫고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마마, 황보 아가씨가 정말 많이 아프십니다. 왕야께서도 응당 가 보셔야지요.”
기홍이 따스한 눈빛을 보냈다.
“우리 마마께서는 도량이 넓은 분이 아니십니까? 이런 일에 신경 쓰시면 남들의 비웃음을 삽니다.”
백천범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요. 제가 먼저 가 보라고 했어요. 그러니 어찌 신경 쓰인다고 할 수 있겠어요.”
“왕야께서는 인정이 많지 않으십니까.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분인데 몸이 좋지 않다니 한 번은 가 보셔야지요. 가지 않으셨다가 시답잖은 말이 나오면 왕야께 폐가 됩니다.”
녹하가 칠흑같이 어두운 밤하늘을 힐끗 내다보았다.
“비가 너무 많이 옵니다. 그곳에서 잠시 비를 피하시겠지요. 술도 드셨을 테니 빗길을 걷는 게 쉽지 않을 겁니다. 비가 잦아드는 즉시 돌아오시지 않겠습니까. 마마, 부디 마음 놓으십시오. 황보 아가씨는 병이 난 상태라 뭘 할 수도 없을…….”
기홍이 눈을 부릅뜨며 녹하를 노려보았다. 하필 그런 말을 위로랍시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안 그래도 왕비는 최근 들어 부쩍 불안정해진 상태였다. 녹하의 말에 괜한 오해를 할까 걱정이었다.
기홍이 백천범을 바라보니 역시나 안색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