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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68)화 (367/1,192)

제368화

그간 천하에 두려운 게 없었던 사씨 집안 아가씨는 개울에 서서 울부짖고 말았다.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데 사내에게 밀쳐져 흙탕물을 뒤집어쓰다니! 체면이 바닥에 떨어지다 못해 처참하게 구겨져 버렸다. 더구나 그 사내는 책임을 지기는커녕 그녀를 내버려 두고 가지 않았는가. 이제 무슨 낯으로 집에 돌아갈까, 여기에서 울다 죽는 편이 나았다.

사장풍은 목놓아 우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고 사앵앵을 돌아보았다. 서럽게 우는 모습이 꽤 의외였다. 늘 강하게 나오던 이가 저리 울 수 있다니…….

하는 수 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도 무정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어찌 그리 우십니까? 모르는 이가 보면 제가 어찌 한 줄 알겠습니다.”

사앵앵이 흐느끼며 소리쳤다.

“나, 날, 어찌하지, 않았다고요? 하, 이렇게, 절, 업신여겼, 으면서. 흑, 허어엉…….”

비탈길 위에 있던 사내들은 자신들의 신분도 잊고 모진 말을 내뱉었다. 약한 이를 돕는 게 인간의 천성이 아닌가.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습니까? 저런 성품으로 어찌 장군이 되었답니까!”

“아무리 전투를 잘해도 인품이 모자라면 신망을 얻지 못하니, 상관으로 모실 수 없지요!”

“이런 사내라면 없는 게 낫습니다. 사씨 아가씨는 어딜 가든 더 좋은 사내를 찾을 수 있지 않습니까!”

“…….”

사앵앵이 목 놓아 우는 소리에 그들의 말이 잘 들리지 않았지만, 듣기 좋은 내용이 아니라는 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허리를 숙이고 최대한 진지하게 말했다.

“제가 올려드리겠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올라온 뒤에 저와 같이합시다.”

그의 입에서 좀처럼 듣기 힘든 말이 튀어나왔다. 분명 ‘같이’라고 했다! 우는 와중에도 사앵앵의 귀에 그 한마디만큼은 똑똑히 들려왔다. 그녀를 감싼 슬픔이 어느새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다만 그에게 너무 빨리 대꾸하고 싶지 않아, 사앵앵은 입을 꾹 다물었다.

“어서요. 제 손을 잡으십시오.”

그가 참을성을 갖고 설명했다.

“울기만 해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사앵앵은 천천히 눈물을 닦았다. 손에 흙이 묻은 탓에 이젠 얼굴까지 얼룩 고양이처럼 꼬질꼬질해졌다. 그러나 사장풍은 그녀를 마주하자 갑작스레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동시에 황홀한 감정이 밀려왔다. 그는 그녀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빤히 내려다보았다.

사앵앵은 그의 시선에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자신의 얼굴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물었다.

“제 얼굴에 뭐, 뭐라도 묻었나요?”

“아뇨, 아주 예쁩니다.”

그는 동문서답을 내뱉더니 개울로 뛰어내려 그녀에게 다가왔다.

깜짝 놀란 사앵앵이 물었다.

“왜… 내려오신 거예요?”

그는 말 없이 그녀를 안아들고 다시 길 위로 뛰어올랐다. 높지 않은 언덕이라지만 그의 움직임이 더없이 가뿐했다. 여인을 안은 채 가볍게 움직일 수 있는 경사가 아님에도 매끄러운 동작에 실로 감탄이 나왔다. 비탈길 위에 있던 이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사장풍은 그녀를 내려놓지 않고 곧장 앞으로 향했다. 얼이 빠진 사앵앵은 그의 품에 안긴 채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그녀를 조금… 당황스럽지만 가슴을 떨리게 했다.

구경꾼들은 점점 멀어지는 그들을 보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내일 사장님께 축하 인사를 드려야겠어!”

“하하, 축하주 좀 달라고 해야겠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걷잡을 수 없는 수준에 달하면 환각에 빠지기도 하는 법이다. 지금 사장풍의 상태가 그랬다. 그는 품에 백천범을 안았다고 믿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초왕도, 아이도 없이 오직 둘이서, 나아가고 있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그들만의 행복이 기다리는 먼 곳으로…….

한편 눈이 부셔서 고개를 들 수 없던 사앵앵이 옷소매로 얼굴을 가렸다.

“눈이 부시지 않습니까?”

사장풍은 그녀를 가슴 쪽으로 더 끌어안고 팔로 햇빛을 가려 주었다.

처음 보는 그의 다정함이었다. 사앵앵은 문득 두려움을 느꼈다. 그녀가 덜덜 떨며 말했다.

“어, 어서 내려주세요.”

“이대로 안고 있고 싶습니다.”

그가 상냥하게 말했다.

“도착하면 내려 드리겠습니다.”

사앵앵은 이제 온몸에 닭살이 돋을 지경이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데도 그녀는 밀려드는 한기를 느끼며 몸을 떨었다.

“사, 사 장군님! 대체 이게 무슨…….”

“쉿. 아무 말도 마세요.”

그가 처음 보는 다정한 얼굴로 웃었다.

“꿈이라면 절 깨우지 말아 주십시오.”

사앵앵이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

“사, 사 장군님. 절 좋아하셨던 거예요?”

“제가 당신 때문에 이런 꼴이 되었는데, 제 마음을 의심하십니까?”

사앵앵이 결국 부끄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수줍게 웃었다.

“평소에는 어찌 그리 냉정하게 대하셨나요? 직접 찾아오신 적도 없으셨잖아요.”

“늘 찾아가고 싶었습니다. 다만 저 때문에 번거로우실까 봐 갈 수 없었습니다.”

뜻밖의 말에 사앵앵은 깜짝 놀라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언제든 찾아오셔요.”

사장풍이 별안간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그분과는 견주지 못하는군요. 제 목숨은 어찌 되어도 좋지만, 당신에게 피해를 줄 순 없습니다.”

사앵앵은 천천히 그의 말을 곱씹다 입을 열었다.

“그분이라니요? 제게 피해를 준다니, 무슨 말이에요?”

그는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의 얼굴에 홀로 비를 맞는 이처럼 처량한 빛이 스미고 있었다.

“그저 후회될 뿐입니다. 우두산에서 그대를 돌려보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우두산? 우두산이라니? 갑자기 웬 우두산이란 말인가?

이쯤 되면 그가 사앵앵을 다른 여인으로 착각하고 있음을 모를 수가 없었다. 사앵앵은 찬물을 끼얹은 듯 마음이 식어 버렸다. 그의 마음속엔 이미 다른 여인이 있었다. 어쩐지 그녀를 절대 받아주지 않더라니!

“사 장군!”

그녀가 날카롭게 소리쳤다.

“제가 누군지 똑똑히 보십시오!”

사장풍은 깜짝 놀란 듯 눈을 깜박이더니, 이내 흐린 눈동자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찌… 얼굴이 좋아지셨습니다, 수척해지셨다고 들었는데…….”

그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대로 떨어진 사앵앵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한순간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통증이 밀려왔다. 한바탕 욕을 퍼부어 주려는데, 눈앞의 사내가 뒤로 고꾸라지는 게 아닌가.

그녀는 화를 낼 겨를도 없이 황급히 사장풍을 불렀다.

“사 장군, 사 장군!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대체……!”

허겁지겁 일어난 사앵앵이 그의 얼굴을 마구 때렸다.

“정신 차리세요. 사 장군, 정신 좀 차려 보십시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아무도 없습니까? 제발 살려 주십시오……! 흑, 으흑…….”

그녀의 생각대로라면 사장풍은 더위를 먹은 게 확실했다. 그동안 매일 시원한 차를 가져다주었는데도 이리 더위를 먹는단 말인가?

뜨거운 날씨에 길을 지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길 가장자리에 햇빛을 피할 수 있는 나무 그늘이 있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사장풍을 그늘로 옮겼다.

사앵앵은 지쳐 숨을 헐떡이면서도 할 일을 잊지 않았다. 그녀는 보통의 여인과 다르게 자라나지 않았던가. 그녀는 소맷단으로 부채질을 해 주며 있는 힘껏 그의 얼굴을 꼬집었다.

“사 장군, 일어나 보십시오. 이보세요. 일어나세요! 이렇게 허무히 죽으면 마음에 품은 여인을 어찌 찾겠습니까…….”

서투르기 짝이 없는 방법이었지만, 다행히 사장풍에게서 긴 숨이 흘러나왔다. 눈도 뜨지 못한 그가 희미하게 웅얼거렸다.

“물, 물 좀…….”

“알겠어요. 기다려요.”

근처 개울가로 뛰어간 사앵앵은 물을 담을 그릇이 없음을 깨닫고 옷소매를 적셔 재빨리 돌아왔다. 그녀가 그의 입가에 젖은 옷소매를 가져다 댔다.

“자, 물이에요. 어서 입 벌려요.”

차가운 기운에 사장풍은 본능적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녀가 천천히 소매를 비틀었다. 후두둑 떨어지는 물방울이 마른 입술 사이로 흘러 들어갔다.

잔뜩 찡그렸던 그의 미간이 조금씩 펴지며,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마침내 맑은 눈동자를 드러낸 그가 눈앞에 있는 그녀를 보고 놀란 표정을 보였다.

“아가씨가 어찌 이곳에?”

사앵앵이 언짢음을 역력하게 내비치며 대꾸했다.

“마음에 품은 여인이 아니라 실망하셨나요?”

사장풍의 안색이 삽시간에 잿빛으로 물들었다. 몸을 일으켜 세운 그의 눈빛이 한없이 깊고 서늘했다.

“제가 무슨 말을 하였습니까.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겁니까?”

힘없는 양 같던 그가 어느새 잔혹한 이리 같은 모습을 보인다. 사앵앵은 자신도 모르게 땅에 주저앉았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이 꺾인 게 아니다. 입술을 앙다문 그녀가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왜요, 제 목을 쳐서 입이라도 막으시려고요?”

* * *

월규가 아기 옷을 만드는 동안, 백천범은 유심히 바라보다 옷감을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작은 옷을 어떻게 입는 거야?”

월규가 웃으며 말했다.

“아기는 원래 이렇게 작습니다. 왕비 마마는 갓 태어난 아기를 보신 적 없으시죠?”

백 승상의 저택에서는 그녀가 가장 어렸기 때문에 단 한 번도 갓난아이를 본 적이 없었다. 다만 백 승상의 여섯째 부인이 아이를 가지긴 했었다. 사랑받지 못하고 자라난 백천범이지만, 그녀는 언젠가 태어날 제 동생에게 사랑을 듬뿍 주었다.

아이가 태어날 날만 손꼽아 기다렸건만, 안타깝게도 아이는 유산되고 말았다. 옛일을 떠올리다 마음이 서늘해진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배를 감쌌다. 임신한 뒤로 그녀는 작은 일에도 크게 놀라곤 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해 보니 바보 같은 걱정이었다. 백 승상 저택의 후원과 이곳이 비교나 될 수 있을까. 묵용감이 곁에 있는 한 그녀와 아이에겐 어떤 문제도 생기지 않으리라.

그녀의 안색을 알아차린 월규가 물었다.

“마마, 몸이 좋지 않으십니까?”

그녀가 고개를 내젓고는 탁자 위에 엎드렸다.

“아니, 왕야는?”

“마마께서 주무시는 내내 마마의 곁을 지키고 계셨습니다. 한데 방금 태자 전하께서 급히 부르셔서 하는 수 없이 나가셨지요.”

월규가 조심스레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덧붙였다.

“마마, 괜찮으시지요?”

“내가 그런 것도 이해 못 할까 봐?”

백천범이 월규를 흘겨보았다.

“가장들은 원래 밖에서 바쁘게 일해야지. 늘 부인 옆에만 있으면 어떻게 큰일을 하겠어?”

월규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왕야께서 마마와 복중에 계신 아기씨보다 더 큰 일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직 두 분을 위해 시중을 들겠다고 하셨어요.”

백천범은 코끝이 찡했지만, 괜스레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왕야도 참, 잔소리를 어찌나 하시는지 귀가 따가울 지경이야. 첫 아이라 왕야께서도 긴장되시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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