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7화
묵용감은 그제야 상황을 파악하고 황급히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이미 그녀의 입꼬리가 축 처져 있었다. 결국 그녀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왕야께서 아이를 안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역시 아이는 왕야께 걸림돌이 된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초왕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어찌 또 그리 흘러간단 말인가. 그는 진심으로 그녀가 안타깝고 걱정되었을 뿐이다.
“아니오, 그런 게 아니오. 아이가 생겨 정말 좋소. 믿어 주시오.”
그가 그녀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며 애원했다.
“천범, 제발 이러지 마시오. 다른 이가 보고 있지 않소.”
동정이 담긴 눈빛으로 초왕을 바라보던 위중청이 목청을 가다듬었다.
“왕비 마마, 천하에 자식을 아끼지 않는 부모는 없습니다. 왕야께서는 괴로워하시는 마마가 안쓰러워 그리 말씀하신 겁니다.”
백천범이 희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자식을 아끼지 않는 아버지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아직도 어린 시절이 눈앞에 선연하거늘, 어찌 위중청의 말에 동의할 수 있을까. 그녀의 목소리가 울적하게 가라앉았다. 그렇다면 백 승상은 그녀의 아버지가 아니란 말인가. 그는 그녀를 보살피기는커녕 후원에 방치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백천범은 늘 그의 삶에서 희미한 얼룩과도 같았다.
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묵용감이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자와 날 비교하지 말아 주시오. 그자를 어찌 그대의 아버지라 부를까. 난 어머니가 자식 덕에 대접을 받는 게 아니라 어머니가 있어 자식이 귀하게 대접받는다고 생각한다오. 다른 이도 아니고, 그대가 가진 아기를 내가 어찌 싫어하겠소? 내게도 귀하디귀한 아이란 말이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위중청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초왕비의 증상은 오래된 근원이 있었다. 감정적인 변화는 마음의 병에서 비롯되지 않던가. 평소에는 마음속 깊은 곳에 잘 숨겨 두고 티를 내지 않았다고 해도, 지금은 달랐다. 아이를 가진 후엔 감정이 불안정해지고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이런 상황이 오기 쉬웠다.
그가 그날 묵용감에게 한 이야기는 단순히 겁을 주려는 게 아니었다. 임부가 가족들의 관심과 제대로 된 보살핌을 받지 못하면 감정의 변화는 더욱더 심해지는 법이었다. 그러면 자연히 사고가 날 확률도 커질 수밖에.
그러나 위중청은 말을 아꼈다. 초왕비의 증상은 절대 가볍지 않았지만, 그녀의 곁에는 초왕이 있었다. 목숨보다도 그녀를 우선하는 이가 지키고 있으니, 잘못될 일은 절대 없을 터였다.
* * *
오수진에도 초왕비의 소식이 흘러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경사를 맞이했다. 집마다 초롱을 달고 오색 천으로 마을을 단장하며 왕비의 순산을 기원했다. 웃음이 끊이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유일하게 얼굴이 어두운 이가 있었다. 사장풍이었다.
사장풍은 연병장에서 왕비의 소식을 접했다. 머리 위로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었지만, 그는 차디찬 얼음 동굴에 갇혀 버린 기분이었다. 그는 완전히 넋이 나간 듯 사앵앵의 자그마한 입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벌써 두 달이 되었대요. 향이 아씨네 아기보다 더 큰 셈이네요! 지난번에 오셨을 때 그런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더니. 기운이 없고 수척해지시긴 했지만, 그런 일일 줄은 정말 생각도 못 했어요…….
생각해 보면 참 재미있는 일이죠. 그렇게 멋있던 범이가 별안간 왕비 마마로 나타나더니, 점점 더 예뻐지셨잖아요. 게다가 벌써 어머니가 된다니, 신기할 따름이에요. 마마가 저보다 생일도 느리니, 어린 아가씨잖아요.
아무튼, 왕야께서 얼마나 잘해 주시는지 소문이 끊이지 않아요. 이제는 공무도 보지 않으시고 왕비 마마만 돌봐 주신대요. 심지어 마마가 한 걸음도 걷지도 못하게 하시고 어디든 안아서 데려다주신다고 들었어요.
다만 마마께서 음식을 다 게워내서 예전보다 수척해지셨대요. 어휴, 이러다간 아이에게도 마마께도 좋지 않을 거라고 향이 아씨의 걱정이 태산이에요……. 장군님, 제 말 듣고 계신 거예요?”
사장풍의 표정을 알아차린 그녀가 불안한 듯 미간을 좁혔다.
“왜 그러세요?”
그녀가 그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사 장군님, 왜 그러세요?”
사앵앵의 목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외치는 듯 그의 귓가에서 뭉개져 버렸지만, 아이를 가졌다는 말만큼은 확실하게 알아들었다. 오히려 한 글자 한 글자가 그의 머리를 내리치는 듯했다. 그녀가 벌써 아이를 갖다니…….
저절로 분노가 치솟았다. 묵용감, 이 늙고 뻔뻔한 놈! 어찌 어린 여인이 아이를 갖게 할 수 있단 말인가…….
그의 안에서 분노가 휘몰아쳤지만, 겉으로는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던 사앵앵이 그를 툭 쳤다.
“사 장군님, 왜 그러시는 거예요? 무슨 생각을 하시길래 아무 말이 없으세요. 제 말 듣긴 하셨어요?”
그의 눈망울이 마침내 움직였지만, 여전히 흐리멍덩한 빛을 띠었다.
“뭐라 하였습니까?”
“왕비 마마께 좋은 소식이 있다고요.”
“아, 좋은 소식.”
어딘가 석연찮은 대답에 사앵앵이 의중을 물었다.
“이만한 경사가 어딨겠어요. 장군님은 기쁘지 않으세요?”
“…기쁩니다.”
사앵앵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그를 살폈다.
“안색이 이렇게 나쁜데, 정말 기쁘시단 말이에요?”
그는 대꾸하지 않고 그대로 작은 비탈길을 따라 내려갔다. 연병장에 있던 사내들이 하나둘 동작을 멈추고 멀어지는 그를 지켜보았다. 훈련 중인데 어딜 간단 말인가? 아무런 언질도 없이.
사앵앵이 발을 동동 구르며 그의 뒤를 쫓았다.
“사 장군님, 거기 서요. 사 장군님… 이봐요, 사 장군! 거기 서라니까!”
뒤에서 아무리 불러도 사장풍은 앞으로 나아갈 뿐이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빠르게 걷는 모습에서 용맹스러운 기백마저 느껴졌다.
마음 같아선 사앵앵도 그를 뒤쫓고 싶지 않았다. 그녀도 고집과 자존심이 있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사장풍에게만은 눈길을 거둘 수가 없어, 그녀는 한바탕 욕을 퍼부으며 뒤를 쫓았다.
마침내 구불구불한 논두렁 부근에서 그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의 옷자락을 낚아챈 그녀가 식식거리며 말했다.
“서라는 말 못 들었어요?”
어느새 냉정한 모습을 되찾은 사장풍이 그녀의 손을 건조하게 내려다보았다.
“놓으십시오.”
“싫어요. 말해 봐요. 왜 멈추지 않으셨어요?”
“내가 왜 멈춰야 합니까? 그쪽이 뭐라고, 제가 그쪽 말을 들어야 하냔 말입니까.”
그는 해소할 수 없는 원망을 그녀에게 쏟아부었다.
난데없는 반응에 사앵앵은 몸통이 들썩거릴 만큼 화가 났지만, 옷자락을 더욱더 세게 움켜쥐었다.
“제가 누구든 사람이 부르면 대꾸는 해 줘야죠. 그게 예의잖아요!”
그녀와 예의를 논할 여유가 없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머리끝까지 잠길 듯 깊은 수렁에 빠진 기분이었다. 사앵앵은 그를 구하기는커녕 수렁 아래에서 발목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는 그저 조용한 곳을 찾아 혼자 있고 싶었다.
“놓으십시오.”
그러나 놓아줄 사앵앵이 아니었다.
“싫어요.”
“놓으십시오. 안 놓으면 더는 봐주지 않겠습니다.”
“안 놔요. 어떻게 하실 건데요?”
두 사람은 독이 오른 뱀처럼 서로를 노려보았다. 비탈길 위에서 지켜보던 사내들은 어느새 의견이 분분했다.
“이제 옷까지 잡아당기는 걸 보니 진전이 있는 모양이네.”
“이봐, 사 장군님 표정 안 보여? 아무튼, 사씨 아가씨도 대단해. 절대 포기하지 않을 기세라니까. 두고 봐. 사 장군님도 결국엔 아가씨한테 마음을 열게 될 거야.”
“역시 그 아버지에 그 딸 아니겠어. 사 사장님도 그 기세로 집안을 일으켜 세웠잖아. 아가씨는 사장님보다 낫지 뭐, 그 기세를 사내한테 쓰고 있으니. 하하…….”
“사 장군님도 참, 아가씨가 부족한 게 어디 있다고. 얼굴도 예뻐, 능력도 좋아, 집안도 탄탄하니 얼마나 좋은 일이야. 왜 저렇게 버티시는 거람?”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닐까? 고향에 정혼자가 있다거나. 그럼 정혼자한테 미안해서 그럴 수도 있지.”
“정혼자가 있든 없든 초왕야께서 정해 주신 혼사잖아. 정혼자는 첩이 되는 수밖에 없지.”
“…….”
그들을 향한 수많은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사장풍과 사앵앵은 서로를 노려보기 바빴다.
결국 사장풍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놓지 않으시겠다?”
사앵앵은 한 발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는 오늘 사장풍과 끝장을 볼 작정이었다.
“네. 장군님이 먼저 사과… 앗!”
그 순간,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녀는 길옆으로 떨어졌다. 하필 그 자리에 얕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다친 곳은 없었지만 옷과 머리가 젖어 버렸으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이런 수모가 처음이었던 사앵앵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사장풍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입술을 달싹이다 겨우 말을 내뱉었다.
“…나도 더 이상 못하겠어요. 헤어져요!”
사장풍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헤어지자니, 잘된 적이나 있었단 말인가?
반면 비탈길 위의 사내들은 멍하니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어찌 여인을 저리 대한단 말인가. 사장풍은 말도 안 되는 무례를 저질렀다. 다만 그에게 직접 따져 물을 수는 없으니, 사내들은 나무 밑에 서서 목청을 높였다.
“사 장군님, 너무하십니다. 어찌 여인을 이리 홀대하십니까!”
“맞습니다. 사내대장부가 여인을 이리 대하시다니요,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어서 아가씨를 올려 주십시오. 물속에 계시게 둘 겁니까!”
“아가씨를 집에 데려다주십시오. 장군님이 백번 잘못하셨습니다. 어서 사과하십시오……!”
자신을 질책하는 소리가 꽤 불편했지만, 사장풍은 냉정을 되찾았다. 이 일은 명백히 그의 잘못이었다. 아무리 화가 났어도 여인에게 손을 쓰면 안 되었다. 설령 이 여인이 간혹 맹렬히 돌진해 온다 한들, 자신은 지켜야 할 선이 있었다.
그가 조금 누그러진 태도로 손을 뻗었다.
“제 손 잡으십시오.”
사앵앵은 목을 꼿꼿이 세우고 그를 노려보았다.
“절 밀치셨으면서 이제는 올려주겠다고요? 공연히 힘만 버리셨네요!”
“우선 올라오십시오. 얘기는 그다음에 합시다.”
그는 따스한 말을 몇 마디 건넬 생각이었지만, 잔뜩 화가 난 그녀의 얼굴 앞에서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뇨, 장군님께 폐를 끼칠 수야 없죠.”
사앵앵은 팔짱을 끼며 코웃음을 쳤다.
“가십시오. 혼자 올라갈 수 있습니다. 다만, 오늘 일은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장군님이 연약한 여인에게 어찌 손을 쓰셨는지, 똑똑히 기억할 겁니다.”
사장풍은 그녀의 당당하고 기운이 넘치는 모습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제 입으로 ‘연약한 여인’이라니.
“알겠습니다. 그럼 혼자 올라오십시오. 이만 가겠습니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발걸음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사앵앵은 그가 정말 가 버릴 줄은 몰랐다. 서늘한 손이 목을 틀어쥔 듯 숨이 막혔다.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라, 눈앞이 흐릿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