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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66)화 (365/1,192)

제366화

직접 오진 못 할망정 시녀를 보내다니! 초왕비의 콧대가 어느새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 황보주아는 치가 떨릴 만큼 증오심이 솟구쳤지만, 얼굴에는 오랫동안 익혀 온 미소를 띠었다. 지금 초왕의 총애를 받는 사람은 그녀가 아니라 백천범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되었다. 강하게 맞서다간 묵용감이 그녀를 내쫓을지도 몰랐다. 아니, 내쫓고도 남을 터였다.

그녀가 기침을 내뱉으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큰 병도 아닌데, 아가씨를 보내시다니요.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기홍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왕비 마마께서 몸이 불편하지만 않으셨어도 직접 왔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아가씨께서 다 나으시면 한번 꼭 놀러 와 이야기를 나누자고도 하셨습니다.”

황보주아가 이를 악물며 간신히 미소를 지었다.

“축하 인사도 전해 드리지 못하였네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울적하게 지내시더니,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지금은 아주 기뻐하시겠지요.”

“그럼요.”

기홍이 선뜻 대답했다.

“그간 무척 우울해하셔서 저희도 가슴을 졸였는데, 이렇게 기쁜 소식이 있으니 한시름 놓았습니다. 지금 후원은 새해가 다시 온 것처럼 떠들썩한 분위기입니다. 학평관 어르신께서 경사를 기념하기 위해 복도에 붉은 등불까지 걸어놓으셨지요.”

울화통이 터질 것만 같았지만, 황보주아는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왕야께서도 기뻐하시지요?”

“물론입니다.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에 놀라셨는지 그리 티는 나지 않았지만, 어르신 말씀으로는 내색을 잘 안 하실 뿐, 속으로는 매우 기뻐하신다고 하십니다.”

기쁜 내색을 하지 않는다? 황보주아는 그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왠지 이유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가 되는데 사내로서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설마 아이의 핏줄을 의심하기라도 하는 걸까?

그녀가 곧 담담히 웃으며 말했다.

“셋째 오라버니는 그런 분이시지요. 아무리 기쁜 일이 생겨도 감정을 억누르시니까요. 정말 잘되었습니다. 아내도 맞이하시고 아이까지 생기셨으니 모든 걸 갖추지 않았습니까.”

말을 마친 그녀가 입을 가리고 작게 기침을 했다.

“정말로 제가 다 기쁩니다.”

황보주아의 상태가 나빠 보이기에, 기홍은 오래 머무르지 않고 금방 물러났다.

기홍이 놓고 간 죽을 멍하니 바라보던 황보주아가 별안간 죽 그릇을 있는 힘껏 내동댕이쳤다. 곱게 으깨진 녹두가 사방팔방으로 튀며 힘없이 굴러다녔다. 그녀가 가슴을 들썩이며 소리쳤다.

“뭐 이딴 게!”

아이를 가졌다고 유세라도 부린단 말인가? 몸이 불편해 계단을 오르지 못한다니, 그녀는 뭐가 된단 말인가? 천덕꾸러기 서녀 주제에. 어려서부터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다 이제 응석을 받아줄 사람이 생겼으니, 자신의 성이 백씨인 것도 잊어버렸을 테지!

‘다 나으면 놀러 오라고? 제까짓 게 뭔데? 이 황보주아의 시중을 들어도 모자란 게!’

음습하게 치솟는 분노에 부들부들 떨던 그녀가 비틀거리다 자리에 앉았다. 불덩이가 들어앉은 듯 가슴이 절절 끓었다. 숨을 헐떡거리던 그녀의 두 눈에 음침한 기운이 번쩍였다. 두고 보라지, 반드시 초왕의 곁에서 떨어뜨리고 말 테니!

* * *

위중청의 말을 들은 후로, 초왕의 걱정은 끝도 없이 커지고 있었다. 임신으로 인해 쉽게 우울해진다지만, 자결을 하려 한다니……. 그의 머릿속에 창백한 백천범의 얼굴이 떠오르자 더는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국정이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으니 그가 긴급히 처리해야 할 업무도 거의 없었다. 그는 아예 공무에서 손을 떼기로 마음먹었다. 모든 업무를 태자에게 넘기고, 안채에 머물며 오로지 백천범의 곁을 지킬 생각이었다.

임부가 된 후로 그녀는 자주 깊은 잠에 빠졌다. 묵용감의 기척에 겨우 일어난 그녀가 깊고 까만 눈망울로 그를 그윽이 바라보았다.

“왕야? 왜 여기 계세요? 월규는요?”

긴 머리를 풀어 헤친 그녀의 얼굴이 청아한 빛을 띠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그는 빛에 이끌리듯 그녀의 볼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밖에 있소. 오늘부터 내가 그대의 시중을 들겠소. 세수와 식사, 침소에 드는 일까지 모두 내게 맡기시오. 어떻소?”

그녀는 잠이 덜 깬 와중에도 의아한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왜요? 왕야는 공무를 보느라 바쁘시잖아요?”

그가 그녀를 안아들어 자신의 무릎에 앉혔다.

“공무보다 그대가 중요하오.”

최근의 백천범은 거의 다른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예민해진 그녀는 쉽게 상처받았고, 변덕을 부렸다. 까닭 없이 소란을 피우는 일도 예사였으니 예전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그러나 그런 모습마저도 그의 사랑을 깊게 만들었다. 지금처럼 보채고 애교를 부리며 쉽게 토라지는 그녀는 예전부터 꿈꿔 온 모습이 아니던가. 그는 나날이 만족스럽고 즐거울 따름이었다.

여전히 정신이 혼미했던 터라, 그녀는 묵용감의 품에 안긴 채 천천히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그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대가 아니고 그대들이에요.”

“맞소. 그대들, 내게는 그대들이 가장 중요하오.”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너무 많이 자도 아이에게 좋지 않다고 하니 이제 일어나는 게 좋겠소. 일어나서 조금 걷는 게 어떻겠소?”

아이에게 좋지 않단 말에 그녀의 눈이 반짝 뜨였다.

“일어날래요. 정원에 나가서 같이 산책해요.”

그녀가 허리를 굽혀 신발을 신으려 하자 그가 서둘러 어깨를 붙잡고 만류했다.

“내가 하겠소.”

그는 발판에 쪼그려 앉아 신발을 신겨 준 뒤, 침대 맡에 놓인 얇은 천을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추울 것이오.”

춥다는 말에 그녀는 문득 황보주아를 떠올렸다. 그녀를 대신해 누각에 다녀왔던 기홍은 황보주아가 많이 수척해졌다는 말을 전하지 않았던가. 병세가 깊은 모양이었다.

“주아 언니가 아프다는데, 왕야께서도 알고 계셨어요?”

“그렇소? 의원에게 진찰은 받았다고 하오?”

그는 무심히 답하며 장막을 걷어 올리고 그녀를 부축한 채 나섰다.

“안 그래도 기홍 언니한테 위 의원을 보내라고 했어요. 풍한이 들어 약을 먹고 있대요.”

“그리했다니 다행이구려.”

마침 월규가 기력 회복에 좋은 죽을 가져왔다. 그릇을 건네받은 묵용감이 숟가락으로 죽을 조금씩 떠서 백천범에게 먹여 주었다.

“그대는 찾아가지 않아도 되오. 누각을 오르는 일도 그렇고, 주아의 병이 낫지 않았으니 그대 몸에도 좋지 않을 것이오.”

“그래서 기홍 언니한테 전대 달라고 했어요. 다 나으면 절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자고 말이에요.”

그의 품에 기댄 채 새끼 새처럼 죽을 받아먹던 백천범이 그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왕야께서는 가시지 않으세요?”

묵용감은 온 정성을 그녀에게 죽을 먹이는 데 쏟고 있었다.

“지금은 너무 바쁘니 짬을 낼 수 없소.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물으면 될 일이오.”

백천범이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였다.

“바쁘시다고요? 아까는 정무가 그리 바쁘지 않다고 하셨잖아요?”

“아내와 아이를 돌보는 중대한 일을 하고 있는데, 어찌 바쁘지 않겠소.”

그의 말이 백천범의 마음을 잔잔하게 토닥여 주었다. 그러나 천성이 남을 모질게 대할 줄 모르는 그녀로서는 황보주아를 내버려 두는 게 마음에 걸렸다. 결국 그녀는 재차 병문안을 권했다.

“그래도 한번 가셔요. 어릴 때부터 함께한 정이 있잖아요. 왕야께서 가지 않으시면 분명 언니가 상심이 클 거예요.”

묵용감이 그녀를 가볍게 흘겨보았다.

“내가 갔으면 좋겠소?”

“왕야께서는 보러 가고 싶지 않으세요?”

묘하게 그를 시험하는 말투였다. 한두 번 당한 게 아닌 터라, 묵용감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가를 정성껏 닦아 주며 말했다.

“가고 싶지 않소.”

백천범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제가 허튼 생각을 할까 봐 그러시는 거잖아요. 요즘 제가 이상하다는 거 저도 알아요. 그래도 한번 가 보세요. 그저 평범한 병문안이잖아요? 전 왕야를 믿어요.”

묵용감은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했다.

“한번 가셔요, 네? 아플 땐 마음이 약해지는 법이에요. 관심과 위로가 얼마나 그리운데요.”

그는 대충 대꾸하고는 숟가락을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녀가 얼굴을 슬쩍 뒤로 뺐다.

“그만 먹을래요.”

“아직 반이나 남지 않았소? 조금만 더 드시오.”

그녀의 볼은 안쓰러울 만큼 움푹 꺼져 있었다. 그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 어서, 조금만 더 드시오. 조금만…….”

아이가 생겨서 위가 줄어든 걸까. 엄청난 먹성을 자랑하던 예전의 그녀는 온데간데없었다. 최근에는 몇 숟갈이면 금세 음식을 물리곤 했다.

“이렇게 먹지 못하면 어찌한단 말이오?”

그럴수록 묵용감은 애가 탔다. 차라리 자신이 못 먹으면 좋으련만.

“이제 홑몸이 아니지 않소. 그대의 입맛이 없더라도 아이는 배고플 게 아니오.”

또다시 아이가 언급되자 백천범은 의지를 다졌다.

“조금만 더 먹어 볼게요.”

그녀가 입을 벌린 순간, 손쓸 틈도 없이 목구멍에서 음식물이 쏟아져 나왔다. 아이를 갖고 처음으로 구토를 하고 말았다. 깜짝 놀란 묵용감이 시녀들에게 소리쳤다.

“위 의원을 불러오너라, 어서!”

월규가 그릇을 가져다 댈 겨를도 없어, 그녀가 게워낸 것들이 곧장 바닥에 쏟아졌다. 앞서 먹었던 음식들도 전부 게워 낸 듯했다. 백천범은 눈물 콧물을 다 쏟으며 괴로워하는 와중에도 혼란스러워했다. 그러다 묵용감의 옷에 남은 얼룩을 발견한 그녀는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어쩔 줄 몰라 했다.

반면 묵용감은 금세 평정심을 찾았다. 그는 백천범이 더는 구역질을 하지 않은 걸 확인하고, 그녀를 병풍 뒤로 데려가 빠르게 옷을 갈아입혔다. 곧 자신의 옷도 바꿔 입은 뒤, 따뜻한 수건으로 그녀의 얼굴을 꼼꼼히 닦아 주었다. 그의 손길과 눈빛 모두 한없이 자상하기만 했다.

“이제 나아졌소?”

백천범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괜스레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제가, 제가 왕야의 옷을 더럽혔어요.”

“이까짓 옷이 대수라고, 신경 쓰지 마시오.”

그녀의 손도 깨끗이 닦아 준 묵용감이 다정하게 그녀를 토닥였다. 마침 위중청이 안으로 들어오자, 그는 서둘러 분부를 내렸다.

“위 대인, 어서 왕비를 봐주게. 식사 중에 구토를 했네.”

위중청은 백천범의 안색을 자세히 살피며 맥을 짚었다. 다행히 큰 문제가 없어,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임신 중의 구토는 일반적인 증상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음식을 드시고 구토하는 일이 반복적으로 일어날 겁니다. 초기엔 이런 증상이 흔하지요.”

묵용감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임신한 여인들은 모두 지금껏 이리도 고통스러운 일을 겪고, 견뎌 내었단 말인가? 늘 밝던 백천범이라도 성격이 딴판이 될 법했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에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갖지 않을 것을.”

위중청이 황급히 헛기침을 했다.

“쿨럭, 어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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