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365)화 (364/1,192)

제365화

“무슨 일로 온 것이냐?”

학평관은 연신 방긋거리며 말을 이었다.

“예, 소인이 고민해 보았는데 부윤 관저가 크긴 하지만 업무를 처리하는 공간으로 더 적합한 듯합니다. 왕야께서 홀로 지내셨을 땐 상관없으셨겠지만, 지금은 왕비 마마께서 오신 데다 회임까지 하셨으니 후원에서 지내시기에 불편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적당한 저택을 찾아 단장을 좀 하는 게 어떠신지요. 그럼 집다운 느낌이 나지 않겠습니까?”

학평관은 눈을 반짝거리며 쉼 없이 말을 이었다.

“게다가 이곳에서 일하는 자들은 대부분 원래 있던 이들이라 저희 쪽 인원과 마구 뒤섞여 있습니다. 잘 모르는 이들을 곁에 두는 것도 좋진 않을 것입니다. 왕비 마마 곁에 시녀라곤 월향과 월규 뿐이었는데, 월향이 시집을 갔으니 마땅히 빈자리를 메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회임을 하셨으니 더 많은 이들이 마마를 모셔야 합니다. 소인이 얼추 계산해 보니 주방 시녀와 주방장, 하인, 무수리, 관사, 조만간 들이게 될 유모까지……. 이만한 인원은 있어야 집안일이 원활히 돌아갈 수 있습니다. 어림잡아도 백 명 안팎은 되겠군요. 또…….”

묵용감이 손을 내저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왕비는 이제 막 임신을 한 터라 그런 일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지금으로선 성급하지 않느냐.”

학평관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왕비 마마께서 신경 쓰실 일 없도록 소인이 알아서 하겠습니다.”

“왕비가 가만히 지켜만 보겠느냐?”

묵용감이 그를 훑어보더니 운을 떼었다.

“많은 인력을 구하지 않아도 된다. 내년에 왕비가 몸을 풀면 금릉에서 지내다가 아이가 조금 자란 후에 서북 지역으로 갈 예정이다. 그때 모든 걸 제대로 갖추마.”

학평관이 흠칫 놀랐지만 곧 이해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인들을 그쪽 별장에 보내신 것도 그런 연유가 있으셨군요.”

이내 학평관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서렸다.

“왕야께서 닦으신 터전인데 어찌 조금도…….”

묵용감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두 분께서 천하를 갖고 싶어 하시니 천하를 둘로 나누었을 뿐이다. 본왕은 그저 가족과 함께 평안히 지내고 싶구나. 그리하면 각자 원하는 바를 갖는 게 아니더냐.”

초왕이 결정을 내린 일이니, 학평관의 계획은 물거품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열정만큼은 식지 않았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초왕비를 모실 각오를 다졌다. 초왕과 초왕비를 생각하면 저절로 감정이 벅차올랐다.

“소인은 왕야께서 약관弱冠(스무 살을 달리 이르는 말)이 되시기 전부터 모셨습니다. 왕야께서 얼마나 힘겨운 시간을 거쳐 오셨는지 소인만 알고 있지요. 이렇게 대를 잇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되니 소인은 정말로…….”

그가 말을 잇지 못하고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렸다.

“왕비의 회임은 경사이거늘, 어찌 눈물을 보이느냐?”

“기뻐서 나는 눈물이옵니다.”

학평관이 주름진 얼굴 가득 웃음을 띠었다.

“귀한 아기씨를 소홀히 모셔선 안 되지요. 왕비 마마 곁에 있는 시녀들은 출가 전인 아가씨들이니, 출산에 대해서는 모르는 점이 많을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두 달이 다 되도록 어찌 모르고 있었겠습니까?

소인의 생각에는 실력 좋은 부녀자들과 유모가 필요합니다. 많은 이들이 왕비 마마를 모시고 살펴야 만전을 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관저에 곳간이 없으니 제비집과 상어 지느러미 같은 재료는 그때그때 사 둬야 합니다. 이런 것들은 항상 구비해 둬야…….”

묵용감은 슬슬 성가셨기에 다시 말을 끊었다.

“사람을 구하는 일은 왕비와 상의하고, 식재료의 준비는 기홍과 상의하거라. 그 애가 왕비의 입맛을 잘 알지 않느냐. 다른 것들은 알아서 하거라. 전부 내게 물을 필요 없다.”

학평관은 묵용감이 갑작스레 말을 끊어도 개의치 않았다. 그는 벅찬 마음을 가까스로 가다듬은 후 차분하게 말했다.

“소인이 말이 많았습니다, 왕야. 그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걸음을 옮기려는데 묵용감이 그를 불러 세웠다.

“가는 길에 위 의원을 불러오너라.”

“예, 곧장 가서 모셔오겠습니다.”

학평관은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린 뒤 밖으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위중청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채에서의 일 때문인지 명성이 자자한 군신 초왕도 그리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당당한 태도로 초왕에게 물었다.

“왕야, 절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위 의원, 앉게.”

예를 갖춰 앉으라고 손짓한 묵용감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위 의원도 보았듯이 왕비의 감정 변화가 매우 심하네. 성질을 부리기도 하고, 우울해하기도 하지. 계속 이러다가 몸이 상할까 걱정이네. 고칠 방법이 없는가?”

“그게…….”

위중청이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떤 임부든 감정적인 문제를 겪습니다. 다만 정도가 심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뉘지요. 지금으로서는 약으로 다스릴 수 없습니다. 최대한 임부가 즐겁고 편안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증상이 조금씩 나아질 텐데, 보통은 석 달 정도가 지나면 괜찮아집니다.”

묵용감이 그의 말에 귀기울이다 의아한 표정을 보였다.

“정도가 심각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가 있단 말이냐? 심한 자는 어떠하느냐?”

“아주 심하게 우울증을 겪다가 자결하는 임부도 있었습니다.”

초왕의 동공이 몹시 커지더니 믿기지 않는 듯 물었다.

“아이를 가졌다고 자결을 한단 말이냐?”

* * *

왕비의 회임은 집안 식구들의 웃음꽃을 피워 냈다. 학평관은 하인들을 불러 계수나무에 붉은 실을 묶고 복도에는 붉은 등불을 걸도록 했다. 붉은 등불이 복도를 길게 수놓은 광경이 새해보다 더 활기찬 분위기를 자아냈다.

소식을 접한 태자는 곧바로 하인을 통해 백옥 여의를 보냈다. 새하얗고 매끈한 여의의 한쪽 끝에는 장수를 비는 영지가 조각되어 있었고, 반대쪽에는 노란 술 장식이 달려 있었다. 여의가 마음에 쏙 들었던 백천범은 종일 만지작거리며 손에서 떼지 않았다.

녹하가 불만스러운 듯 내뱉었다.

“태자 전하께서는 선물까지 주셨는데, 그분은 어찌 이런 소식에 미동도 없답니까?”

기홍이 그녀를 흘겨보았다. 예민해진 왕비는 다른 이의 말에 쉽게 동요하니, 공연히 나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역시나 백천범이 어여쁜 눈썹을 찌푸렸다.

“기쁘지 않은 걸까요?”

“녹하가 헛소리를 했습니다. 설마 그럴 리가요.”

기홍이 얼른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요즘 황보 아가씨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누각을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 아직 소식을 듣지 못하였겠지요.”

“몸이 좋지 않대요? 그럼 위 의원을 보내는 게 어때요?”

백천범이 여의를 만지작거리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빨리 나으라고 음식도 보내고요. 제가 아이 때문에 계단을 오르기 힘드니 다 나으면 놀러 오라고도 전해 주세요.”

기홍은 그리하겠다고 답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소인이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녹하를 보내면 다툼이 날 게 뻔하기에, 기홍은 새로 만든 죽을 들고 직접 황보주아의 누각을 찾았다.

* * *

황보주아는 정말로 몸이 좋지 않았다. 오랜 시간 밤바람을 쐰 탓에 감기 기운이 떠나질 않았다. 다행히 증세는 심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저조했다.

묵용감은 백천범과 사장풍이 한밤중에 단둘이 만난 것을 알면서도 그저 술주정만 부리고 넘어가지 않았던가. 그녀를 끔찍이 아끼면서 어찌 그 정도로 그친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증오심이 들끓었다. 동시에 묵용감에게도 화가 났다. 어린 부인에게 꼼짝없이 끌려다니는 것도 모자라 외도를 눈감아 버리다니! 이렇게 변변치 않은 사내가, 그녀가 알던 묵용감이 맞기나 하단 말인가?

예전의 묵용감은 심지가 굳고 거만한 사나이였다. 백천범을 죽이진 않더라도 호되게 혼을 내는 게 그다운 처사였다. 정작 소문을 들으니 매를 맞은 쪽은 묵용감이라 하지 않는가……. 기이해도 너무나 기이한 일이었다.

화가 난 그녀는 약도 먹지 않고 지금까지 앓고 있었다. 그녀가 아픈데도 찾아오는 이가 아무도 없었다. 태자는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야 한다며 하인을 통해 몸에 좋은 약을 보내 주었지만, 초왕은 그녀의 소식을 아예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녀의 상심은 깊어만 갔다. 차라리 가족들과 함께 떠나야 했다는 후회만이 밀려왔다. 그때 떠났다면 지금처럼 얹혀사는 일도 없었을 테고, 무시와 홀대를 받으며 외롭게 지내지도 않았을 텐데.

그녀는 줄곧 하늘이 돕는다고 여겼다. 그런 흉사를 겪고도 목숨을 부지했을뿐더러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두 사내가 그녀를 아껴주지 않았던가. 그녀 또한 그들을 사랑했다. 마지막엔 태자를 따를 수 없다 하더라도 차선책으로나마 초왕비는 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선 모든 게 공염불이나 다름없었다. 태자는 불완전한 천하를 얻는 데 그쳤고, 그녀에게 어떠한 약속도 하려 하지 않았다. 초왕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온 마음을 바치고 있었다. 과거의 정혼자는 그에게 어떤 의미도 지닐 수 없었다.

초왕의 저택에 있었을 때도 백천범이 싫었지만 증오하진 않았다. 그때는 자신이 태자를 더 사랑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묵용감이 백천범을 향한 마음을 감추지 않으니,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감정이 새어 나가고 말았다. 그녀는 그제야 묵용감이 자신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똑똑히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찌하겠는가. 그는 자신이 은애하는 사람은 백천범이고, 정혼자였던 그녀에겐 은애의 감정조차 품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접 말해 주기까지 했다.

게다가 백천범이 돌아오고 말았으니, 본심을 숨기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 외에 그녀가 무얼 더 할 수 있겠는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만 기회를 노릴 수 있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그러했듯, 또 다른 기회가 오리라고 믿었다. 어려서부터 함께한 정이 그리 쉽게 옅어질 수는 없다. 적어도 그녀에게는 아직도 선연한 감정이 아니던가.

그러나 하늘은 더 이상 그녀를 돕지 않는 게 아닐까. 끔찍한 소식이 그녀의 머리에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백천범이 아이를 가졌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소식을 접했을 때, 그녀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간 아이를 기다리며 백천범이 얼마나 속앓이를 했는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사실 내심 기뻐하기도 했다. 그녀에게 기회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이제는 그 기회마저 철저히 사라지고 말았다.

안 그래도 몸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였던 그녀는 더욱더 심한 타격에 앓아누울 뿐이었다. 몸조차 일으킬 수 없었지만, 그녀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아프다는 핑계를 대면 백천범을 찾아가 억지로 웃으며 축하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갑작스레 기홍이 녹두죽을 들고 찾아왔다. 그녀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왕비가 찾아가 보라는 분부를 내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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