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4화
“천범, 울지 마시오. 어찌 이러는 것이오? 자, 그러지 말고 말을 해 보시오. 화를 내면 아이에게 좋지 않다고, 방금 의원이 말하지 않았소.”
아이를 생각하니 슬픔을 조금 억누를 수 있었지만, 여전히 그녀는 흐느끼고 있었다.
“왕야는 아이가 싫으신 거죠?”
“그게 무슨 말이오! 그대와 나의 자식인데 어찌 싫을 수 있겠소. 너무 좋소. 정말이오. 좋아 죽을 것 같소.”
“거짓말!”
그녀는 여전히 붉은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말했다.
“왕야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데, 제가 모를 줄 아세요?”
“기쁘다니깐.”
그가 입을 활짝 벌리며 웃는 얼굴을 보여 주었다.
“잇몸까지 드러내 웃고 있질 않소? 내가 어찌 기뻐하지 않는단 말이오.”
그러나 백천범은 그를 밀쳐내며 시무룩하게 말했다.
“다 알아요. 머릿속에 온통 그 생각뿐이시죠? 왕야한텐 그 일이 아이보다 중요하잖아요.”
“아니오. 맹세코, 정말 아니오.”
화들짝 놀란 그가 손을 들어 올리며 맹세했다.
“지금은 아이가 가장 중요하오. 내가 그리 모자란 사람으로 보였소? 그저 해 본 말이건만, 진심으로 받아들이면 어떡하오. 부인, 어서 눈물을 그치시오. 이리 슬퍼하는 모습을 보니 내가 속상해 죽겠소.”
그녀가 또다시 꼬투리를 잡았다.
“아이가 가장 중요하면, 저는요?”
“내가 말이 헛나왔소. 그대가 아이보다 더 중요하오. 그대가 가장 중요한 존재고 아이는 그다음이오.”
그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주며 정성껏 어르고 달랬다.
“울지 마시오. 아이는 엄마를 닮는다던데, 이리 울면 아이도 자주 울지 않겠소?”
그제야 그녀가 코를 훌쩍이며 천천히 울음을 그쳤다.
“역시 아이가 가장 중요하고 제가 그다음인 게 낫겠어요. 아이는 저보다 어리잖아요.”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그의 눈에는 그녀나 아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으므로.
“이런, 아이에게 자리를 내주겠단 말이오? 그리 순서를 나누지 않아도, 둘 다 내게 똑같이 중요하오. 이제 되었소?”
한바탕 운 데다 그가 정성껏 달래며 말해 주자 비로소 그녀의 서러움이 사그라들었다. 그녀는 얌전히 그의 품에 기대어 평온한 침묵에 잠겼다.
묵용감은 아직 걱정이 가시지 않아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는 배 위에 손을 올려놓고 빙그레 미소 짓고 있었다.
조금 전에는 서럽게 울던 사람이 이토록 평온한 미소를 짓다니, 정말 어찌할 도리가 없는 여인이 아닌가. 그녀의 머리카락에 그의 부드러운 손길이 내려앉았다.
“혼자 어찌 그리 웃고 있소?”
“신기하고 즐거워서요.”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촉촉한 눈망울로 환한 미소를 머금으니 그녀에게서 광채가 넘쳐흘렀다.
“여기에 아기가 있다니……! 우리 아기예요. 왕야도 기쁘세요?”
“물론, 매우 기쁘오.”
그도 그녀의 배에 살며시 손을 얹더니 천천히 어루만졌다.
“우리 아이는 그대를 닮아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똑똑할 것이오.”
“너무 좋아요.”
또다시 감정이 울컥 올라오는 듯해, 그녀가 흘리듯이 중얼거렸다.
“늘 혼자 쓸쓸했는데, 이제는…….”
그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쓸쓸했다니, 내가 있지 않소?”
“아이랑 왕야는 다르죠. 이 애는 제가 낳을 혈육이에요. 절 버릴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그는 그녀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단호히 말했다.
“내가 그대를 버릴 거라는 말처럼 들리오. 정작 그대가 날 버리지 않았소?”
그녀도 자신의 말이 옳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굽히려 들지 않았다.
“정말 재미없게, 오늘 같은 날 옛일을 꺼내실 건 뭐예요. 그 일은 진작에 끝난 일이잖아요.”
“누가 그러오?”
그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계속 이자가 붙고 있거늘. 절대 끝날 일 없소.”
그녀가 혀를 차며 뾰로통한 표정을 보였다.
“이것 보세요. 몇 마디 못 나누고 삼천포로 빠지잖아요.”
그의 변론을 듣기도 전에, 그녀가 침대 끝으로 다가갔다.
“저 너무 답답해요. 왕야, 산책하러 가실래요?”
그는 먼저 침대를 내려가 그녀에게 신발을 신겨 주고 조심스레 그녀를 부축했다.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길게 이어진 복도를 천천히 거닐었다. 배에 손을 얹고 신중히 걷는 그녀의 모습에서 제법 임부의 태가 났다. 그렇게나 월향을 부러워하더니, 드디어 그녀도 그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역시나, 당장이라도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구의 시선을 느낀 묵용감이 손을 풀었다.
“잠시만 혼자 걷고 있으시오. 금방 돌아오겠소.”
백천범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집을 부렸다.
“가시겠다고요? 절 부축해 주셔야죠.”
월규가 곧장 다가왔다.
“왕비 마마, 소인이 부축해 드리겠습니다.”
백천범은 대꾸도 하지 않고 묵용감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다시 그녀를 부축했다. 백천범은 편안히 기대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저와 같이 걷는 게 싫으신 거예요?”
“그럴 리가.”
초왕이 다정하게 웃어 보였다.
“어찌 싫을 수 있겠소. 매일 그대와 함께 거닐고 싶은 마음뿐이오.”
반듯하게 서 있던 영구가 입꼬리를 씰룩거리다 몸을 돌려세웠다.
시야에서 그의 모습이 사라지자 백천범이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왕야, 일이 있으시면 그만 가 보세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 테니, 조급할 필요 없소.”
그러나 그녀의 태도는 완강했다.
“어서 가 보세요. 영구 무사님이 저를 도리도 모르는 왕비라고 생각하겠어요.”
그가 웃으며 능청을 떨었다.
“이런, 왕비도 체면을 중시한단 말이오?”
얼굴이 발갛게 물든 백천범이 그를 밀쳤다.
“어서 가세요. 일을 마치시면 곧바로 돌아오셔야 해요.”
묵용감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웃으며 자리를 떴다. 반월문을 지나자 마침 영구가 문 옆에 서 있었다. 그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여기서 무얼 하느냐?”
“왕야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올지 어찌 알고?”
“왕비 마마께서는 도리를 아는 분이시니까요.”
묵용감은 영구의 말이 우습기만 했다.
“하, 너도 아첨을 할 줄 아는구나.”
영구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스쳤다.
“소인은 사실을 말씀드릴 뿐입니다.”
아직 복도를 거닐던 백천범이 월규를 돌아보았다.
“내가 너무 심했나?”
월규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잘하셨습니다.”
어느새 왕비에게서 나무를 타고 개울에 뛰어들던 전범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왕야의 총애에 한껏 익숙해진 데다 배 속에 아기씨까지 생겼으니, 더 많은 총애를 받고 콧대가 높아지지 않겠는가?
어차피 시중을 드는 게 그들의 일이니, 주인의 콧대가 좀 높아져 막 행동한다 해도 그리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왕비의 도도함은 왕야에게 향해 있으니, 그들은 그저 즐겁게 지켜볼 수 있었다.
냉정하고 위엄 넘치던 초왕이 점점 공처가로 바뀌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으니 왕비가 부럽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네 명의 시녀 중 월향은 시집을 갔고 기홍과 녹하도 임자가 있으니 월규만 홀로 남은 셈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에는 어떠한 동요도 없었다. 초왕처럼 아내를 끔찍이 아껴주는 사내가 아니라면 절대 혼인할 마음이 없었다. 설령 그런 사내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괜찮았다. 평생 왕비의 곁을 지키며 늙어 가는 삶도 분명 만족스러울 터였다.
* * *
도포 자락을 걷어 올리고 자리에 앉은 초왕이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일은 잘 처리했느냐?”
영구가 즉시 보고했다.
“왕야의 지시대로 이 장군님 일행을 두 무리로 나누어 서북쪽으로 이동시켰습니다. 어제 출발하였고, 이 장군님이 계시지 않아 선발대는 오천범吳千範 부장副將이 인솔할 예정입니다.”
“그래.”
초왕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은 절반은 방령안이 인솔하라 이르거라. 어차피 그쪽에서 오지 않았느냐. 관저에는 일손이 충분하니 잠시 돌아가 있으라고 전하거라. 이천행이 다 나으면 다시 지시를 내리겠다.”
영구는 대답을 올리고는 잠시 머뭇거렸다.
“왕야, 인원을 철수한다는 소식이 북에 전해지면 기회를 틈타…….”
“황제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분은 아니다.”
초왕이 차를 한 모금 들이켜고 단호히 답했다.
“지금은 강북과의 무역에 관심이 많은 상태지. 북쪽 경계에 있는 몽달국矇達國과도 무역을 하고 싶어 하니 전쟁을 재개할 경황은 없을 터. 다만…….”
말을 멈춘 초왕이 가볍게 탁자를 두드렸다.
“이 일은 굳이 숨길 필요도 없고 숨길 수도 없겠구나. 그쪽의 반응을 일단 지켜봐야겠다.”
영구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겠습니다.”
초왕은 짧게 웃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민병民兵 훈련 성과가 훌륭하더구나. 다른 지역까지 확대해도 되겠다. 한 장군에게 수성 인근뿐만 아니라 영남과 서북 지역에도 민병 제도를 보급하라 이르거라. 평소에는 본업을 하던 사내들을 전시 상황에 병력으로 쓰겠다.
내년쯤엔 모든 게 자리를 잡을 테니 대다수의 병력을 서북 일대로 보내 황무지를 개척할 계획이다. 강남은 풍요롭지만, 서북은 척박하기 짝이 없지 않느냐. 서북 지역까지 넣어 비교하면 북쪽보다도 상황이 좋지 않더구나.
선황께서도 생전에 서북 지역을 개발하고자 여러 정책을 내놓으셨지만, 효과는 미비했지. 서북 지역은 이제 우리 쪽에 속하니 나도 한번 시험해 봐야겠구나.”
영구가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왕야께서 천하를 마음에 품으신다면 백성들의 복이나 다름없습니다. 한데 어찌…….”
초왕이 영구를 흘겨보며 말을 잘랐다.
“입 다물거라. 본왕보다 더 훌륭한 태자께서 계시지 않느냐. 본래 황태자셨던 분이니, 남쪽을 맡겨야만 진정으로 백성들의 복이 될 것이다.”
영구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초왕은 지금껏 야망을 품은 적이 없었다. 이제는 왕비가 아이까지 가졌으니 더욱 위험을 감수하길 원치 않을 것이었다. 영구는 허리를 숙이고 두 손을 맞잡아 예를 표했다.
“왕야, 다른 지시 사항이 없으시면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초왕이 손을 내저었다.
“가 보거라.”
영구가 문을 나서자 곧 학평관이 들어왔다. 그는 잇몸이 다 보일 정도로 활짝 웃으며 허리를 숙이고 예를 갖췄다.
“소인, 왕비 마마께 경사 소식을 들었사옵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아이의 소식에 초왕의 기분은 미묘했다. 기쁘지 않다고 할 수는 없었다. 백천범이 기뻐하니 그 또한 기뻤다. 다만 조금은… 그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 느낌이었다. 두 사람만의 시간이 아직 부족한데, 갑작스레 아이가 끼어든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울적함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