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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63)화 (362/1,192)

제363화

얼굴이 시커멓게 죽은 묵용감이 시녀들을 노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죄다 혼쭐을 내주고 싶었지만 백천범의 시중을 들 이들이니 참는 수밖에. 그가 한없이 냉랭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은 눈 감아 주겠지만, 또 이런 일이 생겼다간… 이 일까지 함께 벌을 내리겠다.”

위중청은 시녀들에게 백천범의 월경 주기를 물었다. 월규는 창백해진 얼굴로 우물쭈물하다 답했다.

“마마의 주기는 규, 규칙적이지가 않아서, 오랫동안 하지 않으셨습니다. 소, 소인도 잘 기억이 나지 않고…….”

“어느 정도 되었는지 알아야 합니다. 천천히 생각해 보십시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월규가 입술을 깨물며 열심히 기억을 되짚었다.

“…관저로 돌아오신 이후에는 한 번도 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그럼 확실합니다. 월경을 하지 않으셨다면 회임하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요즘 들어 잠이 늘고 입이 짧아지셨다고도 하지 않으셨습니까. 기력이 없어지는 건 회임 초기 증상입니다. 어떤 이들은 성격이 딴판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폭력적이 되거나, 예민해지거나, 쉽게 눈물을 흘린다거나…….”

“다 맞네.”

묵용감이 그의 말을 잘랐다.

“위 의원, 자네가 말하는 전부가 왕비의 증상과 똑같네. 혹 앞으로도 계속…….”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약 석 달 동안 지속하는 초기 증상일 뿐입니다. 태아가 배 속에서 안정을 찾으면 임부도 정서적으로 안정되지요. 그리하면 입맛도 좋아질 테니 그때 몸에 좋은 것들을 많이 드셔야 합니다.”

기홍이 곧장 앞으로 나와 말했다.

“왕야, 걱정하지 마십시오. 소인이 왕비 마마와 아기씨께 제일 좋은 것만 해 드리겠습니다.”

그때, 장막 안에서 명주실을 잡아당기는 힘이 느껴졌다. 실 끝을 잡은 기홍의 손이 안쪽으로 끌려갔다.

곧 백천범이 장막 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더니 반쯤 풀린 눈을 깜박였다.

“왜 제 팔목에 실을 묶은 거예요? 도망갈까 봐서요? 아니면 재미있는 놀이라도 하고 있었어요?”

초왕비를 처음 본 위중청은 상상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고귀하고 단정한 대갓집 규수와는 달리, 초왕비는 풀어헤친 머리에 눈은 반쯤 감겨 있고 웃음을 자아내는 말투를 썼다.

제대로 예를 갖추고 인사를 올리려는데 건묵용감이 장막 안으로 불쑥 들어갔다. 그는 초왕비를 다시 침대 안으로 이끌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부부가 침대 안으로 들어가니 조금은 민망할 수밖에. 위중청은 물러나려 했지만 미동도 하지 않는 시녀들에게 가로막혀 나가지도 못했다.

어색한 고요함을 깨트리는 초왕의 목소리가 장막 밖으로 흘러나왔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따스하고 온정 넘치는 목소리였다.

“일어났소? 조금 더 잘 것이오?”

“아뇨.”

백천범은 묵용감의 어깨에 턱을 괴더니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애교를 부렸다.

“밖에 있는 사람은 누구예요? 저한테 실은 왜 묶은 거예요?”

묵용감이 그녀의 까만 머리카락을 손으로 가볍게 빗어 내렸다.

“해 줄 말이 있소. 너무 놀라지 마시오.”

그 말에 백천범이 팔을 풀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일인데요? 저 사람 대체 누구예요?”

“의원이요. 천범, 그대가…….”

“잠시만요, 의원이라고요?”

백천범은 다시 침대 안쪽으로 물러나 몸을 움츠렸다.

“아프지도 않은데 의원은 왜 데려오신 거예요?”

“좋은 일이오. 천범, 이리 오시오.”

묵용감이 침대 발판에 선 채 두 손을 뻗었다.

“내게 안기면 알려 주겠소.”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그녀가 기쁜 나머지 과격하게 움직이기라도 하면 어떡한단 말인가. 그의 마음에 걱정이 가득했다. 의원의 말대로라면 이제 두 달째니, 안정기에 들어설 때까진 늘 조심해야 했다.

그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백천범에게 불길한 생각을 연달아 불러올 뿐이었다. 그녀가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쁜 소식인 거죠? 제가 아이를 가질 수 없대요?”

“아니오. 지금 그대는 아이를 가졌소.”

하는 수 없이 묵용감이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천범, 그대는 엄마가 되오. 기쁘지 않소? 줄곧 아이를 원하지 않았소. 지금 그 아이가 그대의 배 속에 있소. 그대가 정말 부모가 된단 말이오!”

“거짓말, 절 속이시는 거죠!”

별안간 그녀의 감정이 격해지기 시작했다.

“돌팔이를 데려와 절 속이시는 거죠? 제 몸인데, 제가 아이를 가진 것도 모르겠어요?”

밖에 서 있던 위중청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아무리 거리를 돌아다니며 약을 판다지만, 지금껏 그에게 돌팔이라고 욕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울분이 치민 그가 장막 밖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소인은 돌팔이가 아닙니다. 소인의 목을 걸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왕비 마마께서는 회임하신 게 틀림없습니다.”

그의 외침에 백천범의 마음에서 비로소 희망이 고개를 들었다. 입술을 파르르 떨던 그녀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묵용감에게 물었다.

“저, 정말이에요?”

“정말이오.”

묵용감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대의 배 속에 우리의 아이가 있으니 함부로 움직여서는 안 되오. 그래도 너무 걱정은 마시오. 위 의원은 실력이 뛰어나니 그대도 아이도 잘못되는 일은 없을 것이오.”

그토록 바라던 일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백천범은 비로소 가슴을 짓누르던 바위를 치운 듯 후련하고 기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일이 남아 있었다.

임신 사실을 몰랐으니 음식도 가리지 않았고, 늘 빠른 걸음으로 다녔는데……. 아이에게 문제는 없단 말인가? 과연 그녀가 무사히 낳을 수 있을까?

불쑥 치미는 불안에 그녀는 묵용감의 옷깃을 움켜쥐고 입술을 꿈틀거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듯했지만, 울면 아이에게 좋지 않을 테니 꾸역꾸역 울음을 삼켰다.

“얼마나 되었대요?”

“두 달이라고 하오.”

묵용감은 그녀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닦아 주며 다정하게 말했다.

“생각해 보시오. 여덟 달 뒤면 아기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것이오…….”

“두 달이요?”

옷깃을 붙잡은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두 달 동안 왕야께서 매일 밤……. 큰일 났다! 아이가 부딪히진 않았는지 진찰을 받아 봐야겠어요.”

장막 밖에 있던 이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붉어졌다. 몇몇 시녀들은 워낙 익숙해졌으니 얼른 낯빛을 고쳤지만, 이런 상황이 처음인 위중청은 낯이 뜨겁다 못해 얼굴이 터질 듯했다. 어금니를 있는 힘껏 깨물고 있으니 두 볼이 푸들푸들 떨렸다.

묵용감이 멋쩍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의원이 밖에 있으니 진맥을 짚어 보라 분부하겠소.”

그녀는 그제야 바깥에 의원이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가 새빨개진 얼굴로 입술을 삐죽였다.

“…왕야 때문이에요. 제가 괜한 말로 비웃음만 사게 되었잖아요.”

그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비웃음을 사든 사지 않든 이미 그의 체면은 구길 대로 구겨져 있었다. 이제는 위중청의 의술이 어떠하든 관저에 남겨 두어야 했다. 이리도 사적인 이야기를 들었는데 어찌 밖으로 내보내겠는가.

또 원래도 끔찍이 아끼던 그녀였지만, 이제는 더욱더 애지중지하며 소중히 대해야 했다. 그가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와 그녀를 안으려는 자세를 취했다.

“앞으로 걸어 다닐 생각은 하지 마시오. 내가 날마다 안고 다닐 테니.”

백천범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힌 채 대꾸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직접 신발을 신고 옷매무새와 머리를 정돈한 뒤 장막 밖으로 나갔다.

그사이 표정을 가다듬은 위중청이 공손히 예를 갖췄다.

“소인,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어서 일어나세요.”

백천범이 그를 일으키려 했지만, 묵용감이 슬쩍 그녀를 품에 안았다.

“허리를 굽혀서도 안 되오. 아이가 배 속에 있으니 조심하시오.”

백천범이 작게 투덜거렸다.

“조심하고 있어요. 왕야가 움직이는 동작이 더 크거든요.”

어쨌든 오늘은 상서로운 날이니, 묵용감은 그녀의 꾸짖음을 못 들은 척했다. 그가 조심스레 그녀를 의자에 앉히고 위중청에게 말했다.

“맥이 어땠는지 왕비에게 설명해 주게.”

“예.”

위중청이 허리를 숙이며 답했다.

“맥을 짚어 보니 왕비 마마께서는 회임하신 지 두 달 정도 되셨습니다. 맥이 안정적이었고 흐름도 원활했습니다. 맥박이 힘 있게 뛰고 있으면, 태아도 아주 건강하다는 의미입니다. 방금 말씀하셨던 그런 일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의 말에 백천범은 여전히 부끄러워하며 조용히 말했다.

“의원님, 절 비웃지 마셔요. 처음 아이를 갖는 거라 잘 몰라서 그래요. 안 그랬음 어떻게 두 달이 되도록 몰랐겠어요. 정말 큰일 날 뻔했는데, 의원님께서 절 구해 주신 거나 다름없어요. 앞으로 어떤 것들을 조심해야 하는지 알려 주세요. 그래야 다시는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을 거예요.”

초왕비는 거드름도 피우지 않았고 말도 재미있게 했다. 그녀에게 다시 호감이 생긴 위중청은 주의사항을 자세히 일러주었다.

“석 달 동안은 각별히 주의하셔야 합니다. 빠르게 뛰거나 높은 곳에 올라가시면 안 됩니다. 날 것이나 찬 음식을 피하시고, 늘 즐거운 생각만 하십시오. 특히 화를 내시거나 몸이 피로해지시면 좋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그 일도 하시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그때 초왕이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아무 문제 없다고 하지 않았나. 아이도 건강하다면서.”

위중청이 난감한 기색으로 말했다.

“쿨럭, 커흠! 혹시 모르는 일입니다. 석 달까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참으시지요.”

백천범이 그를 흘겨보았다.

“의원님 말 들으세요.”

초왕은 눈꺼풀을 내리깔고 대답했지만, 불만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별안간 그녀가 그의 손등을 세게 꼬집었다. 예상치 못한 통증에 그가 놀란 시선을 보냈지만, 그녀는 그를 외면하며 다시 장막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다들 황당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그때 위중청이 초왕을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왕야, 왕비 마마께서는 대표적인 임신 초기 증세를 보이십니다. 감정 기복이 심하여 그러시니 왕야께서 부디 이해해 주십시오.”

초왕은 하는 수 없이 그녀를 달래러 안으로 들어갔다. 위중청은 어떤 재미난 이야기가 들려올지 기대했지만, 아리따운 시녀 한 명이 그를 힐끔 보더니 그만 나가라고 손짓했다.

결국 위중청과 시녀들은 함께 방을 빠져나왔고, 초왕과 초왕비만이 남아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묵용감의 예상대로 백천범의 눈시울이 잔뜩 붉어져 있었다. 그녀는 침대에 가만히 앉아 눈물을 꾹꾹 참고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그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부인, 화내지 마시오. 내가 전부 잘못했소.”

발판에 선 그가 허리를 숙인 채 진중하게 말했다. 뭐가 되었든, 무슨 상황이든 일단 그가 잘못을 인정하고 비는 게 맞았다.

“인정하시는 거예요?”

“…….”

무얼 인정하란 말인가?

어쨌든 인정을 해야 한다. 그편이 낫다는 걸, 묵용감은 그간의 경험으로 똑똑히 깨닫고 있었다.

“그렇소, 인정하고말고. 모두 내 잘못이오.”

더는 참지 못한 백천범이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가 엉엉 울기 시작하자 묵용감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간 슬프고 처량한 모습을 보이긴 했어도, 이리 목놓아 운 적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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