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362)화 (361/1,192)

제362화

“게다가 그대가 먼저 선을 넘었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제가 언제요?”

그녀의 다리는 아직도 그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가 부드러운 다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게 그 증거가 아니겠소.”

백천범이 서둘러 다리를 내렸다.

“잠이 들어서 몰랐어요.”

“그러오? 잠이 들었는데도 하고 싶어 한 게 아니오.”

그가 시시덕거리며 그녀를 달랬다.

“자신을 억누르려 하지 말고 이리 오시오.”

그녀가 어여쁜 눈매를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 마세요. 제가 머리로 들이받고 말 거예요.”

그는 얌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정말 건드렸다간 그를 충분히 들이받고도 남을 그녀였다.

그가 얌전해지자 그녀는 조금 안쓰러운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나 하고 싶으세요?”

그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녀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콕 찔렀다.

“왕야처럼 밝히는 사람은 또 없을 거예요!”

그가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이 마음은 그대에게서만 느낄 수 있소.”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사내들은 다들 이걸 좋아해요?”

“그럴 것이오.”

그녀에게 손을 붙잡힌 상태였지만, 그는 여전히 보드라운 그녀의 피부를 어루만지고 있었다. 손짓만 봐서는 단념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별안간 깨달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사내들이 왜 그렇게 첩을 많이 들이는지 알겠어요. 정실 혼자서 감당하기 힘들어서였네요.”

그녀가 이런 식으로 받아들일 줄은 몰랐기에,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아니질 않소.”

그녀가 피식 웃으며 그를 놀렸다.

“아니라고요? 북쪽엔 측왕비, 관저엔 예전 약혼녀를 두시고요?”

그가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주아는 태자 형님과 잘되고 있지 않소?”

“제 착각이었나 봐요. 아주버님이 다치신 날 슬쩍 물어봤는데 두 분 다 아니라고 하셨어요. 주아 언니는 아직도 왕야를 마음에 두고 있나 봐요.”

마지막 문장을 내뱉는 목소리에서 숨길 수 없는 질투심이 느껴졌다.

묵용감은 박장대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예전의 그녀를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나올 수밖에. 그의 부인이 드디어 시기와 질투의 의미를 깨닫지 않았는가!

“왜 그렇게 크게 웃으시는 거예요!”

약이 오른 그녀가 그의 손등을 힘껏 꼬집었다.

묵용감의 웃음은 헉하는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나는 그대의 지아비요. 어찌 세게 손을 쓴단 말이오…….”

그녀는 코웃음을 치고 돌아눕더니 그를 무시하기에 이르렀다.

그가 그녀의 뒤에 붙어오자, 이번에는 허벅지를 힘껏 꼬집었다.

“잘 거예요, 말 거예요? 안 잘 거면 침대에서 나가세요.”

어찌나 세게 꼬집는지, 제대로 멍이 남을 듯했다. 묵용감은 속으로 슬픔에 젖은 탄식을 내뱉었지만, 결국 얌전히 누워 잠드는 수밖에 없었다.

* * *

백천범은 밤마다 고단했기에 늦게 일어나곤 했다. 그러나 어제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도통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기홍이 장막 밖에서 몇 차례나 그녀를 확인했지만 좀처럼 눈을 뜨지 않았다.

기홍은 녹하에게 걱정스러운 마음을 털어놓았다.

“요즘 왕비 마마께서 기운이 없으시네. 아이를 갖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신 모양이야. 종일 축 처져서 입맛도 없으시고. 의원을 불러야 하지 않을까?”

녹하가 고개를 저었다.

“의원도 만나기 싫어하시는데, 뭐. 월규가 의원한테 처방전을 받아서 보약을 드시는 게 어떻냐고 했더니 멀쩡한데 무슨 보약이냐고 극구 반대하셨잖아. 내가 볼 땐 마음을 졸일 필요도 없는 일이야. 돌아오신 지 석 달도 되지 않았는데 그렇게 빨리 아이가 생기겠어? 일이 년 만에 가지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데.”

“마음의 병일 테지. 월향이가 그리 빨리 아기를 가지니까 충격이 크셨나 봐.”

기홍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활발하시던 분이 지금은 내내 울적해하시니, 가여워 죽겠어.”

“…아무래도 유일첩 의원이 써준 처방전으로 약을 좀 더 드시는 게 좋을 것 같아.”

녹하가 곰곰이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그 처방전이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있을까?”

기홍이 걱정스레 말했다.

“지금은 몸 상태가 달라졌을 테니까 새로 지어야지. 태자 전하 쪽에는 수행 의관이 있는데 우리는 없잖아? 왕야께 한 분 구해 달라고 말씀드리는 게 좋겠어. 그럼 왕비 마마께서 몸이 불편하실 때마다 매번 밖에서 불러올 필요도 없잖아.

부인과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지 진맥도 받을 수 있고. 일단 의원부터 구하고, 마마가 진맥을 받으시도록 우리가 잘 구슬려 보자. 마음이 약하신 분이니 그리 완강히 거부하시진 못할 거야.”

녹하가 웃으며 말했다.

“좋은 생각인데? 가동한테 왕야께 말씀드려 보라고 할게.”

백천범을 위한 일 앞에서 초왕은 거절 따위 하는 일이 없었다. 가동의 제안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 초왕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그리도 왕비를 걱정하다니, 이 일은 네가 맡아서 처리하거라.”

“예.”

가동은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의원을 찾으러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동이 제법 의젓해 보이는 의원을 데려왔다.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위중청魏仲淸이라는 사내였다. 호리호리한 체격에 청색 도포를 단정히 입은 모습이 꽤 점잖아 보였다. 묵용감도 그의 인상이 나쁘지 않았지만, 의술 실력은 겉모습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위중청이 공손히 말했다.

“제가 왕비 마마의 진맥을 짚어 보고자 합니다. 소인의 말이 맞는지 왕야께서 판단해 주십시오.”

묵용감이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왕비가 의원을 만나길 거부한다네. 본왕도 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지.”

위중청이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왕비 마마께서 침수에 드셨을 때 손목에 명주실을 달아 사맥絲脈(환자의 손목에 맨 실의 끝을 잡고 맥을 짚던 일)을 짚는 건 어떻겠습니까?”

묵용감은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의술이 뛰어난 자들도 사맥은 쉽게 짚지 못하는 법인데, 이 젊은 의원이 사맥을 짚겠다고 나설 줄이야! 그리도 의술에 자신이 있단 말인가?

요즘 들어 백천범은 부쩍 잠이 늘었다. 잠결에 누가 그녀를 업어간다 해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곤 했으니, 실을 묶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터였다. 결국 묵용감이 위중청을 안채로 안내했다.

때마침 백천범이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는 기홍에게 그녀의 손목에 명주실을 묶으라고 분부했다. 위중청은 침대 밖에 놓인 의자에 앉아 실의 끝부분을 살며시 잡았다. 그가 호흡을 가다듬고 정신을 집중했다. 어느새 방 안에 적막이 내려앉았고, 모두의 시선이 위중청의 얼굴을 향했다.

위중청의 표정이 천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가 잠시 묵용감을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리고 진맥을 이어 갔다.

그의 표정이 적잖은 불길함을 불러왔기에, 초왕이 나직하게 물었다.

“위 의원, 대체 무슨…….”

위중청이 슬쩍 손을 들어 올렸다.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다시 정신을 집중하여 진맥하던 그가 마침내 실을 기홍에게 건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묵용감에게 공손히 예를 갖추는 위중청의 얼굴에 기쁨이 어려 있었다.

“왕야, 감축드립니다. 왕비 마마께서 회임하셨습니다.”

“…….”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위중청은 그들의 반응에 흠칫 놀랐다. 왕비의 회임이 경사가 아니란 말인가? 어찌 다들 저런 표정을 짓는단 말인가, 설마 왕야의 아이가 아니라…….

그의 생각이 틀렸다는 걸 보여 주듯 월규가 가장 먼저 펄쩍펄쩍 뛰며 즐거워했다. 월규는 초왕이 곁에 있다는 사실도 잊은 듯 환호성을 내질렀다.

“세상에나, 왕비 마마께서 아이를 가지셨다니, 정말 잘되었습니다. 경사입니다, 경사!”

기홍도 밀려드는 기쁨에 결국 눈시울을 붉히더니 소매로 연신 눈물을 닦아냈다.

정작 초왕은 목석처럼 가만히 서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회임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그의 모든 사고가 정지된 듯했다.

유일하게 녹하만 냉정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위중청은 가동이 데려온 의원이다. 워낙 일 처리가 미흡한 가동인 만큼, 어린 왕비를 기쁘게 해 주겠다고 돌팔이를 데려왔을지도 모른다.

“위 의원, 다시 한번 짚어 보십시오. 그저 얇은 실을 연결해 짚은 진맥이니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안 그래도 마마께선 이 일로 고민이 많으십니다. 혹여 헛물만 켰다간 왕야께서 가만두지 않으실 것입니다!”

녹하는 시녀이긴 했지만, 초왕의 사람인지라 돌팔이 의원에게까지 예를 갖출 필요는 없었다.

위중청도 거만한 성격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의술을 의심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대대로 의술이 뛰어난 의원을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란 위중청이였다. 다만 권세에 눌려 가세가 기울기 시작한 탓에 고향을 떠나 수성으로 오게 되었다.

그 후 약상자를 메고 다니며 연고와 대력환 등 각종 환약을 팔며 곤궁한 생활을 이어 나가던 중, 때마침 가동에게서 초왕이 수행 의관을 찾는다는 소식을 접했다. 뒷배가 얼마나 중요한지 뼈저리게 잘 알고 있던 위중청이 아닌가. 그는 떠돌아다니는 고단한 생활을 청산하고 편안한 날을 보내고 싶었기에 수행 의관에 지원한 터였다.

그는 일단 가동의 진맥을 하고 그의 몸 상태를 정확히 짚어 내었다. 그리하여 손쉽게 가동의 마음을 사고 관저로 올 수 있었다.

기댈 곳이 필요하긴 해도, 함부로 무시를 당하는 건 참을 수 없다. 그가 얼굴을 살짝 굳히며 답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회임하신 게 틀림없습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다른 의원을 불러 진맥을 짚어 보십시오. 소인의 판단이 틀렸다면 왕야께서 내리시는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때마침 정신을 차린 묵용감이 딱딱한 어조로 말했다.

“녹하의 말대로다. 만약 왕비가 실망만 하게 되거든 본왕이 네 가죽을 벗기고 말겠다.”

초왕은 그리 기뻐하지 않는 듯했다. 이토록 흉악함까지 느껴지는 목소리라니. 순간 몸이 부르르 떨린 위중청은 잠시 고민했지만, 자신의 의술을 믿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왕비는 임신을 한 게 틀림없었다.

“왕야, 믿어 주십시오. 마마께서는 회임하신 지 두 달 정도 되었습니다.”

두 달? 방에 있던 모든 이들이 깜짝 놀랐다. 임신을 한 줄도 모르고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며 우울해하던 왕비다. 게다가 몸도 야위다니, 이 얼마나 가여운지!

시녀들은 서로 눈치만 보았다. 하나같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느덧 새파래진 초왕의 얼굴을 발견한 시녀들이 황급히 무릎을 꿇어앉았다.

아무도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직 시집도 가지 않은 여인들이라 경험도 없었기에 그저 위로의 말밖에 할 수 없었고, 백천범의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그저 기분이 좋지 않으니 기운이 빠져 잠을 자는 시간이 늘고 입맛이 사라진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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