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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61)화 (360/1,192)

제361화

결국 다섯 번이나 넘어지고 나서야 사장풍은 힘이 죄다 빠져 버렸다. 순간, 그는 묵용감의 의도를 깨달았다. 묵용감은 단 한 번으로 그를 제압하고 굴복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일부러 한 번씩 그를 넘어트리며 일어나길 기다렸다.

그는 사장풍과 포고를 겨루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패배를 인정하는 모습을 지켜보려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사장풍을 혼내 주려 포고를 이용했을 뿐이었다. 그날 밤 백천범을 만나러 갔던 일을 이렇게 보복하고 있었다.

초왕은 이렇게나 뻔뻔하고 소심한 사람이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난 사장풍은 입가에 흐르는 붉은 피를 닦고 다시 겨루겠다는 손짓을 해 보였다. 질 수는 있어도 벌써 패배를 인정할 순 없었다.

묵용감은 조금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결국 이번 판은 사장풍에게 어떤 기회도 주지 않고 바닥에 넘어뜨린 후, 있는 힘껏 그를 내리눌렀다. 사장풍은 덫에 걸린 짐승처럼 발버둥을 치며 짓눌리지 않은 한쪽 다리를 들어 공격할 틈을 노렸다. 그러나 관중들은 이미 그의 패색이 짙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결국 가동이 사장풍의 다리를 밟으며 조용히 말했다.

“네가 왕야를 어떻게 이긴다고. 왜 사서 고생이야?”

바닥에 얼굴을 파묻은 사장풍에게서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한바탕 치열한 전투가 끝이 났다. 병사들이 보기엔 멋진 경기였지만 초왕과 사장풍의 두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얼룩져 있었다.

* * *

묵용감이 사장풍을 혼내는 동안, 백천범은 월향에게 아이를 가진 비법을 물었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데다 부부의 침실에서 일어나는 일인 만큼, 월향은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그러나 단단히 마음먹고 온 백천범과 월규의 등쌀을 월향이 어찌 이길까. 결국 그녀는 얼굴을 붉힌 채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날 월향은 집에 돌아온 뒤, 양보전이 또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를까 싶었다. 그녀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자발적으로 일을 성사시켰다.

물론 순탄치만은 않았다. 양보전은 힘겨워하는 그녀를 보더니 더는 하지 않겠다며 거부했다. 결국 월향이 위로 올라가 배수진을 치는 마음으로 단 한 번에 성공했다. 극심한 통증을 느꼈지만… 어쨌든 그녀는 성공해냈다!

한 번으로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 그녀는 며칠 뒤 한 번 더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러나 양보전이 절대 하지 않겠다며 극구 반대했다. 아이를 갖지 않을지언정 그녀를 아프게 할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그녀도 고통이 버거웠지만, 간절한 염원이 일을 성사시켰다. 그리하여 월향의 몸에서 새로운 생명이 자라나게 되었다. 임신한 뒤로는 몸이 점차 무거워졌고 음식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계속 잠이 쏟아지는 데다 기력도 조금씩 빠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에 자리 잡은 뿌듯함을 지우지는 못했다.

두 사람 앞에서 부끄러울 게 없던 백천범은 자신의 상황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낱낱이 고백한 그녀가 어느덧 울적한 기분에 잠겨 말했다.

“왕야께서 그리 노력하시는데 어찌 된 건지 소식이 없어.”

월향이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너무 많이 해도 생기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백천범이 언짢다는 듯 입술을 삐죽였다.

“나도 몇 번이나 말했는데 왕야께서 들은 척도 안 하시는걸. 이번엔 호되게 알려 줘야겠어.”

혹시라도 이 일로 초왕 내외가 다툴까 걱정이 된 월향이 서둘러 답했다.

“어쩌면 그 이유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듣자니… 자, 자세도 정확해야 한다더군요.”

월규는 출가 전인 여인이었다. 무지하면 더 겁이 없다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도 그녀는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당당히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월향이 말 들으셨지요? 마마께서도 위에 계셨습니까?”

백천범의 얼굴도 빨갛게 물들었다. 묵용감이 원했던 적은 있었지만 너무 부끄러워 시도하지 않았다. 설마 그게 문제였을까? 그녀는 고운 눈썹을 찌푸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월규가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월향이 말대로 한번 해 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천천히 하나씩 방법을 찾으면 될 것입니다.”

월향이 그녀를 위로하듯 덧붙였다.

“조급해하지 마셔요. 조급할수록 아이가 찾아오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부디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때가 되면 자연스레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 * *

사장풍과의 전투를 마친 초왕은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부인을 데리러 갔다. 그러나 백천범은 오기 전보다도 표정이 어두웠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물어보기도 난감한 터라, 그는 마음만 졸일 뿐이었다.

월향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마친 후, 두 사람은 함께 마차에 올랐다. 그가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부인, 어째서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오?”

백천범이 뿌루퉁한 얼굴로 말했다.

“이제는 왕야 마음대로 하시면 안 돼요. 제가 드린 일정표대로만 하셔야 한다고요.”

그녀의 말은 대번에 묵용감의 성질을 건드렸다.

“저 애들이 함부로 하는 말은 듣지 마시오. 그것과는 상관없는 일이오!”

이번엔 백천범의 목소리가 훨씬 컸다.

“상관없다고 누가 그래요? 월향이는 한 번에 성공했잖아요. 그런데 우리는요? 쉴 틈 없이 하는데도 생기지 않아요. 제가 차마 얼굴을 들 수가 없다고요…….”

묵용감이 황급히 그녀의 입을 막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다른 이가 듣지 않게 조심하시오. 그게 더 부끄러운 일이오.”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백천범은 여전히 축 처져 말을 이었다.

“…제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몸인 걸까요?”

그 말이 묵용감의 마음을 깊게 할퀴었다.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계속 그에게 화를 내도 좋으니 모두 그의 탓으로 돌리면 좋으련만. 결국 그는 그녀를 달래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대의 말대로 하겠소.”

백천범이 진지하게 말을 이었다.

“자세도 바꿔야 한대요. 저도 왕야처럼 위에 있어야 한다고 들었어요.”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번진 초왕은 연신 그리하겠다 답했다.

“그대가 하자는 대로 하겠소.”

비로소 만족한 백천범은 그의 품에 얌전히 기대어 손가락으로 치마에 달린 끈을 둘둘 감으며 장난을 쳤다. 한참 뒤, 그녀가 조용히 물었다.

“만약 제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면, 다른 여인에게 아이를 낳게 하실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대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누가 그러오?”

“만약이라고 했잖아요.”

그녀가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렇게 되면, 다른 여인에게 아이를 낳게 하실 거예요?”

왜 이런 질문을 거듭 던지는 걸까. 가슴이 서늘해지는 듯했지만, 그는 온화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하진 않을 것이오.”

까맣게 빛나는 두 눈을 들여다보며,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자식 운이 없는 팔자라면, 그 운명을 따르겠소. 이번 생은 그대만 있으면 충분하오.”

* * *

저택으로 돌아온 초왕은 그녀와의 약속을 지켰다. 침소에 들어서도 침대 가장자리에 바짝 붙어 백천범과 멀찍이 거리를 두었다. 뭔가를 해 보기는커녕 손도 닿지 않을 거리였다. 그녀의 말을 따르겠다는 그의 굳은 결심을 보여 주는 듯, 멀찍이 떨어져 있는 등이 잔잔하게 오르락내리락했다.

막상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정작 백천범의 마음이 술렁거렸다. 감수성이 예민해진 탓일까, 울컥 눈물이 차오른 그녀가 코를 훌쩍였다.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본 초왕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어째서 우는 것이오?”

그녀는 입을 꾹 다문 채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까맣고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가 서둘러 다가와 그녀를 품에 안고 다독였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고 눈 감으시오. 다 잘 될 것이오.”

까만 눈동자가 말없이 반짝이며 그를 향했다. 가엽고도 사랑스러운 표정에 절로 미소가 떠오른 그는 그녀의 이마에 조심스레 입술을 맞췄다. 여전히 까만 눈동자는 창백한 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번에는 코끝에 입을 맞췄다.

그래도 눈을 감지 않으니, 그는 더 아래로 내려가 부드러운 입술을 머금었다. 비로소 그녀가 긴 숨을 내쉬며 만족스러운 듯 눈을 꼭 감았다.

그녀는 잔잔한 숨을 내쉬었지만 초왕은 너무나도 괴로웠다. 이 긴긴밤을 그 홀로 어찌 보내야 한단 말인가?

그는 스무 해 넘게 잠들어 있었던 화산이나 다름없었다. 꾹꾹 억눌러온 열기는 일단 폭발하면 멈출 길을 모르고 솟구쳤다. 애끓던 시간을 견뎌 다시 만난 지 겨우 두 달이 조금 넘었으니, 한시라도 떨어지기 싫을 시기가 아닌가. 그녀에게 사랑을 마구 퍼붓는다 해도 부족할 지경인데, 대체 어찌 참아야 한단 말인가?

옥처럼 매끄러운 살갗이 품 안 가득 느껴졌고, 은은한 향기는 코를 타고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몸을 최대한 뒤로 빼서 거리를 두었다. 그녀가 그를 알아차리고 추태를 부린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더없이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백천범은 묵용감의 품에 안겨야 편히 잠들 수 있었다. 그의 가슴에 꼭 붙어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듣고 있으면 금세 마음이 안정되었다. 이대로 하늘이 무너진다고 해도 그만은 무너지지 않고 그녀를 지켜줄 것만 같았다.

이렇게 진심으로 의지하는 사람은 그가 처음이다. 묵용감은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꼭 연약한 덩굴처럼 느껴졌다. 묵용감이라는 커다란 나무를 휘감고 자라나, 그에게서 떨어지는 순간 쓰러져 버릴 가늘고 긴 덩굴.

언제부터 이렇게 변해 버렸을까. 그녀도 모를 일이다. 황보주아가 아직도 묵용감을 마음에 품었다는 말을 들은 후였을까. 아니면 아이를 기다리는 그녀의 간절함이 두려움으로 뒤바뀌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성장하며 조금 철이 든 탓에 예전처럼 단순히 생각하는 게 어려운 것일 수도 있었다. 뭐든지 손에 넣기 전엔 가슴을 졸이고, 가진 뒤엔 잃지 않으려 전전긍긍하는 법이지 않은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도 마찬가지였다.

점점 정신이 몽롱해졌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그의 다리에 자신의 다리를 감싸고 몸을 바짝 붙였다. 그 순간, 묵용감은 머릿속에 천둥이 내리치는 줄만 알았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 잠을 잘 수 있단 말인가, 이대로 말라 죽으라는 말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어느새 그의 손발은 각자의 주장을 펼치느라 분주했다. 그의 이성과는 달리, 빠르게 그녀의 옷 안으로 들어간 손가락은 갈망하는 곳을 찾아가기에 여념이 없었다.

백천범이 칭얼대며 몸을 틀었지만 깬 것 같진 않았다. 그는 조용히 부드러운 옷을 매만졌다. 불같은 그의 마음을 이기지 못해 받아주던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갑자기 눈을 번쩍 뜬 그녀가 날카롭게 말했다.

“약속해 놓고 왜 지키지 않으시는 거예요? 그러고도 대장부라고 하겠어요?”

“대장부라서 그렇소.”

그가 고개를 숙이고 뻔뻔스럽게 잡아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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