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0화
월향의 몸이 편치 않은 탓에 식사는 일찍 마무리되었다. 그리 티가 나진 않았지만 월향은 연신 배를 감싸며 조심스럽게 걸음을 내디뎠다. 양보전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가는 그녀에게서 후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천범은 끝 모를 부러움에 휩싸였다. 묵용감도 그녀에게 잘하고 있었지만, 지금의 월향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그녀는 엄마가 된 후 사랑을 듬뿍 받아 자부심이 넘치고 있었다. 아이가 없는 백천범으로서는 흉내 낼 수도 없는 모습이었다.
백천범은 비법을 배워야 했기에 월규를 데리고 월향의 뒤를 따랐다. 여인들의 대화에 낄 수 없었던 묵용감은 연병장으로 향해 병사들이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온 김에 사장풍도 만나 볼 생각이었다.
뙤약볕이 피부를 벗길 듯 따갑게 내리쬐었다. 가벼운 평상복을 입었는데도 가는 길 내내 등에서 땀이 흘러내렸다.
저 멀리서 우렁찬 함성이 들려왔다. 언덕 아래에서 모퉁이를 꺾어 돌자 웃통을 벗고 훈련을 받는 사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새까맣게 탄 그들의 피부가 햇빛을 받아 반들거렸다. 몸에 물을 끼얹은 듯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사내들에게서 활기가 넘쳤다.
묵용감의 시선이 한 사람에게 고정되었다. 똑같이 웃통을 벗고 탄탄한 상체를 드러냈지만, 그에게는 보통 병사들과는 확연히 다른 기개가 있었다. 차가운 표정으로 구호를 외치는 그에게선 영웅의 위엄마저 느껴졌다.
오늘은 왕비가 가족을 만나러 왔으니 그리 엄숙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 때문에 긴장이 풀려 있었는지, 가동이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사장풍! 사장풍!”
깜짝 놀란 병사들의 대열이 곧바로 흐트러졌다. 질서정연하게 훈련하던 병사들은 대군을 마주한 졸병처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빠르게 병사들을 훑은 사장풍이 고개를 들어 언덕을 바라보았다. 커다란 나무 아래 서 있던 사내가 그를 향해 양손을 번쩍 들어 인사하고 있었다.
초왕을 발견한 몇몇 병사들이 서둘러 옷을 집어 들었지만, 옷을 입어야 하는지 벗어야 하는지 몰라 망설이고만 있었다.
사장풍은 담담한 얼굴로 초왕에게 다가가 예를 갖췄다. 다시 대열을 정돈하고 사장풍의 뒤를 따른 병사들도 무릎을 꿇고 예를 갖췄다. 하늘을 찌를 듯 우렁찬 그들의 목소리야말로 훈련이 엄격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묵용감은 손을 내저으며 일어나라고 분부한 뒤, 사장풍에게 턱짓을 했다. 두 사람은 나무 그늘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게 무슨 말이더냐?”
초왕이 손가락으로 사장풍을 가리키며 물었다.
“적군의 정황을 염탐하여, 동태를 살펴야 한다?”
사장풍은 모호한 태도로 짧게 대꾸하더니 아무런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었던 초왕이 고소하다는 듯 웃었다.
“사씨 아가씨를 방비할 속셈이 그것이더냐?”
사장풍의 안색이 급변하더니 묵용감을 노려보았다.
“절 감시라도 하십니까?”
“본왕이 한가롭게 그런 짓이나 하겠느냐?”
묵용감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 마음씨 따뜻한 장인이 또 어딨겠느냐. 본왕으로선 상상도 못 할 일이다.”
월향의 혼삿날 한번 꺼내 본 말이었지만, 어명이라고 여긴 사성성은 크고 작은 일을 가리지 않고 속속들이 보고했다. 덕분에 사장풍의 태도를 꿰고 있었던 초왕은 그를 오수진에 묶어 두어 사앵앵이 실컷 괴롭히도록 둘 생각이었다.
그전까진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겉치레로 응수하던 두 사람이었지만, 오늘은 둘 다 솔직하게 속셈을 내보이고 있었다.
묵용감이 먼저 입을 열었다.
“도둑맞는 것보다 도둑맞을까 걱정하는 게 더 피가 마르는 법이지. 사장풍, 본왕은 네 행동이 심히 불쾌하구나.”
사장풍이 당당하게 답했다.
“이번엔 제가 먼저 찾아뵈었습니다.”
“왕비는 본왕의 부인이다. 정식으로 혼사를 치른, 본왕의 아내란 말이다.”
“이미 한 번 떨어져 지내시지 않았습니까?”
“설령 떨어져 지냈어도 내 아내라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묵용감이 입꼬리를 올리며 그를 비웃었다.
“이리도 어리석더냐. 남의 부인을 마음에 두어서 어찌하려고?”
“그때 왕비께서는 왕야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삐걱거리지 않는 부부 사이가 어디 있다고. 그리하여 빈틈만 노리는 것이냐?”
묵용감이 코웃음을 쳤다.
“헛수고일 뿐인 것을!”
사장풍이 어두운 안색으로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입을 뗐다.
“마마께서 잘 지내신다니 어쩔 수 없지만, 그게 아니라면 쭉 마음에 둘 것입니다.”
묵용감이 곧바로 얼굴을 굳혔다.
“감히! 내 곁에서 조금이라도 불편한 게 있겠느냐!”
“황보 아가씨가 왕야 곁에 있지 않습니까?”
“그저 누각에만 머무르는 애가 본왕과 무슨 상관이라고?”
“혼기가 찬 여인이 곁에 있다니요. 처첩도, 누이도 아닌 여인을 곁에 두어 좋을 게 있습니까? 게다가 왕야의 약혼자였던 여인입니다. 왕비께서는 왕야를 쟁취하기 위해 다투실 분은 아니지만, 신경이 쓰이실 수밖에 없을 겁니다.”
묵용감이 노기를 띤 얼굴로 말했다.
“태자께서 즉위만 하시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터. 그때가 되면 주아도 떠날 테니 더는 나와 왕비 곁에 있지 않을 것이다.”
사장풍이 슬쩍 조소를 흘리며 대꾸했다.
“그리되면 좋겠군요. 그날 밤, 왕비 마마께 말씀드렸습니다. 왕야께서 마마께 잘못을 저지르시거든 제가 용서치 않겠다고요!”
묵용감이 보란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 충심을 표해도 왕비는 들은 척도 않았겠지.”
그 말대로다. 울화가 치민 사장풍은 한참이 지나서야 마음을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
“역시 마마를 잘 아십니다. 직접 처리할 수 있으니 필요 없다고 하셨지요.”
묵용감은 예상이 적중하자 의기양양한 태도를 보였다.
“본왕이 본왕의 아내도 모를까 싶더냐? 쓸데없는 걱정이다. 본왕이 스스로에게 잘못을 저지를 수 있어도 아내에게 잘못할 일은 없으니까.”
사장풍이 고개를 끄덕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부디 오늘 하신 말씀을 기억해 주십시오. 그리하지 않으신다면 하극상을 보게 되실 겁니다.”
묵용감이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위아래로 훑었다.
“이미 하극상을 벌이지 않았느냐. 네 솔직함만큼은 높이 사마. 널 죽이면 천범이 난리를 칠 테니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그러나 널 죽이지 않는다고 네 행동을 전부 허용하는 것은 아니다. 또 이상한 짓을 했다간 그 목이 날아갈 줄 알거라.”
사장풍은 고개를 숙이더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묵용감은 다시 연병장의 병사들에게 시선을 주더니 문득 운을 뗐다.
“제법 잘 가르쳤더구나. 본왕이 오랫동안 훈련을 하지 않았는데 본왕과 몸 좀 풀어보겠느냐?”
사장풍의 눈이 반짝이며 저절로 고개를 들었다.
“저와 겨루시겠단 말씀이십니까?”
“싸움은 상대도 되지 않을 테니.”
묵용감이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포고布庫(만주족의 전통 놀이에서 유래한 격투기로, 씨름과 유사함)는 할 줄 아느냐?”
“예.”
“좋다. 그럼 포고로 겨뤄 보자.”
옷가지를 벗어 가동에게 내던진 묵용감이 탄탄한 상체를 드러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한 채 연병장 한가운데에 섰다. 흥미를 느낀 병사들이 어느새 훈련도 잊고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체격만 보면 둘 다 건장하고 용맹스러워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다만 묵용감의 몸에는 흉터가 매우 많았다. 특히 등에 화살을 맞아 생긴 흉터는 보는 이의 오금을 저리게 했다. 오래된 흉터라지만 또렷하게 남은 흉측한 형태가 당시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는지를 짐작게 했다.
초왕은 군신으로 명성이 자자한 사람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그가 뒤에서 명령만 내릴 뿐, 최전방에 서지 않는 줄 알았다. 설마 그가 전쟁터에서 직접 피 흘리며 싸웠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한 병사들이 숨을 들이켰다.
그의 흉터는 전쟁터에서 물러나지 않은 용맹함의 증거이자 혁혁한 전적이었다. 흉터를 보고 놀랐던 병사들은 차츰 경건한 마음으로 그를 우러러보았다.
포고는 동월국에서 즐겨 하는 놀이로, 황실에서부터 백성들까지 건장한 사내라면 누구든 포고를 할 줄 알았다.
사장풍도 군에 들어오기 전, 동네에서 포고를 잘하기로 이름을 날렸다. 그의 집에서 십 리 안에는 적수가 없을 정도였다. 도성에 온 후로도 짬이 날 때마다 부하나 동료들과 포고를 했는데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그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사랑은 이루지 못했지만, 자신 있는 포고만은 지고 싶지 않았다. 초왕과 이리 겨루게 되었으니, 각오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기고 싶은 마음이 클수록 쉽게 공격을 하지 못하는 법. 그는 잔걸음을 옮기며 공격할 때를 노렸다.
반면, 묵용감은 별다른 준비 자세도 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기술과 힘이 중요한 포고에서 저러한 자세는 상대방을 얕보는 것과 다름없었다. 내심 울컥한 사장풍은 기회를 엿보다 재빨리 손을 뻗었다. 묵용감의 요대를 잡아 단번에 메쳐 버릴 작정이었다.
그러나 묵용감이 그리 날쌔게 움직일 줄 누가 알았을까. 몸을 틀어 공격을 피한 묵용감은 팔꿈치로 사장풍의 어깨를 힘껏 눌렀다. 어찌나 힘이 센지, 사장풍은 헉 소리를 내며 고꾸라졌다. 묵용감이 짓누르는 탓에 팔다리가 땅에 닿은 사장풍은 첫판을 그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묵용감은 그제야 힘을 풀고 내려다보며 기세등등하게 웃었다.
사장풍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한 공격이었는데 어찌 초왕이 선점을 했단 말인가? 방심했다는 생각이 그의 투지를 일깨웠다. 벌떡 일어난 그는 팔을 툭툭 털며 허리를 살짝 굽히고 다시 겨뤄 보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묵용감의 표정은 여유가 넘쳤다. 입가에는 옅은 미소까지 짓고 있었지만, 사장풍을 내려다보는 눈빛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사장풍은 아까와 달리 주위를 맴돌며 기회를 노렸다. 그가 머뭇거리자 묵용감이 먼저 팔을 뻗어 왔다. 사장풍은 재빨리 물러났으나 눈 깜짝할 사이에 요대에 힘이 실렸다. 고개를 숙여 보니 묵용감이 다른 쪽 손으로 그의 요대를 꽉 붙들고 있었다.
어딜 감히! 사장풍은 그를 걷어차려고 한쪽 발을 들어 올렸다. 그 순간 몸 전체가 공중으로 붕 뜨는 느낌과 함께 그대로 하늘을 보며 눕고 말았다. 흠칫 놀란 그가 일어나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었지만, 묵용감이 빠르게 그의 팔을 비틀고 몸을 짓눌렀다. 조금도 틈을 내주지 않으려는 듯 매끄럽게 이어지는 공격이었다.
무장으로서 이리 허무하게 당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사장풍은 기지를 발휘해 재주넘기로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묵용감이 발을 걸더니 있는 힘껏 그를 바닥으로 밀쳤다. 또다시 심하게 넘어지자 절로 앓는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아팠다. 사장풍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겨루고자 몸을 일으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