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9화
황보주아는 벌써 두 시진 가까이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들은 백천범이 깜짝 놀라 물었다.
“두 시진이나요? 저는 반 시진도 참기 힘들던데, 어떻게 가능한 거예요? 언니는 무릎도 안 아플까요?”
“중간에 잠시 쉬는 시간이 있소. 쉰다고 해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주아는 어려서부터 연습했으니 참을 수 있는 것이오.”
묵용감이 그녀를 슬쩍 놀렸다.
“그대도 훌륭하오. 내가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면 계속 그 자세로 있지 않았겠소?”
부끄러워진 백천범이 황급히 말을 돌렸다.
“송자관음送子觀音(아이를 낳게 해 달라는 소원을 들어주는 관음)상은 어디에 모시고 있나요? 가서 기도를 드리고 싶어요.”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아이를 원했다. 처소 근방의 커다란 나무에 붉은 실을 묶고 날짜를 세며, 관계를 가져야 하는 날과 안 되는 날의 목록을 만들기까지 했다. 묵용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지켜볼 뿐이었다.
그녀가 아이를 원하니 그도 그녀의 뜻을 이루어 주고 싶었다. 그녀를 송자관음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자 곧장 무릎을 꿇더니 합장을 하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외웠다. 여느 때보다도 진지하고 경건한 모습이었다.
한쪽에 서서 그녀를 지켜보던 묵용감의 마음에 작은 갈등이 일었다. 그녀가 애끓는 건 싫지만, 그는 아이를 서두르고 싶지 않았다.
* * *
칠월 말이 되자 오수진에서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 날아들었다. 월향에게 경사가 찾아왔다! 이장이 보낸 사람이 관저로 와 소식을 전했고, 다들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신이 나 어쩔 줄 모르던 백천범은 한껏 들떠 보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표정이 시무룩해지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송자관음에 아이를 갖게 해 달라고 빈 사람은 난데, 어째서 월향이한테 간 거지? 월향이도 급하지만 그래도 날 잊어버리시면 안 되는데…….”
월규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왕비 마마, 어찌 그리 질투를 하십니까!”
백천범이 샐쭉하게 답했다.
“이건 질투가 아니라 부러워하는 거야.”
그녀가 두 손으로 턱을 괴고 중얼거렸다.
“어쨌든 누구라도 생겼으니 기쁜 일이지. 아기한테 줄 옷이랑 모자, 신발, 양말, 그리고 장명쇄長命鎖(장수를 기원하며 어린아이 목에 걸어주는 자물쇠 모양의 목걸이)도 준비해야겠다.”
녹하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들은 시댁에서 준비해 줄 테니, 마마께서는 장명쇄만 준비하십시오.”
백천범이 근심 어린 얼굴로 말했다.
“친정이 너무 없어 보이진 않을까? 초라하다고 여길까 걱정스러워.”
녹하가 코웃음을 쳤다.
“담이 열 개라도 그리는 못 하지요. 전진곤이 아직 군에 있지 않습니까? 감히 그리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군으로 보내 버립시오.”
사실 녹하는 왕비가 아기용품들을 준비하다가 기분만 울적해질까 싶어 걱정이었다. 최근 왕비는 아이 문제로 적잖이 우울해했다. 잘 웃지도 않을뿐더러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초왕은 그녀 모르게 시녀들에게 명을 내렸다. 왕비의 살을 찌우면 은자 한 냥을 내리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특히 기홍의 걱정이 컸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 새로운 음식을 내놓았지만, 입이 짧아진 왕비는 기홍의 체면을 봐서 몇 젓가락 맛볼 뿐이었다.
시녀들은 탄식만 내뱉었다. 저들끼리 회의를 하기도 했다. 사실 초왕은 매일 밤 최선을 다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월규가 얼른 한 가지 방법을 내놓았다.
“월향이가 이토록 빨리 임신을 했으니, 뭔가 방법이 있는 게 아닐까요? 아무래도 비법을 배워 오는 게 좋겠습니다.”
그 말에 백천범은 한시라도 빨리 월향을 만나고 싶었다.
그녀가 오수진에 가고 싶다고 하니 초왕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바쁜 일만 끝내면 바로 그녀를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그럴수록 백천범의 마음만 다급해졌다. 날개가 없어 날아가지 못하는 게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녀는 혼자 다녀오겠다는 말을 꺼냈다.
초왕은 굳은 얼굴로 단칼에 거절했다. 하지만 그녀가 양쪽 볼에 입을 맞추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타이르자, 그도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원래는 사장풍부터 다른 곳으로 보내 놓고 찾아갈 생각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지금 당장 그녀와 출발해야 했다.
마차는 앞뒤로 친위병의 호위를 받으며 빠르게 오수진으로 향했다. 지난번처럼 엄청난 행렬은 아니지만 작지 않은 규모였다.
가뭄이 이어진 탓에 몇몇 개울은 얼룩덜룩한 바닥을 훤히 드러냈다. 둑에 자라난 잡초는 물론 길게 뻗은 나뭇가지마저 맥없이 늘어져 있었다. 기운을 잃은 풍경이 안 그래도 울적했던 백천범을 더욱더 시무룩하게 했다.
묵용감이 손을 뻗어 그녀를 감싸 안았지만, 그녀는 팔을 뻗어 밀어냈다. 그녀가 성가시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더워요.”
묵용감의 마음이 절로 씁쓸해지는 옆모습이었다. 아이를 갖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인데 아이를 가지면 얼마나 더 밀려나야 한단 말인가? 그녀가 어찌 그리 아이를 원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무도 비집고 들어올 틈 없이 서로만을 바라보며 살아가면 되지 않는가?
그가 가장 아끼는 사람은 바로 그녀였다. 그녀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다 들어줄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엔 마음처럼 되지 않는 일도 있는 법이다. 그렇게 애를 쓰는데 아이가 찾아오지 않는 것을, 그가 어찌 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참을성이 많았지만 이 일만큼은 자꾸만 조바심을 냈다. 요즘 들어 쌀쌀맞게 대하는 걸 보면 그의 잘못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그가 넉살 좋게 다가가며 물었다.
“어찌 또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이오?”
최근 백천범은 이유 없이 화가 났다. 특히 묵용감에게 그랬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그에게 분풀이를 하고 싶었다. 그녀도 그의 잘못이 아니란 걸 알지만, 치솟는 감정이 제어가 되지 않았다. 갑작스레 내리는 소나기처럼 울분이 치밀었다가 금방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녀는 천천히 그에게 몸을 기대고 그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만의 애정 표시였다. 초왕은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었다. 아내는 나이를 먹어도 이렇게 아이 같은 구석이 있었다.
초왕과 초왕비가 온다는 소식에 온 마을이 떠들썩했다. 초왕 내외를 맞이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온 백성들이 길 양쪽에서 무릎을 꿇었다.
비록 태자를 찬양하는 목소리가 하늘을 찌를 기세였지만 오수진의 백성들은 초왕을 더 우러러보았다. 오수진과 초왕비의 인연을 생각하면 초왕은 이곳의 사위나 다름없으니, 태자보다 더 가깝게 느껴질 수밖에.
겉치레를 싫어하는 백천범은 발을 걷고 일어나라고 소리쳤다. 고개를 든 백성들이 그녀의 아리따움에 감탄했다. 준수하고 예의 바르던 소년과 아름다운 초왕비를 누가 동일 인물이라 생각하겠는가!
사람들이 몰려들며 거리는 더욱더 혼잡해졌다. 친위병들은 길이 막히자 쩔쩔맬 따름이었다. 거리를 메운 사람들은 백성들이기도 하지만 왕비의 식구나 다름없는 이들 아닌가. 그들을 강하게 내몰 수는 없었다.
다소 지체되었지만 묵용감은 그리 불쾌하지 않은 기색이었다. 가는 길이 어떻든 초왕은 아무 상관 없었다. 곁에 왕비만 있다면, 그는 어디든 좋았다.
초왕 내외는 왕비가 살았던 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보는 곳이었지만 예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먼지 하나 없이 쓸고 닦아, 언제든 돌아와 묵을 수 있을 만큼 깨끗했다. 줄곧 울적했던 백천범의 기분을 천천히 누그러뜨리는 듯했다. 그녀는 월규와 집 안팎을 오가며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다.
묵용감은 방 안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그의 입가에도 미소가 걸렸다.
식사 시간이 되자 이장이 찾아와 그들을 취선루로 안내했다.
묵용감이 언질을 주었다.
“오늘은 가족을 만나러 온 것이니 관련이 없는 자는 부를 필요 없네.”
이장이 허리를 굽히며 공손히 대답했다.
“암요, 안 그래도 식구들만 불렀습니다.”
이장은 초왕의 마음을 읽고 향신들과 사장풍을 부르지 않았다. 심지어 양보전의 부모도 얼굴만 잠시 비쳤을 뿐 초왕과 함께 식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조금 늦게 도착한 월향이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양보전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던 월향의 얼굴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초왕과 백천범을 발견한 그녀의 얼굴에 기쁨의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그녀가 얼른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려 했다.
백천범이 황급히 다가가 월향을 일으켰다.
“홑몸도 아닌데 그러지 마. 절대 안 돼.”
월향을 유심히 살핀 백천범이 물었다.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 어디 아픈 거야?”
월향이 아직은 평평한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몸이 매우 둔해졌습니다. 음식을 먹기만 하면 게워 내는 탓에 힘이 들어 그런가 봐요.”
야위긴 했어도 월향의 눈망울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배를 어루만지는 손길에도 자랑스러움이 묻어나왔다. 백천범은 그런 월향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아이만 가질 수 있다면, 하늘이 빙빙 돌 만큼 토해도 좋았다.
양보전은 월향에게 열심히 배웠는지 이젠 제법 듬직하고 진중한 모습으로 예를 갖췄다.
초왕과 초왕비는 월향 부부와 함께 식사를 했다.
백천범은 월규도 함께 자리에 앉혔다.
“오늘은 자매들끼리 모이는 날이니까, 신분 같은 거 따지지 말자. 나랑 월향이는 신랑을 데려왔는데 월규 넌 언제 데려올 거야? 이제 너만 남았어.”
그녀는 애초에 두 시녀를 남이라 여기지 않아 남월각에서 지낼 때도 항상 셋이 밥을 먹었지만, 오늘은 초왕이 함께 있으니 두 시녀의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오늘의 초왕은 유난히 자상했다.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채 줄곧 따스한 눈빛으로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세 여인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는 백천범에게 음식을 덜어 주거나 생선 가시를 발라 주며 조용히 듣기만 했다. 얼핏 보기엔 초왕이 아니라 꼭 그녀의 식사 시중을 드는 사람 같았다.
초왕비를 향한 각별한 애정은 저택에서부터 봐 왔으니 그리 생소하지 않았다. 모두가 익숙해진 듯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이어 갔다.
다만 의외인 건 양보전의 행동이었다. 월향을 어찌나 세심하게 챙기는지, 묵용감 못지 않았다. 월향의 옆에서 빈틈없이 그녀를 살피는 모습만 보고 있자면, 그가 바보라는 사실을 누구도 믿지 못할 터였다.
월향이 부끄러워하면서도 뿌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아이를 가지고 나니 조금 철이 든 듯합니다.”
문득 백천범이 고개를 돌려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
묵용감은 그 눈빛의 의미를 생각했다.
‘내가 철이 없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