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8화
“어쨌든 아주버님께서 다치셨으니, 수고롭겠지만 언니가 잘 돌봐 주세요.”
황보주아가 당연하다는 얼굴로 답했다.
“물론이지요.”
그런데 저 계집이 눈은 왜 찡긋거린단 말인가? 다 이해한다는 표정은 무엇이고?
별안간 태자가 그들의 말을 끊었다.
“난 앞뜰에 있으니 보는 눈이 많다. 네가 오기도 불편할 테고, 시중을 드는 이들도 있으니 주아 네가 번거롭게 간호하지 않아도 된다.”
그의 말뜻을 알아들은 황보주아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태자 오라버니 말씀이 맞습니다. 출가도 하지 않은 여인이 공공연히 모습을 드러내도 좋지 않지요. 오라버니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백천범은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그날 밤 서로 포옹까지 했으면서 왜 지금은 저렇게 거리를 둔단 말인가? 설마 묵용감이 알게 되면 안 좋게 볼까 봐?
“그게 뭐 어때서요? 주아 언니와 둘째 아주버님 두 분은 미혼이시니 좋은 배필이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두 사람을 이어 주고 싶어, 그녀는 진심을 털어놓았다.
“아주버님과 주아 언니도 죽마고우시잖아요. 함께 자란 데다 주아 언니가 숨어 지내실 때도 아주버님께 도움을 받았으니 역경을 이겨낸 정도 깊겠지요. 정말 하늘이 맺어 준 인연이 아니겠어요? 아, 제가 왕야께 말씀드려서 두 분을 밀어드릴까요?”
“…….”
“…….”
대체 자신들이 뭘 어쨌다고 저런 이야기를 꺼낸단 말인가?
태자가 건조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왕비, 그런 농담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황보주아는 화를 억누르지 못하며 언성을 높였다.
“저와 태자 오라버니는 남매 사이나 다름없습니다. 어찌 함부로 중매를 서려 하십니까?”
남녀 간의 정이 아니었다면 어찌 그날 포옹을 했단 말인가? 그래, 초왕을 신경 쓰는 게 틀림없었다.
그녀가 무미건조하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시어요. 왕야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두 분이 잘되시면 혼사를 치를 때 좋은 선물을 주시겠다고 하셨어요.”
결국 태자가 굳은 얼굴로 불쾌함을 드러냈다.
“왕비, 두 번 다시 이런 말을 언급하지 마세요. 주아에게 흠이 되는 일입니다.”
황보주아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한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녀가 얼굴을 감싸 쥐더니 황급히 뛰쳐나갔다.
백천범이 멍하니 서 있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뭔가 잘못 말했나요?”
태자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주아는 정말로 남매 사이나 다름없습니다. 주아는 줄곧… 휴, 되었습니다. 왕비도 저 애가 가여운 애라는 사실을 알아 두고, 이런 얘기는 다시 꺼내지 마세요.”
돌아가는 내내 백천범은 태자의 말을 곱씹었다. 두 사람이 남매의 정만 나누었다면, 황보주아는 지금도 묵용감을 마음에 두고 있을까? 별안간 그녀의 가슴에 커다란 돌덩이가 얹혔다.
* * *
칠월이 되어도 비는 내릴 조짐이 없었다. 가뭄이 점점 심각해지는 터라 태자는 남산의 대청불사大靑佛寺에 올라 비를 기원하는 예불을 드리기로 했다. 초왕과 왕비, 황보주아도 그 뒤를 따랐다.
병사들이 호위하는 마차의 행렬이 이어지자 백성들이 넋을 놓고 지켜보았다.
묵용감은 백천범과 나란히 마차를 타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마차 장막을 젖히고 한 손으로는 아내에게 연신 부채질을 해 주기 바빴다.
“목이 마르진 않소? 물 좀 마시겠소?”
백천범이 고개를 저었다.
“언제쯤 도착해요? 졸려요.”
그가 그녀를 감싸 안고 자신의 다리에 눕혔다.
“눈 좀 붙이시오. 도착하면 깨워 주겠소.”
백천범은 그리하겠다고 답했다. 마차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통에 잠이 쏟아졌다. 날이 더워져서인지 부쩍 잠이 많아진 그녀였다. 시녀들이 깨우지 않는 날엔 묵용감이 관청에서 돌아온 후에야 일어나기도 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다. 마차가 움직이는 대로 몸이 흔들리는 모습이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묵용감은 혹여 그녀가 떨어질까 싶어 한쪽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부채질을 이어갔다. 힘들기는커녕 달콤하고 흐뭇한 마음이 차올라 더운 줄도 몰랐다.
자세히 바라보니 그녀의 얼굴이 전보다 갸름해져 있었다. 날씨가 더운 탓에 입맛이 없어져 수척해진 듯했다. 다만 성장이 필요한 부분은 충분히 성장해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욕구가 솟구쳤지만, 그는 시선을 살짝 돌렸다.
그녀를 단잠에서 깨우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지금은 절에 예불을 드리러 가는 길이다. 경건한 마음으로 가지 않으면 혼쭐이 날 수도 있으니 욕구를 절제해야 했다.
산 위로 올라오니 성보다 훨씬 쾌적했다. 빽빽이 들어선 나무들이 드넓은 그늘을 만들어 주었는데 시원한 기운이 가마 안까지 스며들었다. 백천범은 꿈을 꾸는지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묵용감은 그녀를 조금 더 세게 감싸 안았다. 마차 밖을 내다보니 절이 가까워져 있었다. 그가 조용히 그녀를 깨웠다.
“천범, 다 왔소.”
백천범은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좀처럼 일어나려 하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눈꺼풀에 입을 맞췄다.
“게으른 고양이 같으니. 안 일어나면 보살님에게 혼쭐이 날 것이오.”
백천범은 칭얼거리다 곧 하품을 하며 말했다.
“다 왔어요?”
“다 왔소.”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틈을 타, 그는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기세등등하게 웃었다.
대청불사는 수성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사찰로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었다. 위압적인 크기의 관음상이 연탑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는데, 둥근 얼굴과 내리깐 두 눈, 머리에 오불관五佛冠을 쓴 채 평온하고 인자한 표정으로 만물을 굽어살피는 듯했다.
원래는 금빛 동상이었지만, 언제인지는 몰라도 푸른 유약을 덧칠했다고 한다. 푸른빛이 관세음보살의 장엄하고 인자한 모습을 더욱 돋보이게 했고, 그 후로 ‘푸를 청靑’자를 넣어 대청불사라고 불렀다. 수성 사람들은 물론 여행을 온 자들도 꼭 한 번 들러 참배를 드릴 만큼 유명한 곳이었다.
황보주아와 백천범은 각자 자신이 쓴 경문을 향상에 올려놓은 뒤, 방석에 무릎을 꿇고 조용히 비를 기원했다. 황보주아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그녀의 집에는 불당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동월국의 귀부인들은 불교를 숭배하며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녀도 어머니를 따라 어려서부터 참배를 드렸고, 방석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리거나 좌선하는 법도 꾸준히 익혔다.
그러나 백천범은 달랐다. 그녀는 오래 앉아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일단 무릎은 꿇었지만, 좀이 쑤셔서 참기 힘들 지경이었다. 하지만 법당에는 그녀와 황보주아뿐만 아니라 목탁을 치며 경건하게 염불을 외는 큰스님들도 있었다.
함부로 자리를 뜰 수 없던 그녀는 눈을 감은 채 다리의 욱신거림을 참아냈다. 경을 외는 소리가 잔잔하게 이어지니 이보다 더 좋은 자장가가 없었다. 몇 차례 몸을 흔들거리던 그녀는 아예 이마를 바닥에 붙이고 잠이 들어 버렸다.
백천범을 힐끔 바라본 황보주아는 경건하게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에 다소 놀랐다. 그녀가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줄은 몰랐다. 그러나 놀라움도 잠시, 의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언뜻 코를 고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미세하긴 해도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또렷했다.
그녀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하필 이리도 장엄하고 엄숙한 곳에서 잠이 들다니! 머리를 조아리고 엉덩이를 치켜든 꼴을 보니 그녀의 얼굴이 다 화끈거릴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백천범을 소리 내어 깨울 수도 없었다. 스님들에게 웃음거리가 될 게 뻔했으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되자, 황보주아의 경멸만 커지고 있었다.
마침 초왕과 태자는 주지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백천범의 성격을 잘 아는 만큼, 초왕은 슬슬 그녀의 한계가 왔으리라 생각했다. 그는 적당한 핑계를 대고 그녀를 보러 갔다.
법당 밖에서 그녀를 발견한 그는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단정하게 엎드려 기도를 하는 모습은 황보주아와 견주어도 부족함 없이 훌륭했다. 이미 초왕의 눈에는 부인의 모든 행동이 완벽하고 사랑스러웠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지켜보았다. 문득 곁눈질을 해 보니 황보주아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아무래도 무릎을 오래 꿇고 있으니 괴로운 모양이다.
그는 조금만 참아 보라는 의미로 그녀에게 가볍게 손짓했다. 어린 부인도 꾹 참고 예불을 드리는데 어찌 명문가 출신인 황보주아가 참지 못할까.
눈이 마주치자 황보주아가 입을 삐쭉 내밀며 연신 눈짓을 보냈다. 너무나도 노골적인 신호에 그가 조심스레 다가갔다.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황보주아는 묵묵히 턱을 올려 백천범을 가리켰다. 묵용감이 손을 뻗어 그녀를 부르려는 순간, 작게 흥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흠칫 놀란 그의 안색도 부자연스러워졌다. 황보주아가 눈치를 준 이유가 이거였다!
어찌하겠는가? 예불을 드리다 이리도 예쁜 모습으로 잠들었으니, 보살님도 웃고 넘어가리라.
그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품에 안아 올린 뒤, 그대로 법당을 나섰다.
그녀는 여전히 깰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품을 파고들며 편한 자리를 찾더니 더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초왕은 그녀를 안고 나무 그늘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조금 난감했지만, 다행히 사찰은 고요하고 한적했다. 눈길을 돌려보아도 인기척이 없었다. 그는 방 대신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오래된 수목 주변으로 사람의 허벅지보다 굵은 뿌리가 솟아올라 있었다. 저들끼리 뒤엉킨 뿌리가 움푹 파인 공간을 만들어 냈다. 적절한 자리를 찾은 묵용감은 나무 둥치에 천천히 몸을 기대었다. 커다란 수관樹冠이 햇빛을 가려 주었고, 큼직한 나뭇잎이 나부끼며 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품에 안긴 여인은 침을 흘리면서 단잠에서 헤어나올 줄을 몰랐다. 그는 미소를 흘리며 옷소매로 그녀의 입가를 닦아 주었다. 이내 그녀의 이마에 볼을 가져다 댄 그가 천천히, 두 눈을 감았다.
이따금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손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간질였다. 머리 위에서 불어오는 미풍을 맞으며 그녀의 향기에 둘러싸인 이 순간, 그는 삶의 절정에 서 있는 듯했다. 태자는 권세를 원하고 황제는 천하를 원하지만, 그는 그저 고요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그녀와 함께 맞이하고 싶었다. 묵용감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따스한 햇볕과 산들거리는 바람이 두 사람의 단잠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거의 동시에 눈을 떠 오늘 처음 만난 듯이 웃어 보였다. 이윽고 다정하게 입을 맞춘 두 사람의 눈망울에 잔잔한 기쁨이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