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7화
며칠 후, 영구가 학평관을 데려왔다. 백천범을 다시 만난 학평관은 그간 가슴 졸였던 날들이 떠올라 북받친 듯 눈물 콧물을 다 쏟았다. 백천범도 마음이 아렸다. 자신이 떠난 일로 학평관이 이토록 속앓이를 했을 줄은 몰랐다. 사정을 모르는 이였다면 오랫동안 헤어진 혈육을 다시 만났다고 착각할 터였다.
묵용감이 묵직하게 헛기침을 하자 학평관은 얼른 허리를 숙이고 눈물을 훔쳤다.
“소인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여 왕비 마마께 흉한 꼴을 보였습니다.”
백천범이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니에요. 어르신을 이리 걱정하게 했으니, 다 제 잘못인걸요.”
학평관은 습관적으로 자신의 주인을 내세웠다.
“소인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왕야께서 괴로워하시는 모습이 더 속상했을 뿐입니다. 왕비 마마께서 떠나시고, 왕야께서는 정말 혼이 나간 사람처럼 지내셨습니다. 어찌나 수척해지셨는지, 보기만 해도 소인은 눈물이 날 정도였습니다…….”
민망해진 묵용감이 연신 헛기침을 했다.
“이 노인네가, 못 본 사이에 어찌 이리도 말이 많아졌는가.”
학평관은 꾸지람을 들어도 한없이 기분이 좋았다. 소매로 눈물을 훔친 학평관은 어느새 예전처럼 알랑거리는 미소를 보였다.
“예, 예. 그간 열심히 갈고 닦은 덕에 더 잔소리꾼이 되었습니다.”
다들 왁자지껄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해후로 인해 소란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두 사람만은 침묵을 지켰다. 한 명은 문 옆에, 한 명은 백천범 뒤에 서서, 그들만의 언어로 마음을 나누는 듯 눈을 떼지 못했다.
재회의 달콤함은 천천히 그리움을 녹이고, 어느덧 그들의 얼굴에도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옆에 있는 이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무슨 일로 저리 웃는지 두 사람은 전혀 알지 못했다. 그저 서로에게 온전히 빠져들어 있을 뿐.
소란스러웠던 재회를 마무리하고, 학평관은 백천범을 따라 안채로 향했다. 내실에 그가 처리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문을 나서던 기홍은 따뜻한 손이 그녀의 손끝을 스치는 느낌에 멈칫했다. 고개를 숙인 그녀가 입꼬리를 올려 어여쁜 미소를 남기고 떠났다.
그녀가 떠난 뒤로도 영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녀의 미소는 영구의 세상을 완전한 봄날로 바꾸어 놓았다. 결국 묵용감이 그의 정신을 일깨웠다.
“들어오지 않을 생각이냐?”
고개를 돌려보니 가동이 히죽거리고 있었다.
‘너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라는 말이 그의 얼굴에 고스란히 떠올라 있었다. 영구는 곧바로 얼굴을 굳히고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소인, 왕야의 분부에 따라 사명을 완수하였습니다. 역시 왕야의 예상대로였습니다. 이 장군님의 부상은 심각했으나, 목숨에는 지장이 없어 은신처로 모셨습니다.
상대는 엄청난 규모의 조직이었습니다. 전국 각지에 세력이 뻗어 있을 정도지만, 행보는 다소 특이했습니다. 강북에 제법 큰 세력이 자리잡고 있어 자세히 조사하려 했지만, 경계가 워낙 철저한 탓에 발각될 우려가 있어 내부까지 침입하진 않았습니다.”
보고를 들은 묵용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지금은 발각되면 안 된다. 다만… 강북에 그리 큰 세력이 있을 줄이야. 유헌이 그의 사람이었다니, 폐하는 그곳에 아무의 손도 닿지 않았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나 이미 그의 천하로구나. 주둔군도 암암리에 병력을 늘려 두었겠군.”
영구가 신중하게 물었다.
“태자 전하께서는 어째서 북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셨습니까? 이 장군의 암살까지 서슴지 않고 계획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북진을 했다면 유헌은 자연스레 항복했겠지.”
영구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저희 쪽에서 미리 투항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의 목적은 강북이 아니라 위수 이북이다. 내가 황제에게 모질게 대하지 못할까 싶어 속력을 내고 싶었겠지. 나와 황제 사이의 갈등을 악화시켜야 전쟁이 빠르게 끝날 테니.”
“소인의 생각에 태자 전하께서는 남북 통치에 진정으로 동의하시지 않은 듯합니다. 암암리에 세력을 지니고 계실 정도라면, 왕야께서도 대비를 하셔야 합니다.”
“한때 동궁전에 있던 분이다. 어느 정도의 세력은 있을 수밖에. 그 주도면밀한 성격을 생각해 보면 놀랄 일도 아니구나.”
묵용감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하니, 서로 계획을 세워 두는 수밖에 없지. 사이에 담벼락 하나만을 두고도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는구나. 이게 바로 황실에서 일컫는 혈육의 정이다.”
영구가 침묵 끝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째서 직접 물어보지 않으십니까?”
“내게 사실대로 말해 줄 생각이었다면 물을 필요도 없었을 테지. 그러나 말해 주지 않을 생각이라면 무엇 하러 묻겠느냐?”
잠시 망설이던 영구가 의견을 내었다.
“왕야, 태자 전하께서 즉위하시면 대세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대처를 결정해 두셔야 합니다. 지금은 태자 전하께서 왕야께 의지하시니 표면적으로는 화기애애해도, 암암리에 손을 쓰시고 있음을 아시지 않습니까?
소인은 훗날 태자 전하께서 황제 폐하처럼 변해 버릴까 걱정입니다. 왕야뿐만 아니라 왕비 마마를 위해서라도 부디 방도를 고민해 주십시오.”
묵용감은 어떠한 동요도 없이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한마디를 내뱉었다.
“생각해 둔 바가 있다.”
결국 영구는 남은 말을 가까스로 삼켰다. 그가 아는 초왕은 다른 이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다르지 않은가. 그가 지켜야 할 사람이 생겼으니, 예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굳이 세세하게 알려 주지 않아도 초왕 또한 잘 알고 있으리라.
* * *
쉬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을 거스르듯 날씨는 무덥기만 했다. 식을 줄 모르는 더위와 건조함이 결국 화재를 불러왔다. 다행히 불길이 거세지 않아 방 두 칸만 태웠을 뿐, 사상자 없이 빠르게 진화할 수 있었다.
불길을 완전히 잡고 나서야 소란스럽던 상황이 안정을 되찾았다. 군중들 사이에 늠름한 공자가 섞여 있었다. 그도 함께 불을 끄느라 옷이 더러워지고 얼굴도 검게 그을렸지만, 자연스레 배인 기품을 감출 수 없었다.
누군가 그를 알아보고 황급히 소리쳤다.
“태자 전하!”
그 소리를 듣자마자 백성들이 우르르 무릎을 꿇었다.
태자가 웃으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필요 없네. 고단했을 터인데 어서 일어들 나시게.”
태자의 어질고 상냥한 품성은 항간에 소문이 파다했다. 태자를 직접 마주한 백성들은 소문이 과장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다들 그를 둘러싸고 찬양을 아끼지 않았다.
남쪽의 군주에 대해 그들의 견해는 두 가지로 나뉘었다. 어떤 이들은 태자가, 어떤 이들은 초왕이 즉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휴전하기 전까진 초왕을 남쪽의 왕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았다. 태자는 늘 초왕의 후광에 가려져 있었기에 인지도가 높은 편이 아니었다.
휴전 이후 안정을 되찾게 되자 태자가 얼굴을 비치는 일이 늘어났다. 태자는 무더운 날씨에도 가옥 재건 상황을 확인하는 등 백성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며 열심히 순시를 돌았다. 그런 모습이 백성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만담을 들려 주는 차관茶館 같은 곳에서도 태자에 관한 이야기로 공연을 하니 그를 칭송하는 이들이 나날이 늘어 갔다.
반면 초왕은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백성들의 시야에서 서서히 옅어지고 있었다. 점차 태자를 군주로 받아들이게 된 백성들은 그가 이곳의 군주임을 영광스럽게 여기며 공경을 다 했다.
돌아갈 시간이 되었기에 태자는 백성들에게 인사를 고하려 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는 순간, 엄습하는 고통에 얼굴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놀란 백성들이 또다시 그의 주위로 모여들었다. 개중 눈썰미가 좋은 이가 그의 소매에 번지는 핏자국을 발견했다. 태자가 소매를 걷어 올리니 팔에 상처가 나 있었다. 어딘가에 세게 긁힌 듯 피부가 다 벗겨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불을 끌 때 팔에 나무판자가 떨어졌다. 판자의 가시가 박혀 들어간 모양이었다.
군주는 재채기만 해도 근심을 사는 법인데 피를 보였으니 오죽할까! 사람들은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의원이 살고 있어, 그가 황급히 달려와 태자의 상처를 치료했다.
태자는 치료받는 내내 온화한 태도를 보였다. 팔에 박힌 가시를 뽑을 때도 미간 한번 찌푸리지 않고 담담했다. 백성들 사이에서 작게 감탄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치료를 마친 태자는 몇몇 수행원들에게 둘러싸여 곧바로 관저로 돌아갔다.
관저로 돌아온 뒤, 태자는 수행 의관을 불러 다시 상처를 확인했다. 의관이 큰 상처가 아니라는 진단을 내리자 그제야 다들 한시름 놓았다.
태자의 소식을 접한 황보주아가 창백해진 얼굴로 그를 찾아왔다. 팔에 흰 붕대를 감고 있는 그의 모습을 마주하자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을 듯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먼저 와 있던 백천범이 그녀를 위로하고 나섰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주아 언니. 다행히 작은 상처라 큰 문제는 없을 거래요.”
황보주아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작은 상처라니? 어찌 저리 가볍게 말한단 말인가? 군주는 머리카락만 빠져도 시중을 드는 이들이 스스로의 뺨을 때리는 게 법도였다. 하물며 태자의 몸에서 피가 났는데, 작은 상처라니!
태자가 정식으로 즉위하진 않았어도, 다들 그를 미래의 군주로 여겼다. 백천범은 그 사실도 모른단 말인가? 그녀의 가벼운 말투는 태자를 허드렛일이나 하는 인부로 대하는 듯했다.
기분이 나빠진 황보주아가 가시 돋친 말을 내뱉었다.
“셋째 오라버니께서 다치셨어도 그리 말씀하시겠습니까? 분명 울고불고 난리를 치셨겠지요.”
생각지도 않은 대답에 백천범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울겠어요, 작은 상처일 뿐인데요. 왕야께는 심한 상처가 많은걸요.”
그녀가 손짓을 하며 황보주아에게 설명했다.
“등 쪽에 있는 큰 상처는 화살에 맞은 건데 살점이 다 떨어졌었대요. 그리고 저는.”
그녀가 자신의 무릎을 가리켰다.
“넘어져서 여기 피부가 다 벗겨졌어요. 바짓단이 죄다 피로 물들어서 월향이랑 월규가 울었을 정도예요. 하지만 전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애들이 오두방정을 떤 거죠.”
태자는 그녀의 말이 우스울 뿐이었지만 황보주아는 되려 성이 나고 말았다.
“셋째 오라버니는 무관이신 데다 왕비 마마께서도 자주 넘어지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이런 상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겠지요. 태자 오라버니는 다릅니다. 어려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으며 동궁전에서 자라신 황태자이십니다.”
“주아야, 그리 심각한 게 아니다.”
태자가 웃으며 상황을 수습했다.
“왕비의 말이 옳다. 별일 아니니 너무 성내지 말거라.”
백천범은 황보주아가 태자를 아끼는 마음에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만약 묵용감이 다쳤다면 그녀도 속상해서 어쩔 줄 몰라 했을 터였다. 그녀는 개의치 않고 황보주아에게 눈을 찡긋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