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6화
술을 마시긴 했지만 묵용감은 평소처럼 일찍 눈을 떴다. 언제 일어났는지 백천범이 까만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저절로 새어나오는 웃음을 머금었다.
“어찌 그리 보고 있소?”
그녀가 나지막이 그를 불렀다.
“왕야.”
그녀가 그에게 몸을 바짝 붙여 왔다.
덜컥 겁이 난 그는 서둘러 그녀를 품에 안고 물었다.
“무슨 일이오?”
“꿈을 꿨어요.”
“무슨 꿈을 꾸었소?”
“왕야가 절 데리고 말을 탔는데, 한참 달리다가 제가 떨어졌어요. 풀숲에 앉아 목이 터지게 왕야를 부르는데, 왕야는 들리지 않는지 그대로 가 버렸어요.”
그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 기이한 꿈을 꾸었단 말이오? 내가 날 잃어버릴 순 있어도 그대를 잃어버릴 일은 없소.”
그가 그녀의 볼에 입을 맞추며 다독였다.
“어찌 이리 바보 같단 말이오.”
그녀를 잃는다면 그의 목숨을 잃는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르지만, 묵용감은 끝내 말을 삼키고 천천히 백천범을 토닥거렸다.
조용히 품에 안겨 있던 백천범이 우물거리다 입술을 뗐다.
“왕야, 그날 밤 사…….”
“지난 일은 굳이 꺼낼 필요 없소.”
그의 입술이 그녀의 코끝으로 부드럽게 미끄러졌다.
“시간이 이르니 조금 더 자겠소?”
백천범이 낑낑거리며 몸을 비틀다 입술을 삐죽였다.
“왕야, 어딜 만지시는 거예요? 이러면서 더 자라고요?”
묵용감이 큰소리로 웃더니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자겠냐고 물은 말은 이것이었소…….”
말을 마치기 무섭게 그녀의 목덜미를 파고드는 따스한 온기가 있었다.
두 사람의 인기척을 듣고 들어왔던 기홍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그때 녹하는 밖에서 가동을 한창 혼내고 있었다.
“시간이 그렇게 많았는데 아직도 말씀 안 드린 거야?”
가동이 목을 움츠린 채 대꾸했다.
“한 장군님이 오시는 바람에 기회가 없었어.”
“말씀드렸으면 왕야께서 술주정 부리실 일도 없었잖아. 그래, 안 그래?”
“그거야 그렇지. 나도 걷어차이지 않았을 테고.”
가동이 중얼거리다 억울하다는 듯 덧붙였다.
“그래도 한 장군님이 자리를 지키고 계시는데 내가 어찌하겠어?”
“됐어. 하여튼 일 처리하고는.”
녹하는 언짢은 얼굴로 혀를 차더니 그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얼른 가, 그렇게 서 있지 말고. 가서 네 할 일이나 해.”
가동이 슬쩍 눈치를 보더니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부인, 우리 혼사는…….”
“얼른 안 가? 어디서 뻔뻔하게 혼사 얘기를 꺼내?”
녹하는 눈을 부릅뜨더니 방으로 휙 들어가 버렸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그녀의 뒷모습에 가동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왕야와 왕비 마마가 다투신 건데, 왜 내가 혼나는 거야?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난 일개 호위 무사일 뿐인데.”
* * *
하루하루가 사장풍의 마음을 애끓게 했다. 지금껏 사는 게 이리도 힘이 든 적이 있었던가? 그나마 월말이 며칠 남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에게 위안이 되어 주었다. 곧 사앵앵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니 울적함이 조금은 가시는 듯했다.
그러나… 명을 전하러 온 한 장군의 말을 들은 그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대로 쭉 오수진에 머물라니? 쭉이라는 게 대체 언제까지란 말인가……. 어쩌면 한평생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불길한 예감을 느낀 그가 겨우 입을 뗐다.
“한 장군님,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만 순환 근무를 하지 말라니요?”
한 장군이 방도가 없다는 듯 말했다.
“나도 이유를 알고 싶다. 어쨌든 왕야의 명이니 따를 수밖에 없지 않느냐.”
사장풍의 짙은 눈썹이 한껏 일그러졌다.
“왕야의 간사한 계책이군요! 정말 너무하십니다!”
한 장군이 실실 웃으며 그를 위로했다.
“오수진이면 얼마나 좋은 곳이냐? 풍경도 좋고 음식도 맛있는 데다, 거처도 훌륭하지 않느냐. 유무전은 떠나기 싫어했을 정도였다. 왕야께서 널 특별히 대해 주시는데 감사하진 못할망정 너무하다니, 이것 참 배은망덕한 놈이구나.”
“왕야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제가 모를 줄 아시나 본데…….”
사장풍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왕야의 뜻대로 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왕야께 원한이라도 있느냐?”
한 장군은 사장풍을 떠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럴 리가 없지. 왕야의 성격이라면 널 곧장 죽이시고도 남을 텐데?”
“뒤가 켕기실 테니까요.”
“왕야께서 네게 빚을 지시기라도 하였느냐?”
사장풍은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설마 왕비 마마 때문에? 왕비 마마와…….”
“갑자기 무슨 헛소리이십니까?”
사장풍이 소리를 지르더니 곧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왕비 마마의 명예를 더럽히려 한다면, 한 장군님이라 해도 용서치 않겠습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한 장군은 펄쩍 뛰며 급히 손을 내저었다.
“왕비 마마의 명예를 더럽히다니! 그저 지나가는 말이거늘, 어찌 왕야처럼 노발대발한단 말이냐? 안 그래도 이 말 때문에 왕야께서 날 베려 하셨단 말이다.”
사장풍은 그를 노려보다 검을 집어넣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왕비 마마께서 예전부터 너와 친분이 있으셨던 게 아니냐고 물었지.”
지금 생각해도 간담이 서늘했다. 그게 뭐 그리 대역무도인 말이라고, 칼까지 뽑아 든단 말인가?
사장풍은 코웃음을 쳤다. 한 장군이야 알 턱이 없지만, 그 말은 초왕의 역린이나 다름없었다. 그와 백천범을 한데 엮었으니, 성을 내며 칼을 휘둘렀을 모습이 눈에 훤했다.
“사 장군, 정말 왕비 마마와 친분이 있느냐?”
사장풍은 겁나지 않았기에 한통이 팔로 그를 툭툭 쳤다.
“어허, 말 좀 해 보래도.”
사장풍이 한통을 힐끔 바라보았다.
“묻지 않는 게 좋습니다. 알아서 좋을 일도 아니고요.”
“아니, 대체 이게 무슨 태도냐?”
건방진 그의 태도에 한통은 불쾌함을 숨기지 못했다. 아무리 장군이라지만 그래도 자신의 수하인데 이리도 오만방자하게 굴다니.
사장풍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하기만 했다.
“사적인 일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한 장군은 버럭 성질을 내고 싶었지만 초왕 앞에서 한껏 방자하게 구는 사장풍을 떠올리며 화를 억눌렀다. 초왕도 어찌 못하는데 그라고 방도가 있을까?
* * *
한바탕 사랑을 퍼붓고 나니 서글펐던 감정은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졌다. 초왕과 초왕비는 다시 즐거운 한때를 만끽했다.
묵용감이 다정하게 백천범을 감쌌다.
“오늘은 관청에 나가지 않고 그대와 함께 있겠소.”
백천범의 눈이 살짝 커지더니 그를 타일렀다.
“바로 앞이 관청인데 보고 싶으시면 잠시 오시면 되잖아요. 대장부가 일은 안 하고 부인 곁만 맴돌면 다들 뭐라고 하겠어요?”
“알겠소. 가겠소. 대신 간식을 보내 주시오.”
백천범이 입을 삐죽거리며 답했다.
“꿈 깨세요. 드시고 싶으면 왕야가 직접 오셔야지요. 날이 이렇게나 더운데 어찌 왕비인 제가 직접 가져가겠어요?”
“이런, 이런! 뒤끝 없다던 사람이 트집을 잡는구려. 알겠소, 내가 직접 오겠소.”
그가 고분고분하게 나오자 백천범은 배시시 웃어 보였다.
“장난친 거예요. 더운 게 뭐 대수라고요. 오수진에서 지낼 땐 더운 날씨에 미꾸라지도 잡았는걸요. 그런 게 힘든 거지, 간식을 가져다드리는 건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러니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묵용감은 그녀가 고생했던 일들을 들을 때마다 마음이 저릿했다. 그가 그녀의 손을 조심스레 쥐고 입을 맞췄다.
“정말 가여워서 보기 힘드오. 손이 어찌 이리 거칠어졌소? 양유羊乳가 피부에 좋다던데 자주 담가 보시오.”
“왕야께서 그런 것도 아세요?”
백천범이 의외라는 듯 묻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양유는 마셔야 하는 거잖아요. 손을 담그는 데 쓰기엔 아까워요.”
그가 단호하게 답했다.
“그대에게 쓰는 건 무엇이든 아깝지 않소.”
잠시 후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떤 음식은 신체 부위를 발달시킨다던데, 조금 마셔 봐도 좋겠구려.”
따뜻한 손이 그녀의 몸을 주물럭거리며 물었다.
“그대의 생각은 어떻소?”
그녀가 그의 손을 찰싹 때리며 흘겨보았다.
“아직도 제가 작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럴 리가. 말도 안 되지.”
그는 얄궂은 표정을 보이더니 손짓까지 해 보였다.
“보시오. 내 손에 꼭 맞지 않소. 더 자랐다간 한 손에 잡히지도 않겠소.”
얼굴이 새빨개진 백천범은 있는 힘껏 그를 밀어냈다. 묵용감은 웃음을 터뜨리며 침대 끝에서 버텼지만 이미 반쯤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문 앞에 서 있던 기홍과 녹하가 고개를 내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장막이 들썩거리더니 단단한 다리가 장막 틈으로 삐죽 빠져나오는 게 아닌가. 놀라서 입이 벌어진 두 시녀는 곧장 문밖으로 몸을 숨겼다.
* * *
초왕은 역시 성실한 사람이었다. 진시에 눈을 뜬 그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곧장 관청으로 향했다.
홀로 공무를 보고 있는데 가동이 쭈뼛거리며 들어왔다.
“왕야, 분부하셨던 일을 알아냈습니다.”
묵용감은 그 일에 이미 흥미가 사라진 터였다. 어쨌든 다 지난 일이 아닌가. 그가 손을 내저었다.
“되었다. 너도 그만 잊거라.”
가동이 조급하게 말을 이었다.
“왕야, 듣지 않으시겠다니요. 왕비 마마께서…….”
“왕비가 왜?”
“소인 생각에는 왕야께서 꼭 들으셔야 합니다.”
저렇게나 열을 내니, 묵용감으로서도 제법 흥미로웠다.
“내가 꼭 들어야 한다?”
“예, 들으시면 분명 기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래?”
묵용감이 가동을 힐끗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한번 말해 보거라.”
목청을 가다듬은 가동이 사장풍의 굵직한 목소리를 흉내 내었다.
“천범 아가씨, 잘 지내셨습니까?”
이번에는 새된 목소리로 백천범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물론 잘 지내죠. 그보다 절 찾아오시면 안 돼요.”
“보고 싶었습니다.”
“단념하세요. 저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왕야의 사람입니다. 이번 생과 다음 생, 다다음 생까지도 왕야와 함께할 테니 찾아오지 마십시오.”
가동이 눈물까지 글썽이며 굵은 목소리를 냈다.
“천범 아가씨, 정말 너무하십니다.”
가동은 속상해하는 사장풍을 흉내 내며 얼굴을 가리고 밖으로 나가는 시늉을 했다.
묵용감은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연기가 끝났는지 가동이 문 옆에 멈춰 섰다.
“…그게 끝이냐?”
“…….”
그럼 무얼 더 바란단 말인가…….
“이리 오너라.”
가동이 슬며시 앞으로 다가갔다.
“이리 가까이 오래도.”
초왕은 웃음을 참는 듯 미묘한 얼굴로 손짓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지만, 명을 거역할 수 없었기에 가동은 초왕의 근처까지 다가갔다. 순간, 초왕이 의자 팔걸이를 짚고 그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썩 꺼지거라!”
가동은 구르다시피 하며 허겁지겁 방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초왕의 발길질은 생각보다 가벼웠고, 호통 소리에 옅은 웃음기까지 묻어났다. 꾸며냈다는 걸 초왕이 알아차렸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일은 이렇게 마무리되는 듯했다.
묵용감은 의자에 앉아 피식 웃고 말았다. 가동이 이야기를 지어냈다는 걸 어찌 모르겠는가. 다만 하인들이 그와 백천범을 위해 온갖 궁리를 했으니 그 정성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사장풍과 백천범이 무슨 말을 했든 이미 지난 일이었기에 그는 앞으로 두 번 다시 언급하지 않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