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왕비초장성 (355)화 (354/1,192)

제355화

“…….”

묵용감이 천천히 손을 떨궜다.

그 틈에 검을 빼앗은 백천범이 물었다.

“왜 한 장군님을 죽이겠다고 하셨어요?”

묵용감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방금 그녀가 때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천범은 분주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 장군님은요? 어디에 숨은 거예요?”

“…….”

“정말로 어떻게 하신 거예요?”

“…….”

“한 장군님! 한 장군님! 괜찮으신 거예요? 어서 나오세… 엥, 다들 어디 간 거람?”

수풀 속에 숨어 있던 한통은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지금 그를 찾아낸다면 사형대에 올리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초왕이 왕비에게 맞는 모습을 보고도 어찌 목숨을 부지하겠는가? 한통은 왕비가 초왕을 데리고 돌아가기만 간절히 빌고 또 빌었다…….

백천범은 하인들을 시켜 한통을 찾으려 했지만, 불쑥 나타난 팔이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만 찾으시오, 어차피 못 찾을 테니.”

“왜요?”

백천범의 얼굴이 곧 하얗게 질렸다.

“설마… 벌써 해하신 거예요?”

묵용감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무고한 자를 그리 쉽게 죽이는 사람으로 보이오?”

“그럼 왜 검을 들고 죽이겠다고 하셨어요?”

그저 술김에 소란을 피우고 싶었다. 소란을 피우면 그녀가 찾아오리라는 걸 알았으므로. 종일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그녀가 너무나도 그리웠지만, 후원에 찾아가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에게 상처를 주었으니 그 또한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겉으로 보기엔 서로 비긴 상황이었지만, 사실은 다르다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애당초 불공평하지 않았던가.

그의 마음에 비하면 그녀의 마음은 일 할에 불과하리라. 그러니 그녀의 화는 쉽게 가라앉겠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화가 날 때마다 온 마음이 가시덤불에 둘러싸인 듯했다. 사장풍을 죽이지 않는 이상, 그는 영원히 가시덤불을 껴안고 살아가야 할 터였다.

그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 갑시다. 데려다주겠소.”

백천범이 혼란스러워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대체 취한 거예요, 안 취한 거예요?”

그가 어쩐지 처량해 보이는 웃음을 머금었다.

“취했소. 안 취하기도 했고.”

알 수 없는 대답을 내놓은 그가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시오.”

잠시 멀뚱히 서 있던 백천범은 검을 든 채 그의 뒤를 따랐다.

발소리가 완전히 멀어진 후에야 한통이 수풀을 헤치며 나왔다. 두 사람의 뒷모습은 저 멀리 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가 한숨을 내쉬며 옷에 붙은 나뭇잎을 털었다.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하마터면 말 한마디에 목숨까지 잃을 뻔했군. 나 원 참.”

* * *

묵용감과 백천범은 따로 걸으며 안채로 향했다.

기홍이 술이 깨는 데 좋은 차를 가져왔다. 묵용감은 멀구슬나무로 만든 커다란 의자에 앉아 천천히 차를 들이켰다.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덕분에 취기는 말끔히 가셔 있었다.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이 떠오르자 옅은 후회가 밀려 왔다. 초왕의 신분으로 어찌 이리도 체통 없이 굴었단 말인가? 무엇보다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일은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술기운을 빌려 마음을 표현하는 건 나약한 행위라고 여겨 왔다. 줄곧 그렇게 믿었던 만큼, 오늘의 일은 그 자신도 예상을 벗어난 일이었다.

까마득히 높은 경지에 있던 사내가 고귀함을 잃고 추락한 것처럼, 그는 어느새 질투심 많고 초조해하는 평범한 사내가 되어 버렸다. 그녀도 그런 자신을 우습게 생각하지 않을까. 그는 힐끔거리며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백천범은 제 둥근 손톱을 손끝으로 매만지고 있었다. 어느 손톱에 거스러미가 일어났는지 자세히 살피는 듯했다.

시녀들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았다. 그들 중 누가 감히 나서서 이 분위기를 깨트리겠는가.

묵용감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어린아이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처럼 그저 초조하고 불안할 따름이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할지 감이 오지 않아 멍하니 앉아 있는데, 갑자기 두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태자와 황보주아였다. 두 사람은 차례로 문턱을 넘어 기품 있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조용하고 기묘한 침묵에 휩싸인 방에 들어서자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내 태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랫것들이 말하길, 초왕이 술을 마시고 앞뜰에서 소란을 피웠다더구나. 터무니없는 말이지. 네 주량을 내가 잘 아는데, 네가 어찌 소란을 피웠겠느냐? 역시, 조용한 걸 보니 헛소문에 불과했구나.”

묵용감은 어색한 헛기침을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황보주아는 옆쪽에 앉아 있는 백천범의 안색을 살폈다.

“왕비께서 기분이 좋지 않은 듯하군요. 셋째 오라버니가 술을 많이 드셔서 그러십니까?”

백천범이 그제야 고개를 들어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그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채 시선을 피했다. 그 모습이 황보주아의 시야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녀가 옅게 웃으며 말했다.

“셋째 오라버니께서도 나라를 세우시느라 많이 힘드시겠습니다. 워낙 일이 많으니 답답하시겠지요. 고작 술 조금 드신 게 큰일이겠습니까. 도울 수 없는 일이라면 우리는 후원을 지키며 우리의 일을 하는 게 좋겠지요.”

백천범이 태연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술을 마시고 주정을 부리는 건 별일도 아니죠.”

태자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역시 왕비는 도리를 잘 아는군요.”

백천범은 더없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왕야는 제 지아비이신걸요. 이 정도도 이해하지 못하면 어찌 부부 사이를 이어 가겠습니까?”

“왕비의 말이 옳습니다.”

태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초왕과 초왕비의 정을 모든 이들이 알고 있는데, 어찌 이런 일로 왕비가 셋째에게 성을 내겠습니까?”

막상 대화가 오가자 묵용감은 코끝을 만지작거릴 뿐 여전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평소에는 근엄하기만 한 사람이 자꾸만 움직이며 눈치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불편한 게 뻔히 보였다.

그의 황망한 시선이 황보주아를 향하자, 그녀가 곧장 입을 열었다.

“아, 셋째 오라버니께서 돌아오시면 월향의 일을 처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어찌하시기로 하였는지요? 전진곤이라는 자는 쉽게 용서해선 안 됩니다. 밤새 이곳까지 데려다준 사 장군의 노고를 헛되이 할 수는 없지요.”

묵용감은 여전히 찻잔을 든 채 멍하니 앞만 바라보았다.

조금 민망해진 백천범이 대신 입을 열었다.

“전진곤은 군에 보내기로 하였습니다.”

황보주아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게 벌이란 말입니까?”

“제가 낸 의견입니다.”

백천범이 부끄럽다는 듯 덧붙였다.

“왕야께서는 목을 베거나 유배를 보내자고 하셨는데, 너무 잔인한 것 같아서요. 군에 보내 훈련을 받는 게 나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귀하게 자란 도령이니 음식도 입에 안 맞을 테고, 훈련까지 받는다면 충분히 고역이겠지요. 그래도 사람의 도리를 깨우치지 않겠습니까.”

황보주아가 가볍게 웃으며 입을 가렸다.

“왕비께서는 너무 인자하십니다.”

그녀였다면 손발을 자르거나 눈알을 뽑는 형벌을 내렸을 터였다. 월향을 건드리려 했다는 사실보다는 감히 월향의 신분을 건드렸다는 사실에 죄를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더러운 자는 멀리서부터 고약한 냄새가 나는 법인데, 직접 접촉했다니 말할 것도 없었다. 오래전부터 귀천이 나뉜 만큼 신분에 도전하는 자는 누구라도 엄벌에 처하는 게 옳았다.

백천범은 뒤늦게 ‘사 장군’이라는 말을 의식하고 켕기는 마음에 몰래 묵용감을 바라보았다. 때마침 그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 시선이 얽힌 순간, 이번에는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불안해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그의 두 눈에 담겼다. 입 안에 남은 진한 차보다도 씁쓸한 뒷맛이 남았다. 그러나 그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태자와 황보주아는 잠시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갔다.

두 사람이 떠나자 묵용감과 백천범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이대로 둘 수 없던 기홍이 녹하에게 눈짓을 보냈고, 두 사람에게 다가가 목욕을 권했다.

동시에 일어난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멋쩍어하며 시선을 돌렸다. 결국 묵용감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왕비가 먼저 씻으시오.”

마침내 온화한 목소리로 말한 그였지만,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백천범이 사라질 듯 희미한 한숨을 내쉬었다.

“술을 드셨으니 왕야께서 먼저 씻고 주무세요.”

그녀의 말에 묵용감은 기홍을 따라나섰다. 그가 떠난 뒤, 백천범도 월규의 시중을 받아 목욕간에 들었다. 두 사람의 목욕간은 나란히 붙어 있어, 화려한 유리 병풍을 사이에 두고 반대쪽의 불빛과 그림자가 어렴풋이 아른거렸다.

묵용감은 목욕을 할 때 시중을 받지 않았기에 홀로 몸을 담갔다. 백천범은 월규와 녹하의 시중을 받으니 병풍 너머로 여러 개의 그림자가 비쳤지만, 그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의 그림자는 평소와 달리 조용히 몸을 담그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따금 물이 찰박이는 소리만이 목욕간을 울렸다. 그는 조용히 몸을 담그고 있었지만, 마음은 요란하게 들끓었다. 그녀의 마음을 의심하진 않았지만, 그가 그녀의 전부였으면 했다. 그녀가 깃털만큼이라도 사장풍에게 마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을 잃어버릴 만큼 분노에 사로잡히고 말리라.

그녀의 마음은 오롯이 그를 향해야 했다. 그의 마음이 그녀에게만 향하듯이…….

백천범은 묵용감보다 일찍 침소로 돌아왔다. 얇은 침의를 입고 머리를 늘어뜨린 그녀가 침대 안쪽 끝에 등을 돌리고 누웠다. 묵용감과 다시 만난 후로 함께 잠을 청했지만, 오늘은 그가 이곳에서 올지 확신이 없었다.

만약 다른 방에서 잔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사장풍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그녀도 잘 안다. 그래도 그가 정말 오지 않는다면, 그녀를 홀로 잠들게 한다면… 견딜 자신이 없었다.

어렴풋이 잠이 들 무렵,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가 장막 안으로 들어왔다. 그 기척이 그녀를 부드러운 이불에 감싸는 듯했다. 그녀는 마음을 놓고 천천히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그는 평소처럼 그녀의 옆에 누워 허리에 손을 얹고 머리에 턱을 괴었다. 정수리 부근에 느껴지는 숨결이 여느 때처럼 따스했다.

갑작스레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녀가 몸을 돌려 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어느새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한 음성이 내려앉았다.

“나 때문에 깬 것이오?”

그녀는 살며시 고개를 젓고 그저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 또한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평소처럼 그녀를 재워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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