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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54)화 (353/1,192)

제354화

어쨌든 발목이 잡혔으니, 한통은 마음을 다잡고 얌전히 자리를 지켰다. 저녁 시간이 되자 초왕은 하인을 불러 옆방에 술상을 차리게 한 후 한통과 마주 앉았다.

이왕 자리가 마련된 만큼 격식을 갖추기로 한 한통이 공손히 초왕의 잔을 채운 후에 자신의 잔을 채웠다. 잔을 들고 초왕을 올려다보려는데 초왕은 이미 술잔을 들이켜고 있었다. 이내 빈 술잔이 한통의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

“뭘 그리 넋을 놓고 있느냐? 어서 따르거라!”

한통은 별수 없이 일단 술을 따랐다.

“왕야, 천천히…….”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초왕이 벌컥 술을 들이켰다. 한통은 조심스레 초왕의 심정을 추측해 보았다. 술을 즐기지도 않는 그가 울적함을 달래고자 선택한 방법이 술이라니. 그러나 아무리 술에 강한 이라도 연거푸 들이켜는 술에는 당할 길이 없다. 저리 마시다간 몸이 상할 수밖에…….

“왕야, 이러지 마십시오. 무슨 일이 있으시거든 속앓이하지 마시고 말장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본왕이 무슨 일이 있겠느냐. 그저 술을 마시고 싶거늘, 그마저도 허락을 맡아야 한단 말이냐?”

초왕이 옅게 붉어진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초왕의 시선에 조금 위축된 한통은 다시금 술잔을 채워 줄 수밖에 없었다. 마시다 보면 언젠가 속내를 털어놓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 * *

성이 잔뜩 난 백천범은 안채에 돌아오자마자 창가에 걸린 향낭을 낚아채 바닥에 던졌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발로 마구 걷어차기까지 했다.

월규가 적잖이 놀라 다가왔다. 늘 해맑은 왕비가 어찌 저리 화가 났단 말인가?

“왕비 마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월규가 얼른 바닥에 나뒹구는 향낭을 주워들었다. 초왕에게 주기 위해 왕비가 직접 수를 놓던 게 아닌가. 발로 마구 차는 걸 보니 초왕에게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월규가 더러워진 향낭을 털어내며 말했다.

“어찌 향낭에 화풀이를 하십니까. 향낭이 마마를 괴롭히기라도 하였는지요?”

백천범이 걸상에 풀썩 앉아 소리를 질렀다.

“그 향낭 다 조각조각 잘라 버려!”

“아이고, 어찌 이렇게나 화가 나셨을까!”

월규는 성이 잔뜩 난 그녀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무슨 일인지 말해 보십시오. 소인이 시비를 가려 보겠습니다. 누가 우리 왕비 마마를 이렇게 화나게 하였습니까?”

속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백천범인 터라, 곧장 그간의 일을 월규에게 몽땅 털어놓았다. 그녀가 탁자까지 내리치며 씩씩댔다.

“내가 기껏 가져다줬는데 먹어 보라는 말도 안 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만 하시잖아! 정말 너무하지 않아?”

월규가 알겠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타일렀다.

“왕야께서 마마를 아끼셔서 하신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날이 더우니, 오가는 길에 혹여 더위를 먹을까 봐 그런 말씀을 하셨겠지요. 마마, 다음부턴 소인들이 다녀오겠습니다.”

백천범은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지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틀려. 왕야의 말은 진심이 아니었어. 내가 그것도 못 알아차렸을까 봐?”

“왕야께서 무엇 하러 마음에도 없는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왕야께서는 왕비 마마를 누구보다 아끼시는 분입니다. 왕비 마마가 걱정되셔서 하신 말씀이겠지요. 어제 일만 봐도 그렇습니다. 한밤중에 오셨어야 하는 분이 성문이 닫히기도 전에 오시지 않았습니까? 전부 왕비 마마를 그리워하셨기 때문입니다.”

백천범은 한참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더니 월규의 손에 있던 향낭을 다시 창가에 걸어 두었다. 그녀가 서운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래도 나한테 그리 말씀하시면 안 되지.”

왕비의 장점은 화가 나도 오래가는 법이 없고 타이르는 말을 곧잘 듣는 점이었다. 왕비의 마음이 한결 풀린 듯해 월규는 미소를 보였다.

“원래 가까운 사람일수록 더 신경질을 내는 법이지요. 왕야께서는 늘 침착하시지 않습니까? 다른 이에게는 절대 그런 내색을 하지 않으셔도, 마마께는 하시잖아요.”

백천범은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럼 나름대로 영광인 셈이네.”

월규가 달래준 덕분에 백천범은 속상한 마음을 훌훌 털어냈다. 저녁을 먹고 토끼들과 장난을 치며 놀고 있는데 기홍이 과일을 들고 왔다.

“마마, 어서 손 씻고 수박 좀 드시어요. 달고 아삭아삭한 게 아주 맛있습니다.”

신이 난 백천범은 손을 닦고 곧장 탁자로 달려갔다.

“와, 수박이 어디서 난 거예요?”

“백성들이 태자 전하께 드렸다고 합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수박을 그리 좋아하지 않으셔서 이곳으로 보내 주셨습니다.”

백천범이 얼른 수박을 한 조각 집어 들었다.

“백성들이 태자 전하께 드렸다고요? 왜요?”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녹하에게 한번 물어보십시오. 가동 무사님은 뭐든 녹하에게 말해 주시니 알지도 모릅니다.”

마침 녹하가 차를 들고 왔다. 문 앞에서 기홍의 말을 들었는지 그녀가 태연히 맞장구를 쳤다.

“왕비 마마, 요즘 태자 전하께서 매일 관저 밖으로 나가 민생을 살피시며 백성들의 고충을 해결해 주십니다. 그 덕분에 백성들이 태자 전하를 어진 군주라 칭하며 우러러본다고 합니다.”

백천범이 수박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그래요? 이렇게 더운데 날마다 밖을 다니시는 거예요?”

“그래서 칭송이 자자하지요. 백성들의 고통을 덜어 주시지 않습니까.”

“왕야를 칭찬한다는 얘기는 없어요?”

“그건… 못 들어 봤습니다.”

백천범의 기분이 묘하게 가라앉았다. 태자가 훌륭한 사람이긴 하지만, 초왕도 못지않게 훌륭한 사람이다. 전쟁 중에도 백성들에게 최대한 피해가 가지 않게 신경 썼고, 성에 난 불도 앞장서서 진화하지 않았던가.

백성들의 터전을 재건하고 휴전까지 결정해서 평안한 삶을 되돌려 주었는데… 어째서 초왕을 칭송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걸까.

입 안의 수박이 달콤하고도 서글픈 뒷맛을 남겼다.

그때 한 시녀가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왕비 마마, 어서 와 보십시오. 왕야께서 취하셔서 한통 장군님을 죽이시겠다며 검을 휘두르고 계십니다.”

눈이 휘둥그레진 백천범이 수박을 내팽개치고 급히 뛰어갔다. 앞뜰에 다다르기도 전에 묵용감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썩 나오너라. 이런 소인배 같은 놈, 어딜 숨어 있느냐? 어서 나오래도, 본왕이 단칼에 죽여 주마!”

그녀는 몸서리를 치면서도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지만 사람을 죽이겠다고 소란을 피우다니,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앞뜰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초왕의 보초병들은 그가 몸을 돌리자 긴장하여 움직이지도 못했다. 혹시라도 그의 칼날이 자신들을 겨눌까 겁을 먹은 터라, 덜덜 떠는 이도 있었다.

그나마 초왕과 가장 가까이 있던 가동이 칼을 뺏으려고 몇 차례나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해 물러나길 반복했다.

쑥대밭이 된 앞뜰에 마침내 백천범이 도착했다. 그녀가 눈앞의 광경을 보자마자 큰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가동은 겨우 한시름 놓았다. 왕비가 왔으니 초왕이 어찌 더 주정을 부릴까.

역시나, 좀 전까지 닥치는 대로 사람을 베어 넘길 듯 흉포하던 초왕이 우뚝 멈춰 섰다. 그가 충혈된 눈으로 멍하니 왕비를 바라보았다.

백천범이 그에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어서, 검 이리 주세요.”

초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를 향한 눈빛이 다소 낯설었다. 꼭 그녀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멍하기만 했다.

백천범은 다시 한번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 이리 주세요.”

초왕은 석상이라도 된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백천범이 직접 검을 뺏으려 했다. 그러나 그녀가 손을 뻗자마자 초왕이 곧바로 검을 치켜 들었다. 절대 주지 않겠다는 뜻이 역력했다.

백천범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저, 오늘 기분 별로니까 안 건드리시는 게 좋을 거예요. 어서 검 이리 내세요.”

초왕의 앞에 서니 그녀는 바람에 휘날리는 풀꽃처럼 연약해 보였다. 얼굴을 치켜들자 새하얗고 아름다운 목선이 드러났다. 그가 힘을 들이지 않아도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 연약하고 덧없는 존재였다.

그랬는데, 그래야 하는데 그녀의 기세와 날카로운 눈빛 앞에서는 그는 한없이 움츠러들었다.

취기가 오르긴 했으나 정신은 거의 멀쩡했다. 가동에게서 그날 밤 이야기를 들은 뒤로 그의 가슴에 일어난 불길이 도무지 사그라들지 않았다. 처음엔 내색하지 않으며 태자와 담소도 나누고 즐겁게 술을 마셨다. 그 과정에서 허점은 조금도 드러내지 않을 만큼, 그는 스스로를 제어하고 있었다.

그러나 독한 술이 들어갈수록, 마음속에 자리 잡은 흉포한 짐승이 송곳니를 드러내었다. 그는 반드시 취해야만 했다. 술에 취하면 더는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녀도, 사장풍도, 가슴을 태우는 불길도 잊히는 듯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술을 반쯤 비웠을 때, 한통이 그의 심기에 기름을 붓고 말았다.

그래, 오랜만에 피 맛 좀 보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전쟁터처럼 피비린내가 자욱한 곳에서만 냉정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이 여인은, 어찌 그걸 몰라준단 말인가?

“뭘 꾸물거려요, 어서요!”

그녀의 자그마한 입술이 날카로운 외침을 내뱉었다. 꼭 부모가 아이를 혼내는 듯한 말투였다.

그는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사람이건만, 어째서 아직도 사장풍과의 연을 끊지 못한단 말인가? 대체 그가 사장풍보다 부족한 점이 무엇이기에?

그래, 나이 차이가 있다. 하지만 차이가 날수록 상대를 더 아껴 주는 법이다. 사장풍이 그녀를 자신만큼 아껴 줄 수 있는 사내란 말인가? 그의 머릿속은 질투와 초조함으로 복잡하게 엉켜 버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백천범이 까치발을 들고 검을 낚아채려 했다. 그러나 그녀의 키로는 어림도 없었다. 지켜보는 눈이 많았던 터라 그녀는 더욱더 화가 치솟았다.

“어서 줘요, 계속 버티면 때릴 거예요!”

날카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자 묵용감의 눈동자에 잠시 빛이 스쳤다. 그러나 그녀의 엄포는 우스울 뿐이었다.

“감히 날 때리겠다고 했소?”

“못 때릴 줄 아세요?”

가동이 보초병들에게 눈짓을 보내자 다들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왕비가 정말 왕야를 때리는 광경을 보고 싶긴 했지만, 차마 남아 있을 수는 없었다. 정말 그 광경을 보았다간 술이 깬 초왕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

묵용감은 연거푸 비웃음을 흘렸다.

“그렇소? 어디 한번 때려 보시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백천범이 그의 엉덩이를 있는 힘껏 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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