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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53)화 (352/1,192)

제353화

녹하에게 이끌려 목욕을 하러 간 그녀는 목욕통에 편히 몸을 기대면서도 갈등에 사로잡힌 얼굴이었다.

“녹하 언니, 역시 가지 말까 봐요. 왕야께서 바쁘시면 방해만 하는 거잖아요.”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녹하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다.

“왕야께 왕비 마마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럼 점심에는 왜 오지 않으신 건데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태자 전하와 나랏일을 논하셔야 한다고 말입니다.”

녹하가 마른 수건으로 그녀의 등을 닦아 주며 말을 이었다.

“왕비 마마, 언제부터 이리 소심해지셨습니까? 겨우 한 끼 식사일 뿐인데 이렇게나 고민하시다니요.”

백천범은 눈을 내리깐 채 입을 꼭 다물었다. 어젯밤, 그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다. 그러나 타오르는 불처럼 열렬한 그의 마음이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 그가 그녀의 등을 다정하게 어루만지며 한 말이 아직도 귓가에 또렷했다.

“내일 점심에 식사를 하러 올 테니 하고 싶은 말이 있거든 그때 하시오.”

그저 가벼운 말이 아닌, 진지한 약속이었다. 지금껏 그녀와 한 약속은 한 번도 어긴 적 없는 그였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 녹하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너무 위축되어 있었다. 그녀도 묵용감이 얼마나 바쁜지 잘 알았다. 새로 나라를 세우는 만큼 해결해야 하는 일이 산더미일 터였다. 태자가 즉위한다면, 그도 조금 여유가 생기리라.

목욕을 마친 백천범은 하늘거리는 월백색 옷으로 갈아입었다. 키도 제법 크고 허리도 가늘어진 그녀는 어떤 옷을 입어도 아리따운 자태를 자랑했다. 가슴에 달린 명주 장식이 나풀거렸고 오색 술 끝에 매달린 옥구슬이 서로 부딪혀 맑게 울렸다.

묵용감은 그녀가 나풀거리는 옷을 입은 모습을 좋아했다. 그녀가 그런 옷을 입을 때면, 풋풋하고도 청순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구슬 장식이 달린 옷도 좋아했는데, 그 소리를 들으면 그녀를 잃어버릴 걱정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정작 구슬 달린 옷이 거추장스러웠던 그녀는 아예 목에 방울을 다는 방법을 떠올렸다. 그녀가 진지하게 생각을 밝혔을 때, 묵용감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그녀를 보는 눈길에 어찌나 애정이 가득했던지. 목에 방울을 달지 않아도 그녀는 이미 그의 강아지라고 속삭이는 목소리도 달콤했다.

골이 난 그녀는 그의 코끝을 깨물었고 그 또한 그녀를 장난스레 깨물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은 이미 침대 위였다…….

지금 생각해도 낯 뜨거운 일이 아닌가. 묵용감은 정말 신기한 재주가 있었다. 시작이 어떻든 마지막은 늘 똑같았다.

그때, 기홍이 찬합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옷을 갈아입은 백천범을 훑어보더니 감탄을 흘렸다.

“여인은 자라면서 열댓 번도 더 바뀐다더니, 우리 마마께서는 나날이 더 예뻐지십니다. 절세가인이 따로 없으셔요.”

녹하가 장난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당연하지, 안 그랬으면 왕야께서 어찌 이리 정신을 못 차리시겠어?”

백천범은 빨갛게 물든 얼굴로 찬합을 들고 밖으로 나섰다. 월규가 함께 가겠다고 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대신 네가 토끼랑 놀아 줘.”

월규도 곧장 알겠다고 대답했다.

백천범은 치맛자락을 살며시 움켜쥐고 정원을 나섰다. 뜨거운 햇살이 눈을 찌르는 탓에 눈꺼풀을 내리깐 그녀의 볼에 길고 촘촘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앞뜰이 가까워질수록 발걸음은 조급해졌지만, 그녀에게서는 연신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시녀들이 봤더라면 놀려 댈 게 분명했지만, 그녀는 지금 누구보다 기쁨에 가득 차 있었다.

앞뜰에 도착하니 보초병들이 하나둘 예를 갖췄다. 웃음으로 답한 그녀가 사뿐사뿐 계단을 올랐다.

묵용감은 한통 장군과 함께 있었다. 한통은 그녀가 들어오자마자 활짝 웃으며 일어났다.

“말장,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한 장군님, 때마침 잘 오셨어요.”

백천범이 웃으며 찬합을 내보였다.

“함께 드시어요.”

“아닙니다. 말장은 일이 있어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한통이 헤벌쭉 웃으며 묵용감을 곁눈질했다. 오늘따라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다른 데 정신이 팔려 있더라니, 왕비를 기다렸단 말인가? 그도 이 정도의 눈치는 있다. 서둘러 자리를 비켜주는 게 나았다.

예를 갖추고 인사를 하려는데 초왕의 싸늘한 눈빛이 그를 옭아매었다.

“아직 얘기도 끝나지 않았는데 어딜 간단 말이냐?”

“…….”

그러나 백천범에게 말할 때는 제법 상냥하고 친근한 목소리였다. 그는 미소까지 지으며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왕비가 가져오느라 고생 많았소. 다만 이리 더운 날엔 하인들에게 시키시오. 고단하게 왕비가 직접 오지 않아도 되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그녀를 끔찍이 아끼는 줄 알 테지만, 백천범은 의아한 낌새를 느꼈다. 지금 그가 보이는 모습은 억지로 꾸며낸 게 분명했다.

그녀는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그가 왜 자신에게 꾸며낸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그사이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왕비, 어서 내려놓으시오. 무겁지 않소.”

묵용감은 찬합을 받아들고 여전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가져오느라 고생 많았소. 어서 돌아가 쉬시오. 한 장군과 의논할 일이 많아 저녁에도 돌아가기 힘들 것 같소.”

백천범은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다 이내 몸을 돌려 나갔다.

한통마저도 미묘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기분이 언짢으면 곧장 표현하던 사람이… 왜 굳이 마음을 숨기려 드는가?

한통 장군은 슬슬 위기감을 느꼈다. 더는 이곳에 남아 있으면 안 되는 게 아닐까. 왕비가 떠나자마자 초왕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군수품 목록만 들여다보았다. 맑고 화창한 창밖과 달리 방 안이 어찌나 음침한지, 등골이 다 오싹했다.

사실 할 말은 진작 끝나지 않았던가. 이렇게 벌 받듯 앉아만 있는 것도 도무지 할 짓이 못 되었다.

“왕야.”

그가 초왕을 슬쩍 살피며 입을 열었다.

“말장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고개도 들지 않은 초왕에게서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찌 가겠다고 하느냐. 간식도 먹지 않았거늘.”

한통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걸 어찌 먹는단 말인가……. 아무리 그래도 왕비 마마께서 왕야께 드리려 직접 가져온 간식인데. 그가 슬며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정말 간식 하나만 먹으면 갈 수 있기나 할까?

어쨌든 초왕의 분부가 떨어졌으니 모른 척할 수도 없어, 그는 찬합을 열고 간식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와, 정말 맛있습니다.”

한통은 좋아하지 않았지만 기홍의 간식은 감탄이 나올 정도로 맛있었다. 맛을 오래 느끼기도 전에 사르르 녹아 사라지는 감촉 또한 좋았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하나를 더 입에 넣고 천천히 맛을 음미했다.

“은은하게 연잎 향이 나는 게 아주 훌륭합니다. 왕야께서는 안 드십니까?”

묵용감은 미간을 꾹꾹 누르며 답했다.

“맛있거든 다 가져가거라.”

“왕비 마마께서 친히 가져다주셨는데 말장이 어찌 감히 가져가겠습니까?”

묵용감은 이제 언짢음을 숨기지 않았다.

“가져가면 그만이지 어찌 그리 말이 많더냐?”

초왕이 큰소리를 내니 진한 술 냄새가 훅 끼쳤다. 술을 그리 즐기지 않는 초왕이 대낮부터 술을 많이 마셨다면,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한통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초왕이 이렇게까지 감정적으로 굴 일은 딱 하나, 초왕비와 관련된 일뿐이다.

한통은 그를 달래 주기 위해 조심스레 운을 뗐다.

“왕야, 부부 사이는 전쟁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적군과 긴 교전을 펼친다 해도, 전력을 다한다면 서로 막대한 피해만 보지 않겠습니까. 때로는 휴전도 필요한 법입니다.”

묵용감이 마침내 고개를 들어 한통을 주시했다.

“…티가 나더냐?”

“…….”

누군들 지금 초왕의 심기를 눈치채지 못할까? 정말 티가 안 나리라 생각했단 말인가?

묵용감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너도 뻔히 아는 걸 어째서 왕비는… 아니, 되었다…….”

그가 문서를 내려놓고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거운 짐을 겨우 내려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한통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를 타일렀다.

“왕야, 부부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건 솔직함이라 하였습니다. 마음을 열고 대화하면 넘지 못할 고비가 없는 법입니다.”

“솔직함이라?”

그가 별안간 코웃음을 치더니 한참이 지나도록 침묵에 잠겨들었다.

한통은 묵용감이 다시 입을 열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생각해 보면 집마다 각자의 곤란한 사정이 있지 않겠는가. 초왕이 애처가란 사실은 이미 자자했다. 이번 일도 잠시 스쳐 가는 감정에 불과할 테니, 곧 평소처럼 사이 좋은 모습을 보일 터였다.

간식도 먹었겠다, 그는 정말 돌아가기로 했다. 그가 다시 일어나 고했다.

“왕야, 더 분부할 일이 없으시면 말장은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초왕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통은 그가 허락했다고 생각하며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몇 발짝 걷지도 않았는데 싸늘한 목소리가 그의 등을 내리쳤다.

“저녁에 한잔하기로 했으면서 어찌 자꾸 가려고 드느냐?”

한통은 발걸음을 멈추고 슬쩍 돌아보았다.

“왕야께서 점심에 과음을 하신 것 같아서…….”

“점심에 마셨다고 저녁에 먹지 못한다는 법이 있더냐?”

초왕은 냉랭하게 코웃음을 쳤다.

“그게 대체 어느 나라 법도냐, 본왕이 술을 마시겠다는데 누가 막으려 드는가?”

“예, 예. 맞습니다. 왕야께서 드시고 싶으시다면야 말장이 끝까지 모셔야지요.”

하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은 한통은 힐끔 초왕의 안색을 살폈다.

초왕은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다시 문서를 살피고 있었다. 할 일이 없었던 터라, 한통은 초왕을 도와 문서를 분류했다. 얼마 뒤 초왕이 불쑥 입을 열었다.

“파견을 보낸 독군들은 한 달에 한 번씩 마을을 옮기고 있느냐?”

“예, 왕야.”

갑작스러운 질문이 의아하긴 했지만, 한통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풍은 계속 오수진에 있게 하거라.”

“예?”

한통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아 질문을 올렸다.

“무슨 연유로 말입니까?”

초왕이 입꼬리를 올리더니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사앵앵과 엮으려면 그편이 좋았다. 사씨 집안의 사위가 되겠다고 승낙하지 않는 이상, 사장풍은 영원히 오수진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뭘 그리 따져 묻느냐, 이대로 하거라.”

“예, 명 받잡겠습니다.”

초왕과 사장풍은 다른 이가 보기엔 다소 의아한 관계였다. 분명 상관과 부하인데 상관은 늘 기이한 명을 내렸고, 부하는 상관에게 늘 가시가 돋쳐 있었다. 그렇다고 부하를 아끼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가시가 돋친 부하의 모습을 보는 걸 즐기는 듯했다. 이제는 뜬금없이 사장풍을 오수진에만 두라니, 무슨 의미란 말인가?

“왕야, 사장풍은…….”

“본왕 앞에서 그놈 얘기는 꺼내지도 말거라.”

“…….”

이야기는 초왕이 먼저 꺼내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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