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2화
가동은 속으로 사장풍에게 욕을 한바탕 퍼부었지만 당장 만날 수도 없으니 답답해질 뿐이었다. 그는 우거지상이 되어 녹하를 찾아갔다.
정작 녹하는 방에 없었다. 대신 기홍이 그를 불러 세우더니 조용히 영구의 소식을 물어보았다.
가동은 백천범처럼 진중하지 못한 구석이 있었다. 정작 중요한 일은 까맣게 잊어버린 그가 문 옆에 서서 기홍을 놀렸다. 그는 기홍이 영구의 안부를 묻는 게 꽤나 신기한지 잔뜩 신이 났다.
“영구요?”
그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지금쯤 돌아왔어야 하는데… 오는 길에 어여쁜 여인에게 홀리기라도 한 게 아닐까요.”
역시나 기홍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가동의 농담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돌아왔어야 한다고요? 얼마나 늦어진 건데요? 왕야께서는 왜 사람을 보내 찾지 않으시는 거죠? 홀로 있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요?”
가동이 어깨를 으쓱였다.
“에이, 뭘 그리 걱정해요. 동월국에서 영구를 대적할 자가 몇 명이나 된다고, 적의 목숨을 끊어 놓을 때까지 싸우는 놈입니다. 마음이 약한 저와는 다르죠. 전 그래도 급소는 피해 주는데…….”
가동의 허풍이 길어지자 기홍이 얼른 말을 끊었다.
“그럼 언제 돌아오는 건데요? 확실한 소식은 없는 거예요?”
“일을 마치면 곧바로 돌아올 테니 오늘 내일쯤이면 오지 않겠습니까.”
가동은 시답잖은 말을 늘어놓으며 잔뜩 신이 났다.
“영구 그놈은 자상하지 못하다니까요. 아가씨가 걱정하는 건 생각하지도 않나. 빨리 돌아올 생각은 안 하고 여인에게 넘어가서는…….”
기홍은 얼른 쟁반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가동이 그녀의 뒤에서 소리쳤다.
“아이, 어디 가요. 말도 다 안 끝났는데.”
“무슨 할 말이 더 남으셨을까?”
가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등에 꽂혔다. 언제 들어도 가동의 온몸을 서늘하게 하는 목소리다.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목소리의 주인공이 그의 귓불을 잡아끌었다. 가동이 황급히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아야, 아파, 부인, 녹하야! 하, 하지 마…….”
녹하는 가동의 귀를 붙잡은 채 힘껏 휘둘렀다.
“하, 아프다는 말이 나와? 왕야께서 돌아오셨는데 곁을 지켜드리진 않고, 여기서 기홍이한테 헛소리나 늘어놓고, 한가해서 죽을 맛인가 봐?”
“아야. 정말로 볼일이 있으니까 왔지.”
가동은 귀가 끊어지기 전에 얼른 사정을 털어놓았다.
“부인, 부인은 그때 왕비 마마 곁에 있었잖아. 둘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알려줘. 이대로라면 나 진짜 죽는다니까.”
녹하는 그날 밤 일에 아직도 화가 났는지 곧장 언성을 높였다.
“사장풍 그자, 정말 정신 나간 거 아냐? 우리가 비킬 때까지 목을 꼿꼿이 세우고 버티잖아. 목이 날아가도 상관없는 눈치였어. 괜히 일이 커질까 싶어서 욕을 퍼부어 주지도 못했다니까!”
“그럼 뭐라고 했는지 못 들었어?”
“듣긴 뭘 들어!”
녹하가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콱 찔렀다.
“우리를 죽이려 하는데 고향 친구는 개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무것도 못 들었어.”
“한 글자도?”
녹하가 잠시 기억을 되짚더니 말했다.
“뭐… 누구를 처리하겠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도 하고. 잘 들리진 않았지만 표정은 똑똑히 봤어. 얼이 빠져서 왕비 마마를 빤히 보는 게… 왕야께서 보셨으면 단칼에 목을 베셨을 거야.”
가동이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처리한다고? 설마 두 사람이 왕야를 음해하려는 건가?”
녹하가 있는 힘껏 그의 등을 때렸다.
“무슨 헛소리야. 사장풍은 몰라도 우리 왕비 마마는 절대 그런 분이 아니거든?! 어딜 감히!”
가동이 멋쩍게 웃으며 등을 쓸어내렸다.
“사장풍도 성격이 좀 과격할 뿐이야. 그냥 농담한 거라고.”
녹하가 눈을 부릅뜨며 가동을 노려보았다.
“세상에 그런 농담이 어디 있어?”
“아이참, 부인! 그만 화내고 얼른 생각 좀 해 봐. 왕야가 시키신 일이라 꼭 알아야 한단 말이야.”
녹하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뭐, 어렵지도 않잖아. 왕야께서 정 알고 싶으시다면 하나 지어내. 설마 왕비 마마한테 대질이라도 하시겠어?”
그녀의 간결한 답에 가동이 활짝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정말 제갈량이 따로 없다니까. 우리 부인보다 똑똑한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야.”
녹하가 그를 밀쳐냈다.
“얼른 작전이나 짜. 왕야가 쉽게 속으시는 분이야? 제대로 생각해야지.”
가동은 곧장 웃음기를 거두더니 엄숙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사장풍은 월향의 일로 왔잖아? 왕비 마마랑도 그 이야기만 나눴을 거야. 이건 어때?”
그가 별안간 사장풍의 목소리를 흉내 내었다.
“왕비 마마, 범인을 가두었으니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조심히 가세요, 사 장군님.”
“왕비 마마도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멀거니 지켜보던 녹하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끝이야?”
“응.”
가동이 자랑스레 대답했다.
“단둘이 만난 것만으로도 왕야께서 펄쩍 뛰실 일인데, 여기서 더한 말을 했다간 또 나를 걷어차실걸.”
“…걷어차여도 싸다, 싸.”
녹하가 언짢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시녀들을 다 무르고 한 말이 고작 그뿐이라고? 그걸 왕야께서 믿으시는 게 더 이상하지!”
“그럼 어떻게 해?”
녹하가 슬며시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 * *
진시가 다 되어서야 백천범이 눈을 떴다. 나른하게 몸을 늘어뜨리고 있던 그녀는 팔에 난 흔적을 보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는 매번 그녀를 물어 흔적을 남겼다.
왕비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기홍이 장막 밖에서 물었다.
“왕비 마마, 이제 일어나시겠습니까?”
백천범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네, 일어나야죠. 땀이 나서 우선 씻어야겠어요.”
기홍이 공손하게 답했다.
“소인이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새로 만든 말리꽃 기름을 써 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너무 좋죠.”
백천범이 얼른 장막 밖으로 나왔다.
“왕야께서도 좋아하실 거예요.”
묵용감 얘기를 듣자마자 그녀는 환한 웃음을 보였다. 역시 그가 돌아오니 모든 게 좋았다. 그가 돌아온 후로 잠도 푹 잘 수 있었다.
“왕야께선 언제 일어나셨어요?”
“묘시에 일어나셨습니다. 며칠간 밀린 업무가 많으시다며 일찍 가 보신다고 하셨어요. 대신 점심은 왕비 마마와 드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묵용감의 말을 전하는 기홍의 목소리에 부러움이 묻어났다.
“왕야께서 떠나시기 전에 한참 동안 침대 옆에 서 계셨습니다. 왕비 마마께서 일어나시면 짧은 인사라도 나누실 생각이셨나 봅니다. 마마께서 깊게 잠드신 걸 보시고 결국 가셨지요.”
백천범이 자신도 모르게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정말 바보 같으시다니까.”
그녀는 월규의 시중을 받으며 목욕을 마친 뒤, 한 벌로 된 노란 치마를 입었다. 넓은 소매에는 하얀 실을 꼬아 만든 세 개의 고리가 달렸고, 그곳에 옥패와 구슬 장식을 걸어 움직일 때마다 청량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때마침 안으로 들어온 녹하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이게 무슨 향입니까? 너무 좋습니다.”
백천범이 두 팔을 벌리고 빙그르르 돌아 보였다.
“좋죠? 새로 만든 말리꽃 향이래요. 두 병이 있으니까 한 병은 언니들이 같이 쓰세요.”
“되었습니다. 왕비 마마의 향인데 소인들이 어찌 감히 쓰겠습니까. 만약 왕야께서 소인들의 향을 맡으시고 왕비 마마라 착각하시면 어찌합니까?”
곧바로 맑은 웃음이 흘러나왔다. 녹하는 이런 농담도 서슴지 않았다.
녹하는 태연히 백천범을 살피며 놀렸다.
“왕비 마마, 그리 예쁘게 꾸미셨는데 왕야께 안 보여 드리십니까?”
백천범도 묵용감을 찾아가 볼 생각이었지만, 녹하의 말을 듣자마자 괜스레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안 가요. 점심을 드시러 오실 테니 그때 보면 되는걸요.”
시녀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누군가 그녀를 찾아왔다.
“왕비 마마, 왕야께서 하인을 보내셨습니다. 점심은 태자 전하와 함께 드신다며 기다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뜻밖의 소식에 백천범은 의아할 뿐이었다.
“어젯밤에는 오시겠다고 했는데, 어째서 마음을 바꾸신 거지?”
유일하게 이유를 알고 있던 녹하가 그녀를 달랬다.
“며칠간 자리를 비우셨으니 태자 전하와 논의하실 일이 많으시겠지요. 나랏일이 워낙 급하니 마마와는 다음에 드시려나 봅니다.”
백천범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아쉬운 표정이었다.
“그건 알지만, 조금 갑작스러워요. 약속까지 하시고 이러신 적은 없었거든요.”
“아마 태자 전하께서 왕야를 찾아오셨을 테지요. 이야기가 길어지다 보니 왕야께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어서 가시어요. 곁채에 상을 차려 드리겠습니다. 낮잠을 주무신 뒤에 기홍이가 만든 간식을 들고 왕야께 가보십시오. 식사는 함께 들지 못해도, 간식을 드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백천범은 부끄러운 듯 괜히 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옥패가 가볍게 짤랑였다.
“…왕야를 꼭 봐야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뻔한 거짓말이라는 거 다 압니다.”
월규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마마의 마음은 다들 너무나 잘 아는걸요.”
월규의 말이 맞았다. 그녀는 더 이상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시녀들조차 뻔히 아는데 어째서 묵용감은 모르는 걸까? 잠에서 깬 뒤로 그를 보지 못하니 이상할 정도로 허전함이 밀려 왔다. 점심을 먹으며 그와 함께 있고 싶었는데, 이리 되니 실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잠시 낮잠을 자고 일어난 백천범이 부엌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침 기홍이 간식을 만들고 있기에 그녀는 솥에 물을 부으며 도왔다. 찜기에서 하얀 김이 쉴 새 없이 피어나니 부엌은 어느새 열기와 습기로 가득 찼다. 기홍이 서둘러 그녀를 내보내려 했다.
“왕비 마마, 나가서 기다리시어요. 소인이 가져다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더운 건 상관없어요.”
백천범은 부드러운 천으로 찬합을 닦으며 태연히 답했다.
기홍이 그녀를 돌아보더니 옅게 웃었다.
“찬합은 소인이 다 닦아 두었습니다. 그리 바삐 움직이지 마시고 어서 나가시어요.”
안으로 들어온 녹하가 그녀를 말렸다.
“아이, 왕비 마마. 이렇게 땀을 흘리시다뇨. 얼른 다시 씻으셔야겠습니다. 왕야께서 안 좋아하실 겁니다.”
백천범은 팔을 들어 땀 냄새가 나는지 확인했다. 녹하가 그녀를 밖으로 잡아끌었다.
“부엌이 온통 김으로 가득한데 냄새를 맡으실 수 있겠습니까? 어서 가십시오. 향기로운 상태로 왕야를 뵈러 가셔야지요.”
그러고 보면 참 이상한 일이다. 어젯밤 깊은 다정함을 나누었건만, 그를 보러 간다고 생각하자마자 오래 떨어져 있었던 것처럼 긴장이 되었다. 마음이 불안하니 낮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고, 일어난 후에도 할 일을 찾아 끊임없이 움직이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