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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51)화 (350/1,192)

제351화

“그럼 유배를 보내는 건 어떻소?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할 수도 있소.”

“어디로 유배를 보내시려고요?”

“빈곤하고 외진 곳으로 보내는 게 마땅하오.”

“안 돼요. 결국 죽음으로 내모는 거잖아요. 이장님한테는 단 하나뿐인 아들이라고요.”

극단적인 처분만이 나오니 그녀가 난감한 듯 입술을 달싹였다.

“입대시키는 건 어때요? 군에서라면 못된 습관을 고칠 수 있겠죠. 나중에 이장님 가문을 제대로 이을 수 있는 사람이 될 거예요.”

묵용감이 선뜻 맞장구를 쳤다.

“아주 좋은 생각이오. 그대의 말대로 하겠소.”

더는 이런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기에, 묵용감이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처음 보냈던 답장에는 무얼 그려 넣었소?”

백천범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설마 못 알아보신 거예요? 엄청 그럴듯하게 그렸는데.”

그녀의 말에 조금 민망해진 묵용감이 시치미를 뗐다.

“부부는 일심동체인 법인데, 그 정도도 이해 못 했겠소? 내가 그립다는 의미가 아니오!”

“그럼 제가 뭘 그린 건지 말씀해 보세요.”

“산과 물을 그리지 않았소. 멀리 떨어져 있으니 몹시 그립다는 의미잖소.”

백천범은 입에서 밥풀이 튀어나올 정도로 크게 웃고 말았다.

“산과 물이라고요? 제가 풍경화를 그렸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묵용감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직감했다. 그렇다면 봉우리 두 개와 활등처럼 굽은 선으로 대체 무엇을 표현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는 멋쩍은 표정으로 그녀에게 직접 물어보았다.

“그럼 무얼 그린 것이오?”

백천범은 실망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왕야께서 바로 알아보실 줄 알았어요. 그건 제 입술이라고요.”

이번엔 묵용감의 입에서 밥풀이 튀어 나왔다. 그게 그녀의 입술이었다니…….

그제야 그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었다. 위쪽에 그린 두 개의 봉우리는 윗입술, 아래쪽에 그린 굽은 선은 아랫입술이 아닌가! 그는 속으로 자신을 탓했다. 어찌 그걸 못 알아봤을까.

그가 넉살 좋게 웃음 지었다.

“아주 잘 그렸소. 내가 안목이 없어 알아보지 못했구려.”

백천범은 풀이 죽어 고개를 저었다.

“위로하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너무 못 그렸으니 왕야께서 못 알아보신 거겠죠.”

묵용감은 그녀의 부드러운 얼굴에 제 뺨을 살며시 부볐다.

“힘들게 그릴 필요 없이 종이에 입술을 찍지 그랬소. 그럼 내가 단번에 알아봤을 텐데 말이오.”

백천범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말 좋은 방법이네요. 아이참,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 * *

두 사람은 이번에 다시 만난 뒤 처음으로 오랜 시간 떨어져 있던 것이었다. 묵용감은 하루가 일 년 같다는 말을 뼈저리게 체감했다. 아니, 일 년이 아니라 하루가 삼 년처럼 더디게 흘러갔다. 잠시 떨어져 지내다 만나면 신혼 때보다 가까워진다던 태자의 말이 옳았다.

그조차도 백천범을 향한 연정이 의아할 따름이었다. 그녀에게 아무리 사랑을 퍼부어도 부족한 기분이었다. 늘 혼자이길 원했던 그는, 그녀를 만난 뒤로는 굶주린 짐승처럼 변했다. 오직 그녀만을 갈구하고 뜨겁게 원했다. 지난 스무여 해 동안 텅 비어 있던 자신을, 그녀가 전부 채워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진왕은 늘 초왕에게 인생을 헛살았다고 말했다. 물론 그는 진왕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애초에 황보주아 말고는 여인에게 눈길을 준 적도 없었다.

자신에게 여인은 있으나 마나 한 존재라는 생각뿐이었는데, 그간 제대로 된 사람을 만나지 못했을 뿐이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운명의 여인을 만나고 나니 기름이 끓는 솥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요동치는 감정이 그의 혼을 쏙 빼놓았다.

이 얼마나 요란하고, 끈질기고, 굶주린 감정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는 되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녀를 위해 목숨마저 얼마든 내줄 수 있는 그였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얌전히 품에 안긴 그녀는 깊은 호흡을 내쉬며 단잠에 빠져 있었다. 동그란 이마에 작은 땀방울이 맺혔다. 그는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땀으로 젖어든 그녀의 등을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날이 점점 더워지며 꼭 껴안고 잠들기 어려웠지만, 그녀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땀을 흘려 몸이 끈적거린다 해도 좋았다. 그녀와 이렇게 닿아 있을 수 있다면.

밤늦게 잠들었지만 묵용감은 밀린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아침 일찍 눈을 떴다. 방을 떠나기 전, 혹시나 그녀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한참을 침대 옆에서 서성거렸다. 정작 깊이 잠든 백천범은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그는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 같은 제 모습이 우스워 실소를 흘리고 방을 나섰다.

여름날의 이른 아침은 그 어느 때보다 상쾌했다. 막 떠오른 태양과 얼굴을 가볍게 간질이는 아침의 바람이 그를 반겨 주었다. 만족스러운 밤을 보낸 후 맞이한 아침은 참으로 산뜻했다. 그가 기분 좋게 기지개를 켜는데 별안간 나무 뒤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사 장군이랑 왕비 마마가 옛날부터 알던 사이였던 거야? 어쩐지 한밤중에도 성에 들어오더라.”

“왕야께서 안 계시니까 가능했던 거지, 왕야께서 계셨다면 감히 발길을 들일 수나 있겠어?”

“왕비 마마께서도 그리하시면 안 되었지. 왕야께서 마마께 얼마나 잘해 주시는데. 아무리 알던 사이라고 해도,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시면 괜한 말이 나올 거 아냐.”

“쉿, 그만 말해. 누가 듣겠다. 왕야 귀에 들어가면 큰일이라고.”

“아직 일어나실 시간도 아닌데, 뭐. 왕비 마마께서 돌아오신 뒤로 왕야께서 왕비 마마만 찾으시잖아. 예전처럼 일찍 일어나시지 않는다니까.”

“그간 힘들게 지내셨으니 왕야도 이제 느긋해지실 수 있지. 왕야만 기쁘시다면 바랄 게 뭐가 있어.”

따스한 햇볕에 휘감겨 있던 묵용감의 마음은 한순간에 얼어붙은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말았다.

사장풍이 한밤중에 찾아왔다니, 어찌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단 말인가?

그는 불쾌한 마음을 억누르고 서둘러 관청으로 향했다. 반월문을 돌아 나가니 가동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나무 아래에서 태자의 수하인 이소로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묵용감을 알아차린 두 사람이 서둘러 예를 갖추었다.

그가 가동을 향해 손짓했다.

“이리 와 보거라.”

“예, 왕야.”

가동은 이소로에게 눈짓하며 조용히 속삭였다.

“나중에 사장풍이랑 한잔하자고.”

말을 마친 그가 초왕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문 닫거라.”

“…아, 예.”

가동이 문을 닫고 돌아보니 어느새 초왕이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사장풍이 왔었느냐?”

곧바로 얼굴이 굳은 가동은 문에 바짝 붙고 말았다.

“…예.”

“무슨 일로 왔다고 하더냐?”

그가 어찌 초왕을 속일 수 있을까! 사장풍이 월향과 전진곤을 데려온 일을 자세히 털어놓은 가동이 초왕의 눈치를 힐끔 살폈다.

“왜 내게 알리지 않았느냐?”

“…….”

초왕은 관저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후원으로 달려가지 않았던가. 대체 언제 말할 기회를 주었단 걸까.

“단둘이 대화도 나누었느냐?”

“소, 소인은 모르옵니다.”

가동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때, 소, 소인은 자리에 없었습니다.”

“자리에 없었단 말이 잘도 나오는구나. 널 이곳에 두고 간 이유를 정녕 모르겠느냐!”

초왕이 언성을 높이더니 가동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가슴을 움켜쥔 가동이 문짝에 기댄 채 스르르 미끄러졌다. 반년 동안 사람들을 걷어차지 않아 마음 놓고 있었건만, 어찌 또 시작이란 말인가!

초왕이 싸늘한 얼굴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얘길 나누었느냐?”

“…….”

가동은 울상을 지었다. 정말로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그 자리에 없었는데 어찌 알겠는가?

“가서 알아 오너라.”

초왕의 분노가 잇새로 새어 나왔다.

“한 글자도 빠트리지 말고 알아 오너라. 무슨 얘길 나누었는지, 본왕이 똑똑히 알아야겠다.”

가동은 알겠다는 말밖엔 할 수 없었다. 무슨 말을 나눈 건지 도통 알 수 없다고 말한다면 초왕이 그를 죽이려 들고도 남았다.

“썩 꺼지거라!”

혼비백산하여 뛰어나간 가동은 녹하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영구가 없으니 초왕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늘 꽁무니에 불이 붙어 있는 듯 화가 닥쳐오는 느낌이었다.

창 앞에 앉은 묵용감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푸르른 풍경에 어느새 어두운 잿빛이 스며들었다. 그녀와 그가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그리워할 줄 알았다. 서신을 전할 사람을 둘이나 뽑아가며 낭만적인 분위기를 만들려 애썼건만, 그가 없는 사이 이런 일이 있었다니!

그의 고생이 한순간에 조롱거리로 전락한 듯했다. 그가 그녀만을 생각하느라 애태우던 때, 그녀는 사장풍을 만나고 있었단 말인가.

두 번 다시 사장풍과 단둘이 만나는 일은 없다며 약속을 남긴 그녀였다. 정작 그가 떠나니 시녀들까지 물리고 단둘이 만남을 가졌다. 자신과 한 약속은 그 정도로 가볍고 하잘것없단 말인가? 마음속의 설원에 차가운 북풍이 휘몰아쳤다.

그때, 흰 도포 자락을 나부끼며 누군가 들어왔다. 그가 서둘러 시원한 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찬 기운이 뱃속에 도달해 그의 화를 서늘하게 가라앉혔다. 그만큼 그의 가슴에 있던 온정과 기쁨도 차게 식는 듯했다.

태자는 오늘도 온화하고 귀티가 넘치는 모습으로 웃으며 말을 건넸다.

“어제 돌아왔다고 들었다. 환영의 의미로 술을 마시자고 할 생각이었는데, 왕비를 더 보고 싶어 할 것 같아 그만두었다. 대신 오늘은 시간을 내주겠느냐?”

“그리 마음을 써 주시다니, 이 아우는 사양하지 않고 형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묵용감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점심때 이 아우와 한 잔 기울이시지요.”

태자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릉에서의 일은 잘 처리하였느냐?”

“예. 날이 너무 더운 탓에 공사를 하다 보면 인부들이 더위를 먹기에 십상이었습니다. 하여 너무 더운 시간에는 일을 쉬도록 분부하였습니다. 다만 공사 기간이 조금 길어질 듯합니다.”

“그건 상관없다. 급한 일은 아니니 여유를 가져야지.”

묵용감이 굳은 얼굴로 슬쩍 운을 떼었다.

“제가 자리를 비운 동안 별일은 없었습니까?”

“별일 없었다. 다만 날씨가 워낙 건조하니 불이 날까 걱정이구나. 매일 세 번씩 교대로 순찰을 하고 밤에도 야경夜警(밤사이에 화재나 범죄 따위가 없도록 살피고 지킴)을 돌라고 분부했다. 낮에 관원들이 돌아다니며 백성들을 일깨우면, 훨씬 주의를 기울일 수 있을 테지.”

“좋은 생각이십니다.”

묵용감이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께서 이곳에 계시니, 수성 백성들은 복이 아주 많습니다.”

미소를 짓던 태자가 갑자기 떠올랐다는 듯 화제를 돌렸다.

“그래, 왕비에게서 들었겠지. 왕비의 시녀인 월향이라는 아이에게 큰일이 있었더구나. 사 장군이 직접 데려와 주었을 정도였지.”

묵용감은 짧게 대꾸했다.

“예, 저도 들었습니다.”

묵용감의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두 입술이 굳게 다물려 있었다. 태자는 미소를 머금으며 말머리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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