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0화
의원이 도착했을 때 이장과 양보전의 부모도 마차를 타고 관청에 도착했다. 공교롭게도 함께 도착하는 바람에 한바탕 큰 소동이 일어났다. 한 번만 살려 달라는 사죄를 하던 그들은 양보전이 아프다는 말을 듣고 연신 눈물만 흘렸다.
양보전을 진맥한 의원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증상을 설명했다. 더위를 먹어 탁한 기운이 스며든 탓에 열이 난 것 같다며, 원체 건강한 사람이니 며칠 약을 먹으면 된다고 말해 주었다.
한시름 놓은 양보전의 부모가 월향에게 집으로 돌아가자고 애원했다.
월향 역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월규가 나서더니 양보전의 부모와 이장을 붙잡고 한참 동안 으름장을 놓았다. 또다시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게끔 서약까지 요구했다. 잔뜩 화가 난 월규는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양보전과 월향을 이혼시키고, 그녀를 데리고 오겠다는 협박을 서슴없이 내뱉었다.
월향만 보내준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기에, 이장은 직접 서약서를 쓰고 지장을 찍었다. 이 일은 어떻게든 일단락되는 듯했다.
백천범은 문 앞까지 직접 그들을 배웅했다. 문득 이장을 보니 하룻밤 사이에 폭삭 늙기라도 한 듯 많이 지쳐 보였다. 마음이 불편해진 그녀가 이장을 넌지시 불렀다.
“이장님, 잠시 만났다 가시는 게…….”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린 이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죄를 지었으니 마땅히 벌을 받아야지요. 왕야와 왕비께서 내리시는 처벌이 무엇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월향의 식구들을 돌려보내자마자 초왕의 두 번째 서신이 도착했다. 반월문에 들어서는 백천범의 뒤에서 가동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왕비 마마, 왕야의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백천범이 서둘러 서신을 펼쳐 보았다. 금가루가 박힌 깔끔한 종이가 초왕의 성격을 보여 주는 듯했다. 종이에는 딱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보고 싶소.」
의미를 종잡을 수 없던 지난번 편지보다 훨씬 담백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보고 싶다는 그 한마디가 백천범의 가슴에 깊이 스며들었다. 그녀가 환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른 봄에 핀 복사꽃처럼 어여쁘고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왕비 마마, 무얼 보십니까?”
어디에서 나타났는지 어느새 황보주아가 앞에 서 있었다.
백천범은 활짝 웃으며 손에 든 편지를 내밀었다.
“왕야께서 또 편지를 보내셔서요.”
편지에 적힌 네 글자는 황보주아의 마음도 뒤흔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은 백천범과 달리 차디찬 호수에 내던져진 듯했다. 어제도 시구를 적어 마음을 표현하더니, 하루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이리 호들갑을 떨다니!
백천범이 가동을 돌아보았다.
“오늘도 답장을 써야 해요? 오늘 밤에 돌아오시잖아요?”
“왕야께서 언제 돌아오시든 답장은 꼭 쓰셔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이, 왕야도 참…….”
백천범은 수줍은 듯 웃더니 서둘러 방으로 들어갔다. 마음이 급했던 나머지 문턱을 넘어선 뒤에야 황보주아를 떠올린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언니, 한가할 때 놀러 오세요.”
그러나 황보주아는 곧장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글을 쓰시려 하십니까? 그렇다면 제게도 보여 주시어요.”
백천범이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안 그래도 언니한테 배우고 싶었어요.”
시선을 주고받은 녹하와 월규가 서둘러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왔다.
이번에는 깊이 고민하지 않는지, 백천범이 곧바로 붓을 들어 답장을 써 내려갔다.
「저도 보고 싶어요.」
그녀가 먹을 말린 후 편지를 모두에게 보여 주었다.
시녀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까르르 웃으며 그녀를 놀렸다. 녹하가 피식 웃으며 내뱉었다.
“그리도 왕야가 그리우십니까? 저는 매일 보니 성가시기만 한걸요. 열흘에서 보름 정도는 안 봐야 애틋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동이 그녀를 째려보더니 팔짱을 꼈다.
“그래,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멀리 파견을 보내 달라고 청을 드릴게. 과연 네가 날 그리워하는지 아닌지 한번 봐야지.”
“걱정도 많네. 하나도 안 보고 싶거든.”
“지난번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던 게 누구더라?”
“헛소리하지 마. 누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는 거야!”
성이 난 녹하가 가동을 쫓아와 때렸고, 아웅다웅하는 그들을 보며 다들 즐거운 웃음을 터뜨렸다.
황보주아도 옅게 웃고 있긴 했지만, 그녀의 머리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하인들이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데 왕비는 아무렇지 않단 말인가? 하긴, 그녀의 눈엔 백천범도 이상한 부류였다. 행동이 노비들과 별반 다를 바 없으니 자연스레 섞여들 수밖에.
그녀는 묵용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초왕이, 대체 어쩌다 이런 사람을 좋아하게 되었단 말인가? 어디 내놓기도 부끄러운 여인을!
황보주아는 백천범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고귀한 출신에, 온갖 교육을 받았다. 훗날 군주나 왕의 배필이 될 미래를 알고 있었으니, 늘 단정하고 현명한 사람이 되는 법을 익혔다.
그녀는 어느 모로 보나 완벽한 규수였다. 그러나 정숙하고 우아한 그녀에게 묵용감은 어찌 눈길도 주지 않을까? 어째서 백천범이 아니면 안 된단 말인가?
* * *
그녀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보낸 후, 묵용감은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언제 답장이 올까 기다리기 바빴다. 심지어 공사 현장을 시찰할 때도 그녀의 답장을 기대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막상 그녀의 답장이 도착하자, 그는 품에 편지를 넣어 두곤 태연하게 행동했다. 침소에 들 때가 되어서야 그는 품에 간직했던 편지를 꺼내 펼쳐 보았다.
“…….”
그의 얼굴에 조금씩 당혹감이 스며들었다. 그녀의 답신은 글씨가 아니라 그림이었다. 새하얀 종이에 먹물로 시커멓게 그림을 그렸는데, 산 위에 둥근 봉우리 두 개와 흐르는 강물을 표현한 듯 굽은 선이 선명했다.
대체… 이게 무슨 뜻이란 말인가?
배산임수背山臨水, 산명수려山明水麗, 천산만수千山萬水, 청산녹수青山绿水…….
머릿속에 산과 물을 상징하는 수많은 말이 스쳤지만, 도저히 그녀의 뜻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그는 산장수원山長水遠(산수가 멀리 이어질 만큼 먼 곳에 떨어져 있다)의 뜻으로 받아들였다. 어쨌든 비슷한 의미일 터였다. 멀리 떨어져 있으니 그를 몹시 그리워하는 게 틀림없었다.
그는 그녀의 답장이 제법 만족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보낸 시구를 후회하기도 했다. 아마도 시구의 의미를 잘 파악하지 못해 요상한 답장을 그려 보낸 게 아닐까.
문제점을 파악한 그는 두 번째 편지에 솔직한 마음을 적어 보냈다. 기이한 그림 대신 제대로 된 답장을 보낼 수 있도록, 솔직하고도 담백한 내용을 담았다.
일정대로라면 그는 셋째 날 밤중에 수성에 도착한다. 성으로 돌아가던 중 그녀의 두 번째 답장을 받았다. 역시나, 그녀는 그녀만큼이나 솔직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을 적어 보냈다.
「저도 보고 싶어요.」
이 벅찬 마음을 어떻게 가라앉혀야 할까. 그녀를 생각할수록 가슴이 들떴다. 그는 끊임없이 말을 재촉해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성에 들어섰다. 막 밥을 먹으려던 백천범은 초왕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젓가락을 내려놓고 뛰어나갔다.
초왕은 저 멀리 어렴풋한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그녀를 발견했다. 활짝 웃는 얼굴로 멈춰선 그가 두 팔을 벌렸다. 백천범은 쏜살같이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어찌나 힘껏 뛰어들었는지, 그는 하마터면 중심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그녀를 꼭 끌어안은 묵용감이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천범, 너무나도 보고 싶었소.”
“저도 너무 보고 싶었어요. 오늘 답장을 써서 보냈는데 받으셨어요?”
“받았소. 지금도 품에 지니고 있소.”
두 사람은 서로를 꽉 끌어안아 허전했던 마음을 가득 채워나갔다.
한동안 그녀를 끌어안고 있던 묵용감이 천천히 팔을 풀더니 그녀의 이마에 턱을 괴고 탄식을 흘렸다.
“다음에는 그대를 데려가야겠소. 그대가 곁에 없으니 일에 집중할 수 없었소.”
그녀가 자그마한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살포시 그의 턱에 가져다 대며 웃었다.
“대장부가 아내와 떨어지기 싫어하면 어떡해요. 다들 왕야를 비웃을 거예요.”
“비웃으라지. 그대를 위해서라면 내 체면 따위는 얼마든 구겨져도 상관없소.”
그는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혀들었다. 곧 따뜻한 입술이 맞닿아 그리운 마음을 속삭였다. 미친 듯 말을 몰면서도, 이 순간만을 애타게 바랐다. 그녀를 품에 안은 순간부터 그의 마음은 한없이 짙고 달콤한 기운에 잠겨들었다. 그간의 고생이 한순간에 녹아내리며, 억누를 수 없는 갈망이 치솟았다.
기홍과 녹하는 나무 뒤에 숨어 둘을 몰래 지켜보았다.
얼굴이 붉게 물든 녹하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언제까지 저러시려나. 음식 다 식겠다.”
기홍은 묵묵부답이었다. 두 사람의 애틋한 모습에 자신의 연인이 떠올랐는지, 그녀의 눈에 근심이 가득했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밥은 잘 먹고 잠은 잘 자는지 알 길이 없으니 걱정만이 그녀의 마음을 채웠다. 그녀의 연인은 지금쯤 몸 건강히 잘 지내고 있을까……?
황보주아는 누각 위에 서서 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지켜보았다. 어둠이 그들을 가려 주었지만, 그녀의 눈에는 이상하리만큼 밝고 선명하게 보였다. 묵용감의 얼굴에 담겨 있는 깊은 연정까지, 그녀의 두 눈에 똑똑히 새겨졌다. 그녀에게는 단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이다.
그녀는 소맷단에 가려진 손을 힘껏 쥐었다. 뾰족한 손톱이 그녀의 손바닥을 찔렀지만 그녀의 차가운 얼굴은 통증조차 잊은 듯 시리기만 했다.
묵용감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태자는 축배를 들기 위해 찾아왔다. 막상 정원에 들어서자마자 이런 광경을 마주할 줄이야. 그는 담벼락 옆에 몸을 숨기고 고민에 빠진 듯 입꼬리를 올리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나 초왕의 애정은 너무나도 깊고도 짙었다. 이미 황보주아에게서 초왕이 휴전을 결정한 이유를 듣긴 했다. 백천범의 생각이었는데, 그대로 따를 줄이야. 아무리 위대한 영웅이라도 사랑 앞에서는 무너진다더니…….
초왕비를 구실로 삼으면 되지 않을까. 태자의 눈가에 얼핏 묘한 빛이 스쳤다.
* * *
함께 저녁 식사를 하던 중, 백천범이 월향의 이야기를 꺼냈다. 묵용감은 곧장 눈썹을 치켜세웠다.
“감히 그대의 사람을 건드리다니! 죽어 마땅하오.”
묵용감이 사장풍과 똑같은 말을 할 줄은 몰랐기에, 그녀가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건 너무 극단적이에요. 정말 월향을 범했다면 죽어 마땅하지만, 지금 목숨을 거두는 건 과한 처분이에요.”
“감히 그대의 사람에게 손을 댔으니 그대의 얼굴에 먹칠을 한 것과 다름없고, 그대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면 곧 본왕의 얼굴에 먹칠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오. 설령 그리했든 안 했든, 그런 생각을 한 자체만으로 용서할 수 없는 일이오.”
백천범은 난처해진 듯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래도 죽이는 건 원치 않아요.”
묵용감이 그녀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런 일에 마음이 약해지지 마시오. 그자의 목을 쳐야 두 번 다시 월향을 넘보는 일이 없지 않겠소?”
고민에 빠진 백천범이 끝내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그래도 목숨을 앗아갈 수는 없어요. 그리 쉽게 죽이는 법이 어디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