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9화
“주아 언니, 이게 대체 무슨 뜻이에요?”
백천범이 묻자 황보주아는 언짢은 기색을 감추며 답했다.
“송대 안기도晏幾道가 쓴 「장상사장상사長相思長相思」라는 시의 한 구절입니다. 셋째 오라버니께서 왕비 마마를 무척 그리워하시나 봅니다. 풀이하자면 그리운 마음을 털어놓고 싶지만, 왕비께서 그 마음을 끝내 알지 못하실까 근심하는 의미입니다.”
황보주아의 해석에 백천범은 더욱더 아리송할 뿐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제가 어찌 모르겠어요. 왕야께서 절 보고 싶어 하시는 것처럼 저도 왕야를 보고 싶어요! 아이참, 그런 뜻인 줄 알았다면 답장을 다르게 썼을 텐데, 아쉽네요.”
황보주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미 답장까지 쓰셨습니까?”
“네. 왕야께서 답장을 기다리신다고 하셔서 저도 보냈어요.”
“뭐라고 쓰셨습니까?”
어느새 시녀들도 귀를 쫑긋 세웠지만, 백천범은 여전히 꾸물대며 말을 삼켰다.
“그냥 별 내용 없어요.”
그녀가 말해 주지 않으니 황보주아도 더는 묻지 않았다. 그때, 그녀가 월향을 알아보고 물었다.
“새신부께서 오늘은 무슨 일로 오셨답니까?”
월향이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왕비 마마가 뵙고 싶어서 잠시 왔습니다.”
어젯밤 일은 아직 소문이 퍼지지 않았다. 가동이 직접 전진곤을 초왕의 정원에 데려갔으니 태자와 황보주아 측은 이 일을 모를 터였다.
굳이 말을 아끼는 이유는 사장풍 때문이 아니라 월향의 명예를 더럽히기 싫어서였다. 이 일은 아는 사람이 적으면 적을수록 나은 일이다.
백천범이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주아 언니, 어제 몇 장 더 적어 보았는데 실력이 늘었는지 봐주시겠어요?”
황보주아가 선뜻 승낙했다.
“좋습니다. 보여 주시어요.”
백천범도 이번만큼은 더없이 진지하게 연습에 매달렸다. 겉으로 보기엔 별다른 고민이 없어 보여도 누구보다 예민한 그녀다. 그녀가 싫은 건 배울 필요 없다는 묵용감의 말 뒤에 아쉬움이 있다는 걸 그녀가 어찌 모를까.
특히 황보주아가 쓴 글을 본 뒤로 위기감이 더욱더 크게 자리 잡았다. 황보주아가 할 수 있다면 그녀도 해내고 싶었다. 비록 서툴고 모자라도, 정성을 다한다면 분명히 해내리라 믿었다.
백천범의 실력은 며칠 만에 제법 늘어 있었다. 가지런하게 쓰인 글씨는 한눈에 보아도 깔끔했다.
황보주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머금었다.
“왕비 마마, 실력이 정말 많이 느셨습니다.”
“너무 띄워 주지 마세요. 저는 칭찬에 약하니까요.”
백천범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언니 실력에는 한참 못 미치는걸요.”
황보주아는 백천범의 말이 터무니없다고 여겼다. 배움을 시작한 시기가 전혀 다른 그녀와 자신을 비교하다니…….
잠시 붓글씨 이야기를 나눈 뒤, 황보주아가 돌아가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인사를 하고 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갑작스레 월향을 바라보았다.
“어젯밤, 성문이 잠겨 있었을 텐데 어찌 들어왔는지요?”
“사 장군님께서…….”
월향은 엉겁결에 대답하고 말았다.
“황보 아가씨께서는 배려심이 참 깊으십니다.”
녹하가 서둘러 월향의 말을 끊었다. 그녀는 경계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재차 말했다.
“그건 어떤 이유로 물어보시는지요?”
“오해는 마세요.”
황보주아가 살포시 웃으며 대답했다.
“그저 궁금해서 물어보았습니다. 설마 셋째 오라버니께서 영패를 주시진 않았을 테니까요.”
녹하가 곧장 정곡을 찔렀다.
“성문이 닫혔을 때 온 일은 어찌 아셨는지요? 황보 아가씨께는 신묘한 재주라도 있으십니까?”
녹하는 반응이 빠르고 경계심이 강할뿐더러 말솜씨도 좋았다. 그녀에게 여러 차례 당한 터라, 황보주아는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저를 몰아붙이는 녹하의 얼굴에 당장 따귀를 날리고 싶었지만, 묵용감의 대우가 예전만 못하니 소란을 피워도 자신만 손해였다.
황보주아가 백천범을 향해 두려움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저 한번 물어보았는데 녹하 아가씨의 의심을 샀군요. 왕비께서도 절 책망하진 않으시겠지요?”
황보주아의 도도하고 거만한 성격은 백천범도 익히 알고 있었다. 지금이야 잘 지내고 있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사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그녀는 태자와 동류인지라 태생적으로 오만함이 배어 있었고, 약한 모습은 쉽게 볼 수 없었다. 백천범이 웃으며 대꾸했다.
“월향이는 여기서 나간 사람이에요. 언제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죠.”
모호한 대답이었지만 황보주아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점은 월향이 흘린 정보다. 분명히 사 장군, 사 장군이라 했다.
궁에서 암투를 벌이는 사람들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때마침 구미가 당기는 정보를 얻었지만, 어떻게 활용할지는 좀 더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모름지기 판은 촘촘하고 세밀하게 짜야 했다. 그래야 들통이 나도 퇴로로 빠져나갈 수 있는 법이다.
점심 식사가 끝나자 월향이 돌아가려 했지만, 월규가 씩씩거리며 그녀를 붙잡았다.
“그런 짓을 하고 데리러 오지도 않는데, 제 발로 돌아가다니!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이 또 어디 있어!”
녹하는 조금 더 깊이 파고들었는지 월규를 거들었다.
“이번 일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네 부군이 시작했다지만, 집안 어른들 뜻도 같았으면? 또 바보가 태어나느니 사촌 형의 아이를 보자는 심보였을지도 몰라. 이런 일이 아예 없는 것도 아냐. 형제뿐만 아니라 시아버지가 나서는 일도 있어.”
마침 방으로 들어온 기홍의 얼굴이 새파래지더니 곧장 그녀를 다그쳤다.
“넌 어떻게 뭐든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니? 왕비 마마께 이상한 것 좀 알려 드리지 마. 세상에 그런 일이 어디 있다고!”
“왜 없어, 정말이야. 우리 외숙모의 형부가 사는 마을에 있었다니까. 아들이 전쟁에 나갔다가 외지에서 목숨을 잃었는데, 며느리가 재혼하려고 하니까 시댁에서 붙잡더래. 가더라도 대를 잇고 가라면서. 부군이 죽었는데 어찌 대를 이을 수 있었겠어? 흉한 꼴만 났지.”
백천범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세상에, 그런 사람은 잡아서 혼쭐을 내 줘야죠!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월향이 너도 가지 마.”
월규가 아예 문 앞을 막아섰다.
“또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어떻게 장담해? 지금이야 전진곤을 잡아넣는다지만, 또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줄곧 입을 굳게 다물었던 월향이 꾸물대며 말했다.
“다들 너무 깊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이장님과 시부모님들은 좋은 분이셔요. 이상한 생각을 할 분들도 아니고요. 그이… 도 좋은 사람이고요. 돌아가지 않으면 그이가 분명…….”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 시녀가 허겁지겁 달려와 고했다.
“왕비 마마, 대문 앞에 웬 바보가 왔습니다. 월향 언니의 사내라고 하는데, 들어오려다가 보초병들에게 쫓겨났습니다. 가동 무사님께서 보시고 월향 언니를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월향은 한달음에 관청까지 달려갔지만 양보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대문 앞에 서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는 다급히 대문으로 내달렸다. 멀찍이 보이는 대문 앞에 가동이 허리에 손을 얹고 서 있었다. 그가 평소와 달리 준엄하게 소리쳤다.
“멀리 끌어내거라.”
보초병들이 양보전을 문밖으로 멀찍이 끌어내 내동댕이쳤다. 그 모습에 월향은 자신이 내동댕이쳐진 듯 간담이 서늘했다.
“가동 무사님.”
그녀가 조심스레 가동을 불렀다.
가동이 고개를 돌려 월향을 바라보더니 굳은 표정을 풀었다.
“어, 왔군.”
그녀가 양보전에게 다가가려 하자 가동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서두르지 말고 잘 생각해. 깊이 고민하고 가도 늦지 않아.”
어제 일은 양보전 때문에 시작되었다. 월향은 우뚝 서서 양보전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바닥에 고꾸라진 양보전은 땅을 짚고 힘겹게 일어났다. 문 뒤에 서 있는 월향을 발견한 순간, 그의 눈망울에 생기가 돌며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부인, 향이! 나랑 같이 집에 가요.”
마음이 여린 월향은 그의 애처로운 목소리에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양보전이 무릎을 꿇고 애걸했다.
“부인, 나랑 같이 가요. 내가 잘못했어요. 날 얼마든지 때리고 욕해도 좋아요. 그러니 날 버리지 말아요, 엉엉…….”
“어서 일어나요!”
월향이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양보전은 울며불며 문 앞까지 기어왔다. 그가 대문 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보초병들은 난처한 표정으로 가동을 바라보았다. 가동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자 길이 열렸다. 더는 견딜 수 없던 월향이 그를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흐느끼며 양보전의 등을 내리쳤다.
“바보, 어찌… 어찌 이리도 모자라단 말입니까…….”
양보전이 월향을 꼭 끌어안았다. 얼굴에 눈물 자국이 가득했지만, 그는 활짝 웃고 있었다.
“부인, 우리 같이 돌아가요. 집으로 가요.”
양보전의 팔을 꼭 붙들고 있던 월향이 별안간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그녀가 얼른 손을 뻗어 그의 이마를 짚었다.
“서방님, 열이 납니다!”
그녀는 황급히 양보전의 목과 손을 만져 보았다. 이마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그녀가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어째서 이렇게나 열이 나는 거예요? 어서 돌아가서 의원을 불러야겠어요.”
양보전은 머리가 조금 모자라긴 했지만, 몸은 어지간한 사람보다 튼튼했다. 어릴 때 열병을 앓은 후로 병치레를 한 일도 거의 없었다. 그도 어찌 된 영문인지 몰랐지만, 별안간 머리가 욱신거리며 눈앞이 팽글팽글 돌았다.
눈앞의 월향마저도 훌쩍 날아갈 듯 빙빙 도는 탓에 그는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 부인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 생각만으로 비틀거리며 일어났던 그는 이내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때마침 백천범이 시녀들과 대문을 찾았다가 이 광경을 마주했다.
“대체 무슨 일이야? 왜 바닥에 쓰러져 있어?”
월향이 양보전을 껴안은 채 울부짖었다.
“온몸이 불덩이입니다.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집으로 데려가 의원을 부르려 했는데 이리 갑자기…….”
“성안에 실력 좋은 의원들이 많으니 걱정하지 마. 지금 바로 의원을 불러줄게.”
백천범은 가동을 시켜 양보전을 방으로 보낸 후 즉시 의원을 데려올 보초병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