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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48)화 (347/1,192)

제348화

사장풍을 바래다주러 나온 가동은 좀처럼 돌아갈 생각이 없는 듯했다. 보다 못해 그가 먼저 가동에게 물었다.

“오수진까지 따라올 셈이야?”

가동은 그를 말없이 흘겨보았다. 평소엔 그토록 이성적이면서 왕비 앞에만 서면 정신을 못 차리는 모습이 왕야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를 멀찍이 데려다주지 않으면 마음이 놓지 않을 듯했다.

“이대로 헤어지기 섭섭하니까 그렇지.”

“밤도 깊고 날도 찬데 계속 걸어서 좋을 게 뭐 있어.”

“네 눈에나 밤도 깊고 날도 찬 거야. 내 눈엔 달도 밝고 날도 좋다, 인마.”

가동이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런 줄 알아? 너랑 내 기분이 달라서 그래. 그래서 보이는 것도 천지 차이인 거야.”

의미심장한 말에 사장풍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가동이 굳이 멀리까지 그를 따라온 건 꼭 해 둬야 할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장풍아, 내 말 잘 들어…….”

“그렇게 부르지 마. 우리 아버지 같다.”

“사장풍.”

가동이 드물게도 진지한 모습으로 말했다.

“농담하는 거 아니야. 왕야께서 오늘 일을 아셨더라면 어찌하셨겠어?”

“어찌하시긴, 날 죽이셨겠지.”

“이렇게 얼빠진 놈이 우원 장군이라니, 어처구니가 없다!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널 강등시키라고 해야겠어.”

사장풍이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네가 하는 말을 들으시긴 할까?”

가동은 곧바로 반박하려 했지만, 대화가 산으로 갔다는 생각이 스치자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왕비 마마를 위해서라도 잘 생각해. 왕야께서 오해라도 하시면 왕비 마마께 좋을 게 뭐가 있겠어?”

“그렇게 믿음이 없을 바에는 헤어지는 게 낫지.”

“너, 진짜! 뭐 하러 금실 좋은 부부 사이에 훼방을 놓으려고 해?”

가동이 언성을 높였지만 사장풍은 어깨를 들썩일 뿐이었다.

“내가? 오늘 일은 전진곤 그 망할 놈 때문이야. 나는 장군으로서 할 일을 한 거고.”

“월향이 죽기 살기로 난리 친 것도 아니라던데 뭐 하러 왕비 마마께 데려온 건데?”

“월향이 왕비 마마께 데려가자고 해서 데려온 거다.”

말문이 막힌 가동은 그를 흘겨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봐도 소용없어. 정말 월향이 오자고 했으니까. 이곳이 친정이나 다름없는데 큰일을 겪고 또 어디를 찾아가겠어?”

가동이 씩씩거리다 혀를 찼다.

“참나, 네 꿍꿍이를 나한테까지 속이려고? 분명 월향이를 압박해서 왕비 마마를 찾아오게 했겠지. 왜냐! 왕비 마마가 보고 싶기도 하고, 왕야랑 다시 승부를 내고 싶기도 했을 테니까. 사장풍, 내가 널 몇 살 때부터 알았는데, 네 담이 얼마나 큰지도 모르겠냐?

그래도 네가 목숨을 저버릴 만큼 담이 크다고 생각하진 않아. 물론 감히 왕야한테 수작을 부리는 사람도 없고. 왕비 마마는 왕야의 목숨과도 같은 분이야. 계속 이렇게 하다간 너도 모르는 사이 황천길로 가게 될 거야. 정신 차려.”

“덕담 고맙다. 참고할게.”

가동에게 속마음이 들통나긴 했지만 사장풍은 개의치 않았다.

“정말 그런 날이 오면 괜히 멀리 오지 말고 깨끗하게 불태워 줘.”

가동은 맥이 빠져 고개를 젓기만 했다. 아무리 말해도 들으려 하지 않으니, 헛수고를 한 셈이다. 성문 앞에 다다른 가동이 영패를 보이며 문을 열라고 분부했다. 사장풍은 말에 오르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나갔다.

어둠 속으로 빠르게 스며드는 그를 지켜보던 가동이 조용히 탄식을 내뱉었다. 그도 말에 올라탄 후 천천히 관저로 향했다.

깊숙이 박힌 정을 뽑아내려면 뼈를 깎는 아픔을 각오해야만 한다.

사장풍의 슬픔을 천천히 곱씹어 보던 가동은 문득 자신의 행복을 떠올렸다.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가동은 초왕이 돌아오는 대로 곧장 혼사를 치르겠다고 청을 드릴 마음을 먹었다.

* * *

이튿날, 양보전이 사건에 가담한 사실을 알게 된 월규가 분을 못 이겨 소리를 질렀다.

“내가 정말 미쳐, 미치겠어! 그런 바보한테 걸려들어서! 오수진에는 돌아갈 생각도 하지 마.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 보라지!”

월향도 화가 나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지아비인지라 그를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컸다.

“그이도 이렇게 될 줄 모르고 시작한 일이었어. 네가 못 봐서 그렇지, 그 금수 같은 놈을 붙들고 얼마나 주먹질을 해 댔는데. 그놈 얼굴에 든 멍은 다 그이가 때려서 그런 거야.”

월규가 답답한 듯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지금 그걸 감쌀 때야? 바보니까 일이 이렇게 되는 건 생각 못 하는 거지. 이런 일이 이번 한 번만 있을 것 같아?”

백천범이 얼른 두 시녀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우리도 좋은 마음으로 시작한 일을 그르칠 때가 있는데, 형부는 오죽하겠어. 월규 넌 두 사람을 갈라놓을 생각이야? 옛말에 절을 열 곳 허물지언정 혼사는 한 건도 깨뜨릴 수 없댔어.”

울상이 된 녹하가 백천범을 타박했다.

“아이고, 마마. 저 애들을 걱정하고 계실 때가 아닙니다. 본인을 돌이켜 보십시오. 왕야께서 어젯밤 사 장군과의 일을 아시면 어찌한단 말입니까?”

“알면 아는 거죠. 나는 부끄러운 일 따위 하지 않았으니, 하나도 겁나지 않아요.”

백천범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저나 기홍 언니는 왜 안 보여요?”

“영구 무사님이 떠난 뒤로 넋이 나가 있습니다. 지금쯤 주방에 틀어박혀 있겠죠.”

녹하가 입을 삐죽거리며 덧붙였다.

“나이도 다 찼으니 슬슬 시집을 생각해야 할 텐데 말이에요.”

때마침 들어선 가동이 그녀를 바라보며 얼른 받아쳤다.

“시집을 가더라도 녹하 네가 먼저 가야지.”

그의 말에 여인들이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녹하만 놀란 얼굴로 그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사부님 말이 맞아요.”

백천범이 키득거리며 거들었다.

“시집을 가더라도 차례는 지켜야지요.”

녹하가 가동에게 눈을 힘껏 부릅뜨며 으르렁거렸다.

“안채에는 뭐 하러 왔어?”

“볼일이 있으니까 왔지.”

가동은 평소와 달리 기세등등하게 서 있었다.

“왕야께서 다른 사람은 안채에 들 수 없지만, 나는 된다고 하셨어. 왜인 줄 알아?”

“왜?”

가동이 엄지를 세워 자신을 가리켰다.

“왕야께서는 날 신임하시거든!”

녹하가 헛웃음을 흘리더니 손을 휘휘 저었다.

“할 말 있으면 빨리하고 나가. 괜히 여인들이 하는 말 엿듣지 말고.”

“나도 엿듣기 싫은 건 마찬가지거든.”

가동이 품에서 서신 한 통을 꺼내더니 백천범에게 공손히 건넸다.

“왕야께서 떠나시는 길에 왕비 마마께 남기신 서신입니다. 마마의 답장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백천범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봉투를 뜯었다.

“어째서 서신을 남기신 걸까? 할 말은 돌아오셔서 하면 될 텐데.”

값비싼 재질의 희고 부드러운 종이를 펼치니, 한 줄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그리움을 물으려 해도, 무정한 내 님은 알지 못하네.」

백천범은 한참을 들여다보았지만 어리둥절할 따름이었다. 그리움이라는 단어가 있는 걸 보면 그녀가 보고 싶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무정한 내 님은 대체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녀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왕야께서 답장을 달라고 하셨어요?”

“예. 이건 어제 쓰신 서신이고, 오늘 쓰신 건 내일 도착할 예정입니다. 왕야께서 둘 다 답장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백천범은 여전히 의아한 듯 재차 물었다.

“왕야께선 내일 돌아오시잖아요. 그런데도 서신을 남기신다고요?”

가동이 어떻게 설명할지 궁리하다 머리를 긁적였다.

“왕비 마마, 이 또한 연정의 정취를 느끼는 방법입니다. 날마다 함께 있어도 편지를 주고받는 이들도 있다고 합니다. 왜, 편지에 마음을 담는다고 하지 않습니까? 말로 하기 어려울 땐 격조 있게 편지로 전하기도 하지요.”

백천범이 입술을 삐죽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아 죽겠네. 난 알아듣기 쉽게 말로 하는 게 좋은데. 이렇게 괴상한 말을 써 놓으면 어떻게 알아보겠어.”

월규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왕비 마마, 굳이 알아보려 애쓰지 마시고 어서 답장을 써 드리십시오.”

“뭐라고 쓰지?”

“평소에 쓰는 말 대신 심오하고 격조 있는 말을 쓰시면 됩니다.”

“나는 그런 거 못 하는데……. 내가 어려운 말을 어찌 알겠어.”

다들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가동이 별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 왕야께서 알아보시기 쉽게, 편하고 간단히 쓰십시오.”

백천범은 솔직한 마음을 담아 ‘보고 싶어요’라고 쓰고 싶었지만 너무 단순해 보였다. 책상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던 그녀가 마침내 붓을 들더니 종이에 뭔가를 끄적였다. 조심스레 바람을 불어 먹을 말린 그녀가 종이를 고이 접어 건넸다.

“다 썼어요. 이대로 왕야께 전해 주세요.”

그 후 다들 백천범에게 서신의 내용을 물어봤지만 그녀는 웃기만 할 뿐 대답을 피했다. 궁금증에 그녀를 다그치자 보기 드물게 수줍어하는 기색을 보였다.

한창 웃고 떠드는데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들어섰다.

“역시 왕비 마마가 계신 곳은 떠들썩하군요. 제 누각은 적막해서 오래 있으면 오싹할 정도랍니다.”

백천범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주아 언니. 이리 앉으세요.”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시길래, 이리 떠들썩합니까?”

녹하가 황보주아에게 뽐내듯 말했다.

“왕야께서 왕비 마마께 서신을 보내셨습니다. 워낙 심오한 내용이 담겨 있어 의미를 파악하시는 중이었답니다.”

황보주아는 흠칫 놀랐지만 여전히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그래요? 무슨 내용을 쓰셨길래요?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맞습니다. 황보 아가씨께 보여 드리십시오. 아가씨는 학식이 뛰어나시니 분명 뜻을 이해하실 거예요.”

녹하가 서둘러 월규에게 눈짓을 보냈다.

월규는 얼른 백천범의 손에서 편지를 뺏어 황보주아에게 건넸다.

“황보 아가씨, 한번 보십시오. 저희 마마께는 수수께끼나 다름없습니다.”

두 시녀의 속셈을 백천범도 눈치챘지만 내버려 두었다. 그녀도 조금 우쭐한 기분에 사로잡히긴 했다. 고작 사흘 길을 떠나면서 연서를 보내다니, 이 얼마나 열렬한 마음이란 말인가.

황보주아는 편지를 받아들더니 천천히 글귀를 훑었다.

「그리움을 물으려 해도, 무정한 내 님은 알지 못하네.」

표정이 조금 부자연스러워진 황보주아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셋째 오라버니께서 전투만 잘하시는 줄 알았더니… 이런 고상한 취미도 있으셨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왕야의 흥취가 누구를 향하는지가 중요하지요.”

녹하가 그녀를 슬쩍 바라보더니 다시 편지를 가져가며 들으란 듯 중얼거렸다.

“왕비 마마를 다시 만나시니, 왕야의 흥취가 폭발하셨겠지요.”

황보주아는 치밀어오르는 경멸을 견딜 수 없었다. 저속한 주인 아래 무식한 계집종이 아닌가. 흥취가 폭발하다니, 저질스러운 말을 하고 부끄럽지도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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