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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47)화 (346/1,192)

제347화

역시나 사장풍은 잠시 망설이더니 칼을 내려놓았다.

“왕비께 해결해 달라고 청하겠다?”

“예. 왕비 마마께서 분부하시는 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왕비 마마께서 목을 치라고 하면 죽이고, 살려 두라고 하시면 살려 두겠습니다.”

사장풍이 비로소 칼을 칼집에 꽂아 넣었다.

“좋소. 월향 아씨가 그리하고 싶다면야 왕비 마마께 청해 보는 게 좋겠소.”

사장풍이 칼을 거두자 다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사장풍은 몸종에게 밧줄을 가져오라 분부했다.

이장이 사장풍에게 다가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장군님, 지금은 성문이 닫혀 들어갈 수 없습니다. 내일 아침에 다시…….”

“장군이 성에 들어가겠다는데 누가 문을 열지 않는단 말이오?”

사장풍은 직접 전진곤을 밧줄로 묶은 후 밧줄 끝을 손에 단단히 쥐었다. 사장풍이 그를 밀치며 준엄하게 외쳤다.

“앞장서거라!”

“사 장군님.”

월향은 통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사장풍의 행동이 너무 과하니, 가는 길에 목을 벨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다급히 말을 이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양보전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부인, 가지 말아요.”

월향은 언짢은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 바보 천치가 오늘의 사달을 일으켜 놓고, 누굴 말린단 말인가!

“소란 피우지 말고 얌전히 있어요. 볼일을 마치면 바로 돌아올 테니까요.”

“하지만…….”

“한 번만 더 소란을 피우면! 안 돌아올 줄 알아요.”

“아… 아…….”

결국 양보전은 입을 꾹 다물고 가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장 또한 비슷한 걱정을 하고 있었는지, 황급히 월향의 편을 들었다.

“향이도 간다고 하니 마차를 부르겠습니다.”

결국 월향을 태운 마차는 어둠을 뚫고 수성으로 향했다.

* * *

백천범은 잠결에 녹하의 어렴풋한 목소리를 들었다.

“왕비 마마, 큰일 났습니다. 어서 일어나십시오. 왕비 마마, 마마께서 직접 가셔야 합니다…….”

큰일이라니? 백천범은 벌떡 일어나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일이에요? 설마 왕야께서…….”

묵용감이 떠난 지 하루가 지났지만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녹하가 이 밤중에 깨웠으니, 설마 그에게…….

“왕야께서는 아주 잘 지내시는데 무슨 일이 났겠습니까.”

녹하가 그녀를 나무라더니 황급히 용건을 늘어놓았다.

“월향이요. 지금 월향이… 아이참, 간단히 말할 내용이 아니니 마마께서 직접 가셔야 합니다. 목숨이 오가는 일만 아니었어도 마마의 잠을 방해하지 않았을 텐데요.”

목숨이 오간다는 말에 백천범은 덜컥 겁이 났다. 그녀가 서둘러 옷을 입고 밖으로 뛰어나갔다.

“월향이는 어디 있어요?”

“대청에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녹하가 월규를 불렀다.

“어서 등불을 밝혀 드려. 넘어지시지 않게.”

백천범은 서둘러 대청으로 향했다. 대청에 이르니 가동이 사장풍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월향은 한쪽에 조용히 서 있었다. 또 누군가 울상이 되어 무릎을 꿇고 있었지만,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곧바로 월향에게 달려갔다.

“대체 무슨 일이 난 거야?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월향은 백천범을 보자마자 입술을 달싹이다 눈물을 뚝뚝 떨궜다. 그동안 참고 있던 눈물이 터져 버리니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울지 말고, 대체 무슨 일이야?”

한편 사장풍은 그녀가 대청에 온 순간부터 그녀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못 본 사이 그녀는 더 아름다워졌다. 유복한 생활을 누리는지 뽀얗고 윤기 나는 얼굴이 더없이 탐스러웠다. 이 상황이 어리둥절한 얼굴은 사랑스럽기까지 했다.

“왕비께 아룁니다.”

그가 백천범에게 다가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는 간략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백천범의 눈썹이 한껏 치켜 올라갔다. 누군가 월향을 업신여길까 걱정이 되어 혼수를 잔뜩 실어 보내고 거창한 혼례를 치러 주었는데! 그런데도 죽음을 자초하는 자가 있다니 도저히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전진곤에게 다가가 있는 힘껏 가슴팍을 걷어찼다.

“이런 죽일 놈, 감히 내 사람을 건드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인 데다 월향과 관련된 일인 만큼 초왕비의 발길질은 더없이 매서웠다. 제대로 혼쭐을 내줄 생각이었지만 사장풍이 그녀를 말리고 나섰다.

“왕비 마마, 그러다 몸 상하시겠습니다. 소인이 하지요.”

덜컥 겁이 난 전진곤이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그러다 정말 맞아 죽겠습니다.”

백천범은 그제야 전진곤의 상태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그의 얼굴은 눈 뜨고 볼 수 없을 만큼 참혹했다. 이장에게 맞고 양보전, 사장풍에게 맞은 것까지 더해져 얼굴이 피멍투성이였다. 게다가 손에는 더러워진 천을 감고 있었는데 탁한 핏빛인 걸 보니 이미 혼쭐이 난 듯했다.

여느 때라면 백천범도 더는 화를 내지 못했을 테지만, 지금은 도무지 울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녀가 또다시 전진곤을 걷어차며 소리쳤다.

“이런 놈은 맞아도 싸지!”

월규도 기회를 엿보다 있는 힘껏 그를 걷어찼다. 함께하며 친자매처럼 고난과 즐거움을 나누었던 세 사람이다. 자매가 그런 짓을 당했는데 어찌 혼쭐을 내주지 않고 참을 수 있을까!

머리끝까지 화가 나 씩씩거리는 왕비를 보고 사장풍이 입을 열었다.

“한밤중에 찾아와 송구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월향 아씨가 왕비 마마께 일을 맡기고 싶다고 하기에…….”

백천범이 의아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어찌 예를 차리는 거예요? 이런 일이라면 당연히 제게 알려 줘야죠. 사 장군님은 잘못하신 거 없어요.”

그녀가 월향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어?”

“관아로 보내서 관리 나리께 판결을 내려 달라고 하고 싶습니다.”

월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가 수성에서 제일 큰 관청이잖아? 어느 관아로 보내려고?”

백천범이 고민에 빠져 턱을 괴었다.

“왕야께서 계셨다면 처리해 달라고 했을 텐데.”

그때 가동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럼 왕야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가둬 두시죠.”

백천범도 가동의 의견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서둘러 전진곤을 압송하라는 분부를 내린 뒤, 월향의 손을 꼬옥 잡았다.

“늦었으니까 오늘은 여기서 자고 가.”

월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을 겪고 나니 그녀도 지금은 양보전을 보고 싶지 않았다.

백천범이 사장풍에게 가볍게 예를 갖췄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사 장군님.”

그녀를 바라보는 사장풍의 눈빛이 그윽하게 가라앉았다.

“왕비 마마를 위한 일이라면 소인은 목숨도 아깝지 않습니다.”

왠지 모르게 그의 눈빛이 두려워, 백천범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사부님, 사 장군님을 배웅해 주세요.”

바보 같은 사장풍의 모습에 가동마저 식은땀이 났다. 가동이 서둘러 그를 끌고 나왔다.

“어서 나와. 곧 날이 밝을 텐데 왕비 마마도 더 주무셔야지.”

사장풍은 가동에게 이끌려 문으로 향했지만 시선은 여전히 백천범에게 머물러 있었다.

가동은 있는 힘껏 그를 잡아끌며 문을 나섰다.

“됐어, 그만 봐. 왕야께서 안 계셔서 다행인 줄 알아. 이 자리에 계셨다면 네 눈을 뽑으셨을지도 몰라.”

사장풍은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내디뎠다. 도대체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가동은 그의 생각을 헤아릴 수 없어 답답할 따름이었다.

별안간 걸음을 멈춘 사장풍이 몸을 돌려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가동은 깜짝 놀랐지만 큰 소리를 낼 수도 없으니 조용히 다그쳤다.

“야, 어디 가! 죽으려고 환장했어? 대체 뭐 하려고!”

금세 사장풍의 시야에 백천범이 들어왔다. 그녀는 등불을 든 시녀들에게 둘러싸여 후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서둘러 뒤쫓으며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

백천범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사 장군님, 무슨 일 있으세요?”

등불에 희미하게 비친 사장풍의 얼굴은 더없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우물거렸다.

녹하가 경계하는 눈빛을 보내며 말을 건넸다.

“이곳은 안채입니다. 사 장군님이 출입하실 수 없는 곳이니 이만 돌아가 주십시오.”

“왕비 마마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안 됩니다. 규율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오늘 밤, 감히 이곳을 찾을 때부터 마음의 준비는 끝나 있었다. 어떠한 희생을 치러도 상관없었기에, 그는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백천범은 그의 고집을 알기에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곧 갈 테니까 다들 앞에서 기다려.”

시녀들도 사장풍이 무섭긴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옆 처소에 태자가 묵고 있어 소란을 피울 수도 없으니, 그녀들은 머뭇거리다 자리를 피해 주었다.

“무슨 말인데요? 말해 보세요.”

무심한 말투에 사장풍의 얼굴에 절로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잘, 지내셨습니까?”

백천범이 빠르게 답했다.

“네.”

“전 잘 못 지냈습니다.”

사장풍이 그녀를 깊은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전혀 잘 지내지 못했습니다. 천범 아가씨, 저는…….”

“그만하세요.”

백천범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잘랐다.

“그런 말씀을 하실 거라면 가겠어요. 장군님이 어떻게 지내든 저와 상관없는 일이에요. 전 이미 시집을 온 몸이라는 걸 잊지 마세요. 아직도 오해로 시간을 허비하고 계신다면 저도 드릴 말씀이 없네요. 그러니 장군님, 더는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듣고 싶지 않아요.”

사장풍은 잠시 시선을 떨궜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송구합니다.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이렇게 찾아온 건 아가씨가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잘 지내시는 모습을 봤으니 마음이 놓입니다.”

“네, 잘 보셨죠? 저는 누구보다 풍족하고 즐겁게 살고 있어요.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을 정도예요.”

“아가씨께는 오해였을지 몰라도… 제겐 운명이었습니다.”

사장풍이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천범 아가씨, 아가씨를 못살게 구는 자가 있거든 제게 꼭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그자의 숨통을 끊어놓고 말겠습니다.”

그의 말에도 백천범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제가 직접 처리할 수 있으니 장군님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사장풍의 입가에 서글픈 미소가 맺혔다. 그녀의 앞에서 그의 감정은 어떠한 가치도 없는 듯했다.

“그럼 건강 잘 챙기세요. 전 이만 갈게요.”

“예. 조심히 가십시오.”

사장풍은 미련이 가득 남은 눈에 그녀를 담아 두었다. 밤바람에 그녀의 옷자락과 긴 머리카락이 나부꼈다. 밝게 빛나는 까만 눈동자는 속세에 잠시 내려온 요정처럼 맑고도 찬란했다.

“아. 장군님!”

그녀가 갑작스레 입을 여는 순간 사장풍의 마음은 금세 희망으로 부풀어 올랐다.

“무슨 일이십니까?”

“앵앵이에게 잘해 주세요. 정말 좋은 아가씨니까요!”

사장풍은 입꼬리를 움찔거리더니 빠른 속도로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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