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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45)화 (344/1,192)

제345화

그자는 배를 감싸 쥔 채 손을 내저었다.

“조용, 조용. 향이, 나요.”

익숙한 목소리였지만 좀처럼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누구? 누구란 말이오?”

“나요.”

통증이 조금 가신 후에야 전진곤이 몸을 일으켰다.

“나란 말이오.”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월향은 치솟는 분노에 눈에서 피가 쏟아질 듯했다. 가위를 손에 꼭 쥔 월향이 천천히 다가갔다.

“전진곤, 이 금수만도 못한 놈. 감히 이런 일을 벌이다니! 천벌이 두렵지도 않은가!”

“아니, 향이, 내 말 좀 들어 보시오.”

전진곤은 겁이 나기 시작했다. 월향은 부끄러움도 많고 무른 성격이라 잘만 하면 그가 원하는 대로 다룰 수 있을 줄 알았다. 이렇게나 매운 성격일 줄이야. 이를 바득바득 갈며 가위를 치켜든 월향을 보니 자연스레 그녀의 공격이 떠올랐다. 하마터면 다시는 그 부위를 못 쓸 뻔했다.

“보, 보전이가 시킨 것이오.”

전진곤이 그녀를 바라보며 조심스레 말을 늘어놓았다.

“부인이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데 자, 자신은 할 수 없으니… 대신해 달라고 했소. 어쨌든 우린 피를 나눈 혈육이 아니오? 그러니 아이만 낳으면 누, 누가 아버지가 되든 상관없다며…….”

“닥치시오!”

어찌나 화가 났는지, 월향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어떻게 그이의 말을 진담으로 받아들인단 말이오? 당신이 못된 마음을 먹은 게 분명하지. 이 일은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겠소. 관아에 고할 것오!”

“향이, 어찌 그런 말을 하시오. 일이 커지면 당신에게 좋을 게 있겠소? 나는 사내라 시답잖은 말 몇 마디 들으면 끝이지만, 당신은 죽을 때까지 남들의 입방아에 오르지 않겠소? 앞으로 평안한 날들을 보내고 싶다면 얌전히 있으시오. 자고로 명예와 절조가 중요한 법이지. 안 그렇소?”

그의 말이 월향의 마음을 난도질했다. 초왕의 저택에서 전 씨와 측왕비가 왕비의 돈으로 그녀를 모함에 빠뜨렸을 때, 억울함을 참지 못하고 호수에 빠졌던 그녀였다. 이 일은 돈 몇 푼에 속았을 때와 비교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의 의견은 손쉽게 한쪽으로 치우쳤고, 힐난의 눈빛은 여인에게만 향했다. 이 일이 알려지면 그들이 어떤 말을 수군거릴지 뻔하지 않은가. 그녀의 고운 마음씨를 칭찬하며 선녀라 부르던 이들도 한순간에 등을 돌릴 터였다.

벌써부터 사람들의 손가락질이 눈앞에 아른거리는 듯해, 억울함이 치솟았다. 그녀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그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그녀의 마음이 움직였다고 생각한 전진곤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향이, 어서, 가위는 이리 주시오. 대화로 풀어나가면 되지 않소? 바보에게 시집왔으니 그 억울함을 내가 아오. 세상에 이런 일이 어디 있단 말이오? 멀쩡한 여인을 바보에게 시집보내다니. 더욱이 혼사를 치른 지가 언젠데 아직도 이런 처지가 아니오? 이 일은 남녀 불문하고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오.”

그가 조금씩 그녀 곁으로 다가오며 목소리를 낮췄다.

“향이. 내가 있으니 괜찮소. 그 바보보단 내가 낫지 않소? 그대를 즐겁게 해 주겠소. 그대만 동의한다면 고모 내외도 뭐라 하지 못할 것이오. 함께 있으면 누구든 가족이 아니겠소?”

그는 월향에게 말을 건네는 한편 손을 뻗어 가위를 뺏으려 했다. 그러나 넋을 놓은 줄 알았던 월향의 손이 훨씬 날쌨다. 순식간에 전진곤의 손등에 가위가 꽂혔고, 두 사람의 시선이 잠시 그의 손등에 머물렀다.

곧장 비명이 터져나왔다. 월향이 황급히 가위를 뽑았지만 상처 틈으로 피가 울컥 솟아올랐다. 전진곤은 이리 많은 피를 본 게 처음이라, 아픔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그는 죽을 듯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월향도 손을 흠칫 떨며 가위를 떨어트리더니 몇 걸음 물러나 놀란 눈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비명을 들은 몸종과 할멈이 곧장 달려왔다. 눈 앞에 펼쳐진 상황에 그들은 넋을 놓았지만 할멈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수습했다. 할멈은 몸종을 시켜 가져온 천으로 전진곤의 손을 감싸 주었다. 그제야 피가 천천히 멎고 전진곤의 비명도 잦아들었다.

설명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전진곤은 마을에서 이름난 호색한이 아닌가. 고모 내외가 외출한 틈을 타 일을 꾸민 게 분명했다. 월향이 순순히 넘어오지 않으니 이런 사달이 일어났으리라.

마을 사람들은 늘 월향의 과감한 선택과 고운 마음씨를 아낌없이 칭찬했다. 그녀를 대견하게만 여겨왔는데 전진곤, 이 금수만도 못한 놈이 감히 넘보다니! 평소였다면 이장의 아들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겠지만 지금은 달랐다. 할멈과 몸종은 삿대질을 하며 월향 대신 욕을 퍼붓고 화를 냈다.

손을 다친 전진곤은 음흉한 마음 따위는 진작 달아난 터였다. 그는 그저 이 일이 여기에서 묻히길 바랐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지만, 이렇게 네 사람만 알면 되는 일이 아닌가? 다른 건 나중에 생각해도 되었다.

그가 할멈과 몸종에게 평소처럼 거드름을 피웠다.

“오늘 일은 절대 입 밖에 내지 말거라. 감히 발설하려 한다면 이 도련님이 너희 목을 베어 물고기 밥으로 뿌려 주마!”

할멈과 몸종은 눈치를 살피더니 월향을 힐끗 보고 입을 열었다.

“물고기 밥이 되는 게 두려워서 말하지 않는 게 아닙니다. 우리 아씨의 명예 때문이지요. 이렇게 선녀 같으신 분을 어찌… 도련님이 함부로 대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전진곤도 자신의 행실이 어떤 의미인지 알기에 하인들에게 질타를 받아도 참는 수밖엔 없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월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가까스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길게 드리운 속눈썹이 눈망울에 담긴 그녀의 감정을 가려주었다.

“향이.”

그가 부드럽게 그녀를 불렀다.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 합시다. 내가 그대를 어찌하진 않았잖소?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하고 그만 쉬시오. 나는 가보겠소.”

월향이 곧장 고개를 치켜들었다.

“뭐라고 하였소,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하자?”

그녀가 탁자를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감정이 한순간에 폭발한 듯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시린 한기가 깃들었다.

“나를 이리 업신여기고도 아무 일도 없었던 걸로 하자니?”

전진곤이 시선을 피하며 웅얼거렸다.

“어, 어쨌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잖소.”

그가 천이 감긴 손을 조심스레 보여 주었다.

“하지만 당신이 내게 손을 쓴 건 확실하지 않소? 따지고 보면 내가 손해를 입은 셈이오.”

월향이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더니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흩뿌려졌다.

“손해?”

할멈과 몸종이 서둘러 그녀를 다독였다.

“아씨, 노여움을 푸십시오. 이런 인간 때문에 노여워하실 가치도 없습니다. 괜히 아씨의 몸만 상하십니다. 한바탕 울고 털어 버리십시오. 일을 크게 만들면 아씨께도 좋지 않습니다…….”

“난 크게 만들어야겠네. 저자가 금수만도 못한 인간이라는 걸 모두가 알아야지!”

월향이 시린 눈으로 전진곤을 노려보았다.

“저자를 관아로 데려가 관리 나리께 억울함을 고해야겠네.”

월향은 할멈과 몸종에게 이장을 불러오라며 다그쳤다. 전진곤을 관아에 데려가겠다는 뜻을 절대 굽히지 않을 작정이었다. 할멈이 난처한 표정으로 그녀를 달랬다.

“아씨, 밤이 늦었으니 그만하시지요. 입에 올릴 일이 못 됩니다. 도련님 말씀대로 이쯤에서 끝내시는 게 좋습니다.”

월향은 그럴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목에 가위를 대더니 충혈된 눈으로 매섭게 쏘아붙였다.

“이장님과 사 장군님을 모셔오게. 우선 마을에서 가장 높은 분들께 이 사실을 고해야겠네.”

월향이 이렇게나 완강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전진곤은 창자가 뒤틀릴 만큼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늦었다. 진작 알았더라면 돈을 얼마나 준다고 한들 절대 하지 않았을 텐데…….

할멈이 겁에 질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씨, 저희가 떠난 뒤에 도련님께서 또, 또다시 아씨께 손을 대려 한다면…….”

“어딜 감히!”

월향의 싸늘한 음성이 모두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꼿꼿이 서서 전진곤을 쏘아보는 월향은 어느새 다른 사람으로 변해 버린 듯했다. 늘 온순하고 상냥하던 여인은 온데간데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흠칫 놀란 전진곤은 세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틈을 타 슬쩍 몸을 돌렸다.

“멈추시오!”

월향이 매섭게 소리쳤다.

“도망쳤다간 당장 죽어 버릴 테니 그리 아시오.”

그가 월향의 목숨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는 하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아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거렸다.

두 사람을 번갈아 살피던 할멈과 몸종은 머뭇거리다 월향의 말을 따랐다. 대문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월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간 김에 도련님도 찾아오시게. 이런 한밤중에 밖에 서 있게 하지 말고.”

할멈과 몸종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도련님 걱정이라니, 정말 그녀의 마음씨에 탄복할 따름이었다.

전진곤은 덜컥 겁이 났다. 큰일이 날 게 뻔하지 않은가. 월향은 초왕비와 친분이 각별한 사이니, 만약 초왕에게도 이 일이 알려지면 살아남을 길이 없었다.

그는 아무도 없는 틈을 타 재빨리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

“향이, 내가 잘못했소. 그대의 넓은 도량으로 부디 용서해 주시오. 우리 아버지를 봐서라도, 제발. 우리 아버지께서 그대를 얼마나 아껴 주었소? 이번 한 번만 용서해 주시오, 향이…….”

월향은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며 그를 곁눈질로 지켜보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그녀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여린 성격인 터라 누군가 그녀를 업신여겨도 화를 삭일 뿐 한 번도 소란을 피운 적이 없었다.

그녀는 남들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게 끔찍이도 싫었고, 명예를 가장 중시했다. 억울함을 씻을 수 없다면 죽음으로 결백을 증명할 각오도 있었다.

하지만 목숨을 끊으려 했던 일로 크게 혼이 난 그녀는 왕비에게 다시는 바보 같은 짓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래, 왕비의 말이 맞았다. 죽는 건 살아가는 일보다 쉬울지 몰라도, 어찌 보면 비겁한 선택이 아니던가. 월향은 죽은 뒤에 겁쟁이라는 오명을 남기고 싶진 않았다.

그녀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전진곤은 아예 자신의 뺨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향이, 난 인간도 아니오! 금수나 다름없소. 부디 날 용서해 주시오. 그대는 선녀이자 나약한 이를 구하러 온 보살이 아니오? 제발 인정을 베풀어 관아에 가는 일만큼은 참아 주시오. 연로한 어머니와 어린 자식까지 있는 내가 어찌 옥살이를 할 수 있겠소.”

추하다. 월향의 마음에 한 감정이 깃드는 순간,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차분해졌다. 그간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힘이 그녀를 충만하게 채우고 있었다. 그녀를 이 순간 강하게 만드는 이 힘이, 남들이 말하던 굳은 의지가 아닐까.

그녀는 주관이 없는 사람으로 살아왔다. 무슨 일이 생기면 회피하거나 적당히 넘기려고만 했다. 그러나 왕비와 함께 지내면서 많은 일을 겪었다. 그녀는 더욱더 용감해졌고, 책임을 지는 법을 배웠다. 그녀는 비로소 떳떳하고 당당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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