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4화
“저는 형님께서 주아를…….”
“주아는 내게 동생이 아니더냐. 어릴 때부터 그러했지. 오해할 게 있느냐?”
묵용감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저 형님을 보살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태자가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다.
“그 사람이 주아는 아니로구나.”
두 형제는 서로에게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낼 뿐이었다. 곧 태자가 화제를 돌렸다.
“영구가 파견 근무를 나갔다고 들었다.”
“예, 데려올 사람이 있어서 잠시 보냈습니다.”
태자의 눈빛이 잠시 번득였다.
“데려올 사람이라니?”
묵용감이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학평관이라고 제 저택에서 일했던 총관리인입니다. 이제는 안정을 되찾았으니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더군요. 왕비가 돌아와 지출이 늘어난 탓에 관리할 사람이 있어야겠습니다.”
이미 소문을 들었던 태자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시녀의 혼수로 그리 많은 은자를 썼다지. 몇 명 더 보냈다간 우리 초왕야의 재산을 탕진할지도 모르겠구나.”
* * *
백천범은 잔뜩 골이 나 있었다. 자신을 두고 혼자 금릉에 간다니!
천하에 두려운 게 없는 초왕이었지만 부인이 성을 내면 조마조마하기 그지없었다. 화를 내다 혹여 몸이라도 상하면 어찌한단 말인가?
그가 나긋하게 타이르기 시작했다.
“날이 너무 덥지 않소. 몇 시진이나 이동하니 더위를 먹을까 걱정이 되오. 금릉은 수성보다 훨씬 더워, 저녁이 되어도 지면에서 열이 올라와 견디기 힘들 정도요. 더욱이 궁을 짓는 일로 가는 것이오. 공사를 하고 있어 소란스럽고 위험하니 그대가 갈 만한 곳이 못 되오. 일꾼들도 사내들뿐이라 불편하지 않겠소.”
백천범도 묵용감의 말을 이해하곤 있었다. 그녀를 위해 혼자 다녀오려는 그의 마음도 잘 알았다. 그래도 갑자기 떨어져야 한다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묵용감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등에 업고 한바탕 소란이라도 피워 기분을 조금이라도 풀고 싶었다.
그녀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묵용감이 얼굴을 들이밀며 속삭였다.
“계속 말을 하지 않으면 연지를 다 먹어 버리겠소. 정말이오…….”
그래도 백천범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정말로 먹어 버리는 수밖에.
그는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입술을 핥았다.
하인들 앞에서도 거리낌 없이 사랑을 과시하는 부부 때문에 월규의 눈치는 나날이 빨라지고 있었다. 어느새 그녀는 소리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묵용감이 오랫동안 그녀의 입술을 핥다 장난스레 물었다.
“오늘은 다른 연지를 발랐소? 평소와는 다른 맛이군……. 흠, 다시 맛봐야겠소…….”
백천범은 더는 참지 못하고 깔깔거리며 몸을 피했다.
“거짓말, 어제랑 똑같은 거예요.”
“아니오. 정말 다르오. 다시 맛봐야겠소.”
그는 그녀를 꼭 껴안은 채,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자극했다.
그때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꼭 붙어 있는 두 사람을 본 듯 짧은 비명이 들려 왔다.
백천범은 서둘러 묵용감을 밀쳐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황보주아였다. 백천범이 붉게 물든 얼굴로 황보주아를 바라보았다.
“언니, 무슨 일이에요?”
황보주아는 난데없이 호되게 얻어맞은 듯 얼떨떨했다. 백천범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잔뜩 달아오른 얼굴로 민망한 웃음을 흘렸다.
“제가… 때를 잘못 맞춰 찾아온 듯합니다.”
그녀의 시선은 백천범을 향했지만 동시에 묵용감을 곁눈질했다. 어쨌든 그녀와의 과거를 생각한다면 고개를 들 면목이 없어야 하지 않는가.
정작 그에게서 난처한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그녀가 보고 있는데도 백천범의 입가를 닦아 주기까지 했다. 백천범의 여린 입술을 스치는 손끝이 야릇해, 그녀는 흠칫 놀라며 시선을 돌렸다.
그녀에 대한 감정은 정말 조금도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그는 애정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백천범을 살뜰히 챙겨 주었지만, 그녀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조금 다른 줄 알았건만, 다른 사내들처럼 몰인정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짧은 곁눈질을 할 뿐, 그녀에게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녀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들고 있던 물건을 그에게 건넸다.
“관청에 가려던 참인데 셋째 오라버니께서 이곳에 계시다 하여 들렀습니다. 경문을 썼는데 한번 봐 주시어요.”
묵용감은 받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태자께서 시키신 일이니 형님께 가져다드려야지.”
황보주아는 당황스러움에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었다.
“저는 셋째 오라버니께서…….”
백천범이 얼른 책자를 받아 들고 상황을 수습하려 했다.
“와, 정말 잘 쓰셨네요. 제 글씨보다 훨씬 더 예뻐요.”
묵용감이 그제야 웃으며 말했다.
“어찌 주아와 비교를 한단 말이오? 어릴 때부터 제대로 배운 사람과는 다를 수밖에……. 그래도 늦게 배운 것 치고 그대의 실력은 충분히 뛰어나오.”
백천범이 자신이 쓴 경문을 황보주아에게 보여 주었다.
“왕야께서 제 글도 절에 보내겠다고 하셔서 써 봤어요. 언니가 쓴 걸 보니 너무 부끄럽네요.”
그러나 묵용감이 또다시 그녀를 치켜세웠다.
“글씨보다 마음이 가장 중요하오. 그대의 마음만큼은 하늘을 감동하게 만들고도 남소.”
백천범이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그는 곧장 맞받아치며 무한한 애정을 쏟아부었다. 황보주아는 웃는 얼굴을 유지하려 부단히도 애썼지만, 당장이라도 이곳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그녀가 글씨를 아무리 잘 써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건만, 백천범이 쓴 지렁이 같은 글자는 마치 보석처럼 대하지 않는가. 문득 의구심이 솟구쳤다. 저토록 백천범을 아끼는데 저택에 있을 땐 왜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설마 반년 동안 떨어져 지내며 그녀에 대한 사랑이 갑작스레 솟구치기라도 했단 말인가?
묵용감의 입가에 번진 미소를 지켜보던 그녀는 별안간 답을 깨달았다. 백천범을 향한 애정은 까닭 없이 솟구친 마음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돌아온 순간부터 의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혹여 그녀가 백천범에게 못된 짓을 할까 거리를 둔 게 분명했다.
원칙대로 행하는 그녀의 성격상 정말 사람을 써서 백천범을 해할지도 모른다고 판단했으리라. 그녀가 그를 알듯이 그도 그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그는 제법 그럴싸하게 그녀를 속였다. 그녀에게 선물을 아끼지 않으며 회림각에 묵게 한 것도 모자라 백천범을 시골에 보내기까지 했다. 그에게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해 얼마나 기뻤던가. 돌이켜보니 그저 가소롭고 또 가소로웠다. 그녀는 그의 계획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여기까지 이르렀다.
이제 그는 자신의 사랑을 숨기지 않았다. 오히려 대낮에도 왕비와 꼭 붙어 모두가 그들의 애정을 알게 했다.
그녀는 자신이 쓴 경문을 손에 든 채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늘 자신이 대학사의 적녀란 사실을 잊지 않았다. 설령 남에게 얹혀산다 해도 그 고귀함까지 잃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천천히 정원을 가로질렀다. 찬란한 태양 아래 꽃송이는 강렬한 빛을 뿜었고 푸르른 나무는 우뚝 솟아 두꺼운 가지를 내뻗었다. 강남의 여름은 언제나 짙은 색채를 자랑했지만, 그녀의 눈에는 온통 잿빛으로 물든 세상뿐이었다.
겹겹이 둘러싸인 높은 처마, 흰 벽과 푸른 기와, 무수히 많은 누각이 그녀의 앞에 펼쳐졌다. 그중 한 곳도 그녀가 편히 지낼 장소는 없었다. 그녀의 처소라고 다를까. 그렇게 높은 곳에 지내면서도 안정감을 느낀 적도 없다.
언젠간 백천범이 허리에 손을 얹고 달려와 그녀를 내쫓을 듯했다. 그날이 온다면, 그녀는 한마디 대꾸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처소로 돌아가려던 그녀는 생각을 바꾸어 태자의 처소로 향했다.
마침 태자는 부하들과 공무를 논하고 있었다. 그녀가 들어오자 그가 곧바로 주위를 물리곤 덤덤하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경문을 썼습니다. 한번 봐 주시어요.”
태자가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경문은 그저 핑계였다. 내게 가져올 게 아니라 초왕에게 보여 줘야지.”
황보주아는 그에게 방금의 일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저절로 날카로운 대답이 흘러나왔다.
“태자 오라버니께 보여 드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제야 태자가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안색이 좋지 않구나.”
그녀가 힘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요. 날이 너무 더워 기분이 좋지 않을 뿐입니다.”
“그래, 무더위가 심하니 별일 없으면 누각에 머물러 있거라.”
태자가 문득 목소리를 낮췄다.
“누군가 우리의 이야기를 초왕에게 전할 수도 있으니, 의심받을 만한 행동은 하지 말거라.”
황보주아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듯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셋째 오라버니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우리 둘을 엮으려 했지.”
태자가 실소를 흘리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구나.”
그의 말투에 불쾌함이 역력하게 묻어났다. 황보주아는 비 오는 거리에 홀로 남겨진 듯 처량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녀는 경문을 내려놓고는 예를 갖춘 뒤 방을 나섰다.
그녀는 자신이 줄곧 태자를 사모한다고 믿었다. 그 때문에 그 모든 일을 기꺼이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조금 전 초왕의 공격에 그녀의 마음은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간 그녀의 마음에 초왕의 자리가 있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고 말았다.
초왕을 향한 마음은 태자를 향한 마음보다 작지 않았다. 결국 그녀의 마음에는 두 사내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명은 그녀에게 끝 모를 기다림을 주었고, 한 명은 손을 뻗을 수도 없는 절망만 안겨 주었다.
* * *
유월 열엿새 날 열여드렛날은 양보전의 고모가 며느리를 맞는 날이었다. 양보전의 부모는 저녁 연회에 참석하는 터라 오늘 밤은 집을 비울 예정이었다. 그들은 월향에게 문단속을 잘하라고 거듭 당부하고 집을 나섰다.
월향은 알겠다고 답했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수진은 순박한 시골 동네라 밤에도 대문을 잘 잠그지 않았다. 동네 사람들끼리 다들 얼굴을 알고 있으니 도둑이 드는 일은 극히 드물었고, 집안일을 돕는 할멈과 몸종도 있어서 겁날 게 없었다.
침소에 드니 누군가 그녀 옆에 눕는 게 느껴졌다. 양보전이라고 여긴 그녀가 등을 떠밀며 얌전히 자라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자는 그녀의 입을 막더니 다른 손으로 그녀의 요대를 풀기 시작했다.
혼이 나갈 만큼 깜짝 놀란 월향은 발버둥을 치며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나약한 여인이 건장한 사내의 힘을 어찌 이길 수 있을까. 속곳까지 손이 닿자 월향은 백천범이 가르쳐 주었던 초식을 떠올렸다. 그자의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을 때 월향이 있는 힘껏 무릎을 들어 올렸다. 역시나 낮은 비명과 함께 그자가 배를 감싸 쥐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는 황급히 탁자로 달려가 초의 심지를 자르는 작은 가위를 집어 들었다. 그녀가 두려움을 숨기며 매섭게 소리쳤다.
“누구냐, 당장 꺼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