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3화
이튿날, 양보전은 몰래 월향을 지켜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긴 해도 다소 울적해 보였다. 그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괴로웠다. 다른 이도 아니고 부인이 괴로워하면, 그의 마음은 개울에 처박힌 날보다 더 쓰라렸다.
문제가 생길 때면 늘 외숙부를 찾아갔던 터라, 그는 이번에도 조언을 구하러 이장에게 찾아갔다. 그러나 하필 이장이 성에 간 바람에, 사촌 형인 전진곤과 마주쳤다.
전진곤은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히죽거렸다.
“보전, 신부는 잘 지내고?”
“응.”
“신부와 합방도 했겠지?”
양보전이 느릿느릿 고개를 저었다.
“부인이 아프다고 해서 못 하겠어.”
전진곤이 그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이런 한심한 놈, 처음에는 다 그런 법이라고.”
“안 돼, 부인을 아프게 할 수 없어.”
전진곤이 눈을 굴리더니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 보전이가 이렇게나 부인을 아끼네? 그래, 이 일은 형이 도와주마.”
“형이 어떻게 도와줄 건데?”
양보전이 씁쓸한 표정을 보였다.
“부인은 아이를 가지고 싶어 해. 하지만 난 못해. 하지도 못하겠어.”
“넌 못하지만 이 형은 할 수 있지.”
전진곤이 그의 어깨를 감싸며 목소리를 낮췄다.
“이 형은 첩까지 있잖아. 경험이 많아서 절대 문제를 안 만든다고. 형이 대신해 줄게. 어때?”
양보전이 미심쩍은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형이 어떻게 대신해 줘?”
“다른 사람은 못 하겠지만 우리는 형제잖아.”
전진곤이 그를 슬슬 구슬렸다.
“걱정하지 마. 형이 한 번만 대신해 줄게. 그 뒤로는 네가 책임져야 해. 물론 그것도 형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도와줄 수도 있고. 세 형수 중에 아이를 안 낳은 사람이 어디 있어? 허풍이 아니라, 이 형은 얼마든지 가능하단 말씀이야.”
멀리서 전진곤의 첩이 오 개월쯤 된 아이를 안고 바람을 쐬고 있었다. 아기가 통통한 팔을 흔들며 활짝 웃었다.
양보전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이에게 관심조차 없었지만, 월향이 원하니 아이가 더없이 예쁘고 귀여워 보였다.
부러운 시선을 보내던 양보전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럼, 형이 우리 부인 옷을 벗겨야 하는 거야?”
“아니, 물론 아니지.”
전진곤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그저 네게 아주 작은 도움만 주는 거야. 금방 끝나.”
“그래도 옷도 벗지 않고 어떻게…….”
“어찌 형을 못 믿어? 다 방법이 있다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네 신부에게 알리지 않고 처리하는 거야. 알게 되면 네 신부가 얼마나 부끄러워하겠어.”
비로소 양보전이 마음을 놓았다. 그가 바보이긴 해도 사촌 형이 여자를 대하는 데 일가견이 있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생각해낸 방법이면 분명 신통하지 않을까. 다만 어찌해야 아무도 모르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전진곤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가 이내 의기양양한 얼굴로 양보전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와 봐, 이렇게 하자…….”
그가 귓속말로 계획을 상세히 설명했다.
“알겠지?”
양보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
“그래, 그럼 가 봐. 내 말 잊지 말고. 아무한테도 알려 주지 마. 다른 사람이 알면 도와줄 수 없으니까.”
“외숙부한테도 말하면 안 돼?”
“안 돼. 아버지께서 아시면 성공 못 해.”
양보전이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양보전이 떠나자 전진곤의 첩이 다가와 언짢은 얼굴로 물었다.
“바보와 뭘 그리 쑥덕거리십니까?”
머릿속엔 월향과의 일만 가득 차 있던 그가 짜증을 부렸다.
“저리 가시오.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니 물어보지 말고.”
그녀가 코웃음을 쳤다.
“설마 남사스러운 짓을 하려는 건 아니겠죠? 귓속말까지 하던데. 경고하는데, 남의 부인한테 기웃거리지 마십시오. 평범한 사람이 아닙니다. 괜히 건드렸다가 큰 화를 입을 수도 있다고요!”
전진곤이 손을 휘저으며 호통쳤다.
“썩 꺼지라니까!”
품에 안긴 아기가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전진곤을 원수처럼 노려보다 자리를 떴다.
* * *
이소로가 문서 한 다발을 들고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전하, 서재에 있는 문서는 손을 보았습니다. 살펴봐 주십시오.”
천천히 차를 마시던 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려놓거라.”
“예.”
이소로가 책상에 문서를 내려놓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전하, 방금 들은 소식입니다. 영구가 초왕의 명으로 파견을 나갔다 하옵니다.”
“어디에 갔다더냐?”
“그것까진… 알아내지 못하였습니다.”
태자가 그를 흘겨보았다.
“가동에게서 들은 소식이더냐?”
“예. 소인에게 투정을 부렸습니다. 초왕이 영구만 신임하여 자신에겐 일을 맡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태자가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재차 물었다.
“왕석은 아무런 소식도 없더냐?”
이소로가 고개를 저었다.
“없습니다. 이천행도 소식이 없고, 왕석 쪽도 없습니다. 조금 수상쩍습니다. 전하, 혹 영구가 강북에 간 게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도 있지.”
가늘게 뜬 그의 눈망울에 빛이 스쳐 지나갔다.
“북방이 남북 통치에 동의하였으니 남북은 이제 상관없는 곳이다. 강북에서도 더는 구실을 잡을 게 없을 테니…….”
그때 내실에서 나온 제갈겸유가 끼어들었다.
“전하, 초왕이 평화 국면으로 전환한 이상 강북과 관련된 일은 곧장 중단되겠지요. 만약 영구가 정말 강북에 갔다면 심상치 않은 일이 틀림없습니다.”
태자가 이소로를 응시하며 물었다.
“선생의 뜻을 이해하겠느냐?”
“예, 이해했습니다.”
“…가서 처리하거라.”
“예.”
이소로가 공손히 예를 갖추고 방을 나섰다.
“전하.”
제갈겸유가 팔걸이 의자에 앉더니 희끗희끗한 수염을 쓸어내렸다.
“초왕이 전하를 경계하는 듯합니다. 전하께서도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태자가 쓴웃음을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 시간 계획한 일을 끌고 겨우 여기까지 왔다……. 단번에 도성을 치고 묵용한을 옥좌에서 끌어내릴 줄 알았더니 초왕이 중간에 그만둘 줄은 몰랐구나. 그토록 고대한 일이 고작 남쪽의 왕이란 말이더냐.”
“남왕마저 무산될 수도 있습니다.”
제갈겸유가 목소리를 낮췄다.
“최근 거리에서 백성들이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다들 초왕을 군주로, 초왕비를 황후로 여기더군요. 예전에도 황제보다 초왕을 따르더니 지금은 더한 듯합니다. 전하께서도 전하의 명성을 드높이셔야 합니다.”
“과인이 어찌해야 한다고 보는가?”
“초왕은 천성이 냉담하고 과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백성들이 초왕을 가깝게 느낀다면 초왕비의 덕이지요. 전하께서는 혼인하지 않으셨지만 겸허한 군자이십니다. 만나는 백성들에게 매번 따뜻하게 대해 주시면서, 어찌 친민 정책은 펼치지 않으십니까? 한번 입소문이 나면 절로 세간에 퍼질 일입니다.”
태자가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선생의 말이 옳다. 그 말대로 하겠네.”
제갈겸유가 자리에서 일어나 예를 갖췄다.
“노부가 준비해 놓겠습니다. 준비를 마치면 직접 나서 주십시오.”
제갈겸유가 떠나자 태자의 시선은 책상 위에 놓인 찻잎 통에 머물렀다. 백천범에게 받은 뒤 손도 대지 않은 찻잎이었다. 한참 동안 통을 주시하던 그가 찻잎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
복도를 걸어가는데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묵용감의 모습이 보였다. 태자가 옅게 웃으며 물었다.
“날 보러 왔더냐?”
“예.”
묵용감이 손에 쥐고 있던 종이 뭉치를 선뜻 내밀었다.
“새 궁의 도면입니다. 한번 보십시오.”
“네가 마음에 들면 된다. 그런 것들은 내게 별로 중요치 않다.”
묵용감이 단호하게 말했다.
“다른 곳도 아니고 공무를 논하는 정전입니다. 응당 형님의 마음에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욱이 형님께서는 풍수지리에 능하신 분입니다. 형님의 궁전인데 어찌 마음을 쓰지 않으십니까?”
태자가 웃으며 손을 저었다.
“네가 천하를 평정했으니 군주도 마땅히 네 자리다. 난 그저 널 보좌…….”
“형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묵용감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는 군주의 자리에 조금도 관심 없습니다. 이 천하도 형님을 위해 찾았습니다. 혹 제가 북진하지 않아 아직도 마음이 불편하십니까?”
“아니다, 그런 게 아니야.”
태자는 웃는 얼굴을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선황께서 늘 말씀하셨지. 물은 배를 띄우기도 하고 뒤집기도 하니, 백성들의 안위를 가장 중시해야 한다고 말이다. 내전이야말로 국력을 소모하고 민생을 힘들게 하는 일이 아니더냐. 그러니 휴전이 옳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형제 중 누가 군주가 되어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셋째 네가 관심이 없다고 하니 내가 나서긴 한다만, 요즘 일이 바쁘니 금릉까지 다녀올 시간이 없구나. 네가 대신 다녀와 줄 수 있겠느냐?”
“물론입니다. 우선 도면을 확인해 보시고 고쳐야 할 곳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금릉은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네가 수고가 많구나. 늘 고맙다.”
태자가 두 손을 맞잡고 예를 갖추더니 찻잎을 묵용감에게 건네며 미소를 지었다.
“이 찻잎은 돌려주마. 비가 내리기 전에 딴 찻잎이라 아주 귀하다고 들었다. 왕비가 내게 또 선물하지 않게 하거라.”
그날 백천범이 했던 일을 언급하자 묵용감은 실소를 흘렸다.
“왕비가 이리 엉뚱한 구석이 있습니다.”
“금릉을 갈 때 왕비와 함께 가는 건 어떻겠느냐?”
묵용감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따가운 햇살이 곧장 그의 눈을 찔렀다.
“아닙니다. 금릉은 난로라고 불리지 않습니까. 더운 걸 싫어하는 왕비를 데려갔다간 고생만 하겠지요. 사흘이면 돌아올 테니 혼자 가는 게 낫습니다.”
태자가 그를 놀리듯 어깨를 으쓱였다.
“떨어져 있다가 만나면 신혼 때보다 가까워진다던데, 왕비가 네가 그리워 어쩔 줄 몰라 하겠구나.”
묵용감은 마음을 숨길 수도, 숨길 이유도 없었기에 웃으며 답했다.
“형님께서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왕비를 작게 만들어 주머니에 넣어 다니고 싶을 정도입니다.”
태자가 결국 박장대소를 터뜨리더니 그를 가리켰다.
“셋째 너, 무려 군신이 기어이 여인의 치마폭 앞에 무릎을 꿇었구나.”
묵용감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형님께서도 진정으로 좋아하는 여인을 만나면 이 감정을 아시겠지요.”
그가 잠시 생각하다 말을 이었다.
“태자비께서 세상을 뜬 지도 오래되었는데, 다른 분을 찾을 생각은 없으십니까?”
태자가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큰일을 이루지 못했으니 그런 건 생각할 겨를이 없구나.”
단호한 대답에 묵용감이 슬쩍 운을 떼었다.
“형님, 주아는…….”
태자가 곧바로 난처한 표정을 보였다.
“주아는 불운한 아이다. 너를 향한 마음이 변한 적 없지 않더냐. 나도 몇 번이나 타일렀지만 도무지 말을 들어야지. 그저 네게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머물고 싶다더구나. 이제 왕비가 있으니 다른 이를 마음에 둘 수 없겠지만, 주아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음을 잊지 말거라. 그저 조금만 더 살갑게 대해 주려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