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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42)화 (341/1,192)

제342화

삐걱이는 소리가 마침내 잦아들었다. 백천범은 온통 나른해져 팔을 길게 늘어뜨렸다.

“왕야, 제발 쉬엄쉬엄하세요. 이러다 침대가 무너지겠어요. 비싼 발보상拔步床(화려하게 장식한 목재를 조립하여 방처럼 만든 침대)이잖아요. 북쪽에서 쓰는 널찍한 침대랑은 전혀 달라요.”

묵용감은 발로 침대 난간을 딛고 흔들어 보았다. 역시나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가 어딘가 거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다 본왕의 위엄과 힘을 증명하는 게 아니겠소.”

백천범이 그를 한번 흘겨보더니 손으로 자신의 배꼽을 가리켰다.

“어째서 소식이 없는 걸까요?”

묵용감이 그녀의 말에 흠칫 놀라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이를 갖고 싶소?”

“왕야께서는 아니에요?”

백천범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왕야는 아이가 싫으세요?”

“물론 아니오. 우리의 아이를 어찌 싫어하겠소?”

다만 그녀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녀도 아직 아이가 아닌가. 그는 몇 년 더 시간이 지나 그녀가 준비된 후에 아이를 가지고 싶었다. 지금은 그녀만으로도 차고 넘쳤다. 사실… 아이에게 그녀의 마음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배꼽을 가볍게 어루만진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예전에 부인과에 문제가 있지 않았소. 그 때문에 힘들 수도 있소. 그대는 아직 어린 나이니 조급해하지 마시오.”

“벌써 열여섯인걸요. 왕야와 제가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만 않았어도 진작 아이가 있었을 거예요.”

묵용감이 그녀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대도 아직 아이가 아니오. 어딜 봐서 어머니의 모양새란 말이오.”

“유모가 그랬어요. 젖먹이를 온종일 품에 안고 있으면 생각이 많아진대요. 그렇게 성숙해지는 거라고도 했어요.”

그가 그녀를 품에 안고 진지하게 말했다.

“그대의 생각이 많아지게 두지 않겠소. 늘 지금처럼 평온하고 즐겁게만 살게 할 것이오.”

백천범은 그의 품에 찰싹 붙어 입을 꾹 다물었다. 그녀도 묵용감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에게는 아이보다 그녀가 소중했다. 아이는 여인의 삶에 있어 화라고 하지 않는가. 그는 아이가 생기더라도 불안하고 초조해 견딜 자신이 없을 듯했다.

그러나 백천범의 마음은 달랐다. 그녀가 아이를 좋아하는 이유가 가장 컸다. 곁에서 한창 자라나는 아이들이 재잘거리면 얼마나 재미있고 사랑스러울까? 또한 가족 간의 정을 충분히 느끼고 싶었다.

지금은 지아비가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어쩐지 부족함을 느꼈다. 아이가 있다면 장차 며느리와 손자도 볼 수 있고 대가족을 이루지 않겠는가? 그 사이에서 둘러싸여 있다면, 그녀가 바라는 가족 간의 정을 원없이 느낄 터였다.

“그만 생각하고 자도록 하시오.”

그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피곤한데도 백천범은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의 품에서 꼼지락거리던 그녀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제가 낳지 않아도 왕야께 아이를 낳아 줄 사람이 있으니까요.”

어둠 속에서 묵용감이 눈을 번쩍 떴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줄이야. 그가 다급히 그녀의 볼을 어루만졌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오? 이미 말하지 않았소, 나와 주아는…….”

“주아 언니를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장막의 꽃문양을 바라보는 백천범의 얼굴에 희미한 서글픔이 깃들었다.

“원상 언니를 말하는 거예요.”

묵용감과의 사이가 어떻든 수원상은 엄연히 초왕의 측왕비다. 지금은 볼 수 없다 해도 나중에는… 앞날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는 별안간 웃고 말았다. 그녀가 말하기 전까지 수원상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가 그녀의 코끝을 가볍게 꼬집었다.

“어찌 질투를 하는 것이오. 측비는 북쪽에, 우리는 남쪽에 있으니 만날 일도 없소.”

“그래도 여전히 왕야의 측왕비잖아요.”

“허튼소리, 내가 없는 저택에 아직도 남아 있겠소? 진작 집으로 돌아갔을 테지. 이젠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오.”

“만약 폐하께서 언니를 난처하게 하면 어떡해요?”

“폐하도 나와 측비의 사이를 알고 있소. 수민을 봐서라도 난처한 일을 만들지 않을 것이오.”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자, 그만 생각하고 눈 감으시오. 상관도 없는 사람 때문에 마음 졸이지 말고.”

“그럼 아이는…….”

“아이는 내가 더 힘써 보겠소.”

묵용감이 짓궂게 웃었다.

“날마다 이리 힘을 쓰는데 어찌 아이가 안 생기겠소.”

“이 일은 천천히 지켜봐야 한댔어요. 우선은 며칠 기다려본 뒤에…….”

“그럴 일 없소.”

묵용감이 그녀의 입술을 깨물며 엄포를 놓았다.

“빨리 안 자면 가만 안 둘 줄 아시오.”

* * *

어둠에 파묻힌 초왕의 저택은 어딘가 처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다들 빈집이라 생각하며 지나칠 법했다. 텅 빈 왕부가 맞긴 했지만 후원의 한 처소만큼은 빛이 새어 나왔다. 그리 밝진 않아도, 창호지 너머로 희미한 등불 빛이 어른거렸다.

수원상은 모든 일과를 마치고 침소에 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추문이 그녀 옆에서 머리를 빗겨 주며 한참을 우물쭈물했다.

수원상이 그녀를 힐끔 바라보더니 자그마한 은 가위로 촛불 심지를 잘라 내었다.

“말해 보아라, 무슨 일이냐?”

추문이 입술을 앙다물고 한숨을 내쉬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마마, 대감마님께서 말씀하시길, 왕야께서 왕비 마마를 찾으셨다고 합니다. 지금 두 분이 함께 계신답니다. 대감마님께서 소인에게 마마를 잘 타이르라고 하셨습니다. 저택이 아니라 마마 생각을 하실 때입니다.”

하마터면 심지를 전부 잘라 버릴 뻔했다. 수원상의 떨림이 짙게 번지는 어둠 속으로 사그라들었다. 짤따란 심지에 남은 불꽃도 꺼지는가 싶더니 다시 살아나 조그마한 빛을 내었다.

그녀가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하늘은 갸륵한 마음을 저버리지 않는구나. 결국 찾아냈으니 축하할 일이지. 연인이 마침내 부부가 되었구나.”

추문은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소인도 대감마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조정에서도 남북을 따로 다스리기로 결정했는데, 마마께서 기다리는 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루빨리 마마를 위해 방도를 찾으셔야 합니다.”

수원상은 은 가위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얼굴을 굳혔다. 작게 타오르는 불꽃이 그녀의 얼굴에 애처로운 굴곡을 만들어 내었다.

“또 그 말이더냐. 죽기 전엔 절대 이곳을 나가지 않을 것이다.”

추문은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꽃다운 나이에 이곳에서 홀로 파묻혀 있다니. 가여운 아가씨, 꿈은 하늘보다 높은데 목숨은 종이보다 얇구나.

* * *

새 신부 월향은 나름대로 윤택하고 평화로운 날들을 보냈다. 남편이 조금 모자라긴 해도 그녀가 온 힘을 다해 가르친 덕분에 말귀를 제법 알아들었다.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도와주며 월향을 졸졸 따라다녔다. 밤이 되면 두 사람은 함께 침대에 눕긴 했지만 한 자나 되는 거리를 두었다.

양보전은 천장을 바라본 채 곧게 몸을 뉘었다. 두 손을 배꼽 위에 올려둔 그는 월향을 힐끔거리며 바보같이 웃었다. 그러다 얼른 자라는 잔소리를 듣고 나서야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곤 했다.

월향은 그의 모습이 우습기만 했다. 아이가 생긴다 해도 그처럼 말을 잘 듣지는 않으리라. 우스운 한편 근심도 밀려 왔다. 지난번 왕비의 말을 들은 후 그녀는 자신보다 양보전을 걱정하고 있었다. 만약 그녀가 양보전보다 먼저 떠난다면 누가 그를 돌봐 준단 말인가?

그러나 그녀 혼자 애써서 될 일이 아니었다. 몇 차례 눈치를 주긴 했지만 양보전은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는 매일 그녀와 한 침대에서 잠을 청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쁨에 겨워 다른 걸 생각할 줄도 몰랐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그녀는 말도 제대로 떼지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그녀는 도통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는 게 능사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결국 그녀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었다.

“서방님.”

“네, 부인.”

양보전이 웃으며 밝게 대답했다. 그는 그녀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무엇보다 좋았다.

“어머님께서 가르쳐 주셨던, 합방 말이에요. 아, 아직 기억하고 있어요?”

“네, 기억해요. 부인이 아플 테니까 안 할 거예요.”

“아이를 가져야 하잖아요. 아이를 갖기 싫어요?”

“그래도 부인이 아픈 건 싫어요. 부인이 아픈 일은 안 할 거예요.”

진지한 그의 대답에 월향은 마음 안쪽에서 번지는 따스함을 느꼈다. 조금 모자랄지언정 그녀를 끔찍이 아껴 주는 남편이었다. 그의 마음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녀는 아기를 가지고 싶었다.

마른 침을 삼킨 그녀는 어느새 목까지 붉게 물들었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서방님, 한, 한번 해 볼래요.”

양보전의 태도는 완강했다.

“향이가 아프면 안 해요.”

“아이 착하다, 우리… 한 번만 해 봐요. 아, 아이를 갖고 싶어요.”

미간을 찌푸린 그의 모습에 그녀가 서둘러 말을 이었다.

“아프다는 말은 다른 이가 한 말을 들었을 뿐이에요. 아프지 않을지도 몰라요.”

양보전은 부인이 원하는 일은 뭐든 할 수 있었다. 그녀가 하자고 하면 그녀의 말을 따르고 싶었다.

다만 두 사람은 모두 경험이 없는 풋내기에 불과했다.

월향은 마음의 준비를 마쳤고 양보전도 나름 흥이 올랐지만, 요령이 부족한 탓에 고될 뿐이었다. 월향은 이마에 땀이 흥건할 만큼 괴로워했고, 양보전은 고통스러워하는 그녀에게 옷을 입혀 주며 다시는 하지 않겠다는 선언을 남겼다.

월향의 마음은 더 괴로워지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어찌 아이를 갖는단 말인가?

양보전이 그녀의 속도 모르고 다독였다.

“아이가 갖고 싶으면, 양자를 들이면 돼요. 어때요?”

월향이 그를 흘겨보았다.

“우리가 낳을 수 있는데 무엇 하러 양자를 들입니까? 저는 우리가 낳은 혈육을 원합니다.”

양보전은 그녀에게 이불까지 덮어 준 뒤, 다시 거리를 벌리고 자리에 누웠다. 평소처럼 천장을 바라보며 두 손을 배 위에 얹은 그는 조용히 잠을 청했다.

월향은 슬픔에 젖은 한숨을 내쉬었다. 시집을 오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아무리 고생스럽고 힘든 일이 닥쳐도 모두 감내할 각오를 했다. 자신을 탓하는 일은 절대 없으리라 다짐했다. 이제 겨우 혼사를 치렀는데… 고생스럽고 힘든 일은 둘째치고 아이를 위한 일이 닥치고 말았다.

희망이 없을수록 마음속에서는 더욱더 짙은 갈망이 솟구치는 법이다. 월향은 한참 동안 잠들지 못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한숨 소리에 양보전 역시 잠이 들 수 없었다. 그는 살짝 고개를 틀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흐트러진 까만 머리카락 사이로 언뜻 보이는 옆모습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양보전은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도 모르게 헤헤 웃었다.

정말 선녀 같은 부인이었다. 그는 그녀와 함께하는 지금 세상에 다시없을 행복을 느끼고 있었지만, 정작 그녀는 근심에 잠겨 있었다. 아이를 원하는 그녀에게 자신은 도움이 되지 못하니…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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