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41화
금란정에 고요하고 엄숙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옥좌에 앉은 황제가 문무백관을 하나하나 훑으며 말했다.
“어째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가?”
대신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누구도 나서려 하지 않았다.
결국 황제가 이름을 불렀다.
“수 경卿, 이 일을 어찌 생각하는가?”
“폐하.”
수민이 대열 앞으로 나와 깊숙이 허리를 숙였다.
“신은 만백성을 굽어살피시어 평화를 으뜸으로 여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백 승상이 곧장 반박하고 나섰다.
“폐하, 엎어진 둥지에는 성한 알이 없다 하였습니다. 온전치 않은 국토는 동월국의 수치이옵니다. 게다가 초왕이 부유한 강남 수향을 차지하지 않았습니까. 북방은 토양이 메마르고 곡식의 생산량도 부족하여 남쪽보다 불리한 조건이옵니다.
시일이 지나 초왕의 군사력이 막강해지면 위수를 넘어 도성을 칠 게 분명합니다. 신의 생각에 남북을 나누어 통치하자는 제안은 초왕이 남쪽에서 힘을 기르기 위함이라고 사료되옵니다. 절대 그런 기회를 주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폐하.”
황제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난세에 나타난 영웅이 천하의 평화를 다스리는 법.”
그가 문무 대열을 천천히 훑어보았다.
“어느 경이 출정을 자처하겠는가?”
전쟁을 치르는 중이니 무관 대열의 수가 적었다. 명을 받고 전투에 나갔던 장군들은 도중에 도망치거나, 전사하거나, 부상을 핑계로 숨어 지냈다. 남은 무관들은 실전 경험도 없는 데다 초왕을 두려워해, 선뜻 나서지 않았다.
물론 황제의 수중에 출중한 무관들도 있었지만, 다들 각자의 신분에 맞게만 움직였다.
움츠러든 무관들의 모습에 황제는 속으로 탄식을 흘렸다.
“초왕의 제안에 찬성하는 자는 손을 들게.”
무관들이 전부 손을 들었다. 싸우고 싶은 사람이 맞서 싸우면 될 일이 아닌가. 어쨌든 그들 중에서는 싸우고 싶은 이들이 없었다. 초왕과의 전쟁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이들만 있을 뿐.
“전투에 찬성하는 자는 손을 들게.”
대부분의 문관이 손을 들었다. 그들은 죽음을 받아들일지언정 수치는 참을 수 없었다. 한 나라가 두 개로 나뉘다니, 문인들로서 어찌 용납할 수 있을까? 전쟁에 나서는 건 무관들의 일이니 그들은 자신의 견해만 주장하면 그만이다.
의견이 첨예하게 갈리자 살벌한 언쟁이 이어졌다. 양쪽에서 내지르는 고함이 황제의 마음을 더욱더 번잡하게 만들었다. 목에 핏대를 세우며 떠드는 대신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갑작스레 무력감이 밀려왔다.
지금 그의 곁에 황후가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별안간 가슴이 먹먹해진 그가 옥좌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제의 움직임에 대신들이 말다툼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가 홀로 무얼 할 수 있을까. 애당초 결단력 있는 사람도 아니거늘. 결국 황제는 오도카니 선 채로 쓴웃음을 머금었다.
“퇴조하라.”
곧장 퇴조를 외친 고승해가 황제를 모시고 뒤쪽으로 향했다. 황제는 승덕전을 지나치더니 줄곧 앞으로 나아갔다.
고승해가 조심스레 물었다.
“폐하, 어디를 가시려는지요?”
황제는 묵묵히 춘궁전을 지나쳐 봉명궁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는 문 위에 걸린 현판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그는 봉명궁을 봉쇄하지 않았다. 궁에 있던 사람들도 그대로 둔 터라, 황후의 시중을 들던 이들이 여전히 궁을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청소를 하고 등불을 켜는 등 그녀가 살아 있을 때처럼 매일을 보냈다.
황제가 이곳을 찾는 일은 극히 드물었지만, 이따금 남서방 창가에 서서 누군가 봉명궁을 드나드는 모습을 보곤 했다. 그럴 때면 그녀가 여전히 그곳에 있는 듯해, 심란한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려 하자 고승해가 급히 말렸다.
“폐하, 마마께서 떠나신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음기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혹 폐하께…….”
“상관없다.”
황제가 담담히 내뱉었다.
“차라리 황후의 혼백을 만난다면 좋겠구나. 짐이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다.”
“…….”
황제가 봉명궁으로 들자 봉명궁의 총관리인인 태감 유복이 궁녀와 다른 태감들을 이끌고 무릎을 꿇었다.
황제는 곧장 뒷전으로 향했다. 황후의 침궁 쪽이다. 유복과 고승해도 뒤따르려 했지만, 그가 손을 내저었다.
“밖에서 기다리거라. 짐 홀로 들어가겠다.”
고승해는 하는 수 없이 황제의 뒷모습만 지켜보았다. 그가 초조한 듯 손을 만지작거렸다.
“이것 참, 혼백을 만나는 게 어찌 좋은 일인가. 부디 마마의 망령이 있지 말아야 할 터인데…….”
맞은편에 서 있던 유복이 입꼬리를 올리며 냉소를 흘렸다.
“무엇 하러 마마의 혼을 겁내는가. 켕기는 구석이라도 있는가?”
고승해가 곧바로 눈을 부릅떴다.
“그게 무슨 헛소리인가, 그저 폐하의 안위를 걱정하는 걸세.”
“폐하께서는 양기가 강하신 분이니 혼을 만날 일은 없을 걸세. 오히려 잡귀들이 폐하를 조심해야 할 테지.”
“유복, 마마께서 계시지도 않는데 어찌 그리 우쭐대는 것인가?”
고승해가 코웃음을 쳤다.
“누가 우물에서 밀칠지 겁나지도 않는가.”
“그리되면 저승에서 마마를 모실 수 있을 테니 잘된 일이고말고.”
유복이 담담한 시선으로 그를 응시했다.
“고 태감은 다르지. 폐하를 모시며 총애를 한 몸에 받았으니, 그 부귀를 누리며 장수해야 하지 않겠는가.”
고승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음흉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궁 안의 모습도 변함없었다. 이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왔던 황제는 모든 구조가 익숙했다. 화장대, 모란꽃과 봉황의 머리가 조각된 침대, 자단목으로 만든 병풍과 장식장에 놓인 각종 진귀한 자기들……. 황후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옅은 연꽃 향이 은은하게 코끝을 스쳤다.
그는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침대 앞에 다가간 그가 잠시 시선을 떨구고 서 있다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황후는 죽은 뒤에도 이곳에 누워 있었다. 사흘간 그녀 곁을 지켜 주겠다고 했지만,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녀를 두고 도망쳐 버린, 비겁한 사람이었다.
황제는 조소를 흘리며 매끈한 침대 가장자리를 어루만졌다.
“춘아, 곁을 지켜 주겠다고 약속해 놓고 도망쳤으니 분명 짐이 싫겠지. 군주는 한 번 뱉은 말을 반드시 지켜야 하는 법이거늘, 그대에게는…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했소.”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는 입술을 달싹이며 혼잣말을 이었다.
“짐도 알고 있소. 그대가 한 말이 모두 옳았지. 짐은 들으려 하지 않았고, 기어이 남북을 갈라지게 만들었소. 멀쩡하던 천하를, 짐이 두 동강 내고 말았소. 만백성이 짐을 비웃어도 할 말이 없구려. 늘 성실히 임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짐도 어찌할 바를 모르겠소……. 춘아, 짐이 끝내 그대의 기대를 저버렸구려.”
당장이라도 그녀를 품에 안고 싶었지만, 그의 손끝에는 싸늘하고 매끄러운 침대보만이 닿았다. 그의 목소리가 천천히 젖어들었다.
“초왕이 남과 북을 각각 다스리자는데, 춘아 그대의 생각은 어떠하오? 사실 짐도 알고 있소. 그대의 부탁으로 셋째가 날 죽이려 하지 않는 거겠지. 그 애의 가장 큰 약점은 너무 여린 마음이오.
짐이 그 애를 너무 심하게 몰아세운 탓에 그 애의 약점이 갑옷으로 변해 버렸고, 반란까지 일으키게 했소.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되었지만, 짐의 초심은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소.”
묵용감. 황후와 함께 제 곁을 지켰던 아우의 얼굴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셋째가 무던히도 애를 썼소. 동족상잔을 하지 않으려 얼마나 노력했겠소? 한 나라에 두 군주가 있을 순 없으니, 나라를 둘로 나눠 짐과 태자가 다스리겠소. 그리하면 태자가 나라를 더 잘 다스리는지, 짐의 정치가 효과가 좋았는지 분명히 알게 되겠지.
태자와 비교되는 일은 조금도 두렵지 않소. 짐이 패배를 인정할 일도 없을 것이오. 춘아, 당신도 내 의견에 동의하리라 믿고 있소. 남북을 나누라면 나누라지. 우리 묵용씨의 천하임은 변함없는 사실이오. 그저 백성들이 평안하다면… 짐은 북쪽의 황제로 남겠소.”
침대보를 움켜쥔 손에 하얗게 뼈마디가 섰다.
“춘아, 짐을… 부디 굳건한 묵용씨의 나라를 지켜 주시오…….”
말을 마친 황제는 한참 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눈꺼풀을 축 늘어뜨린 채 백일몽에 빠진 듯했다. 한참 뒤, 가느다란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흩어졌다. 너무나 가늘어서, 어디에도 닿지 않을 듯한 목소리였다.
“춘아, 그대가 너무 보고 싶소…….”
* * *
방 안에서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자 월규는 시녀들에게 서둘러 자리를 뜨라는 손짓을 해 보였다.
그녀는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 일이 그렇게나 좋단 말인가? 낮에는 위엄이 넘치는 초왕마저 밤마다 기뻐 어쩔 줄 모르다니…….
아직 얼음 그릇을 놓을 때는 아니었지만, 제법 더운 탓에 창문을 열어놓았다. 자연스레 방 안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감히 엿들을 수 없었던 이들은 제각기 흩어지기 시작했다. 초왕을 호위하는 병사들도 어둠을 벗 삼아 멋쩍은 얼굴로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한편, 늘씬한 그림자 하나가 녹하가 머무는 방의 창 앞에 서 있었다. 장검을 허리에 차고 꼿꼿하게 서 있었지만, 얼굴은 사탕을 먹고 싶어 하는 아이처럼 잔뜩 안달이 난 가동이었다.
월향마저도 혼사를 올렸는데 녹하는 왜 그에게 시집을 오려 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녀는 이제 왕비 마마를 지켜야 한다는 이유를 대었다. 가동이 보기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한 명이 줄었으면 다른 한 명을 찾으면 그만 아닌가?
아니, 더 좋은 방법이 있다. 녹하의 자리까지 채울 수 있도록 두 명을 새로 뽑으면 되지 않는가? 그의 제안에 녹하는 고개를 저었다. 새로 오는 사람이 왕비를 제대로 모시지 못할 테니, 제가 시중을 들어야 마음이 편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의 마음은? 어째서 그의 마음을 신경 써 주는 이는 아무도 없을까.
월규와 몇몇 시녀들이 살금살금 방을 빠져나오는 모습을 보니 왕야가 또 한창인 모양이었다. 그는 부러움이 뒤섞인 탄식을 내뱉으며 생각에 잠겼다. 언제 한번 왕비에게 얘기를 해야 했다. 제자가 사부보다 너무 앞서가도 안 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