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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40)화 (339/1,192)

제340화

영구가 얼른 그를 돌아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북쪽 세력을 마주치면 한꺼번에 해결할까요?”

묵용감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저었다.

“네가 맡은 일만 하면 된다. 다른 일은 신경 쓰지 말거라. 내가 알아서 하겠다.”

그가 이번에는 가동에게 물었다.

“이소로와의 사이는 어떠하냐?”

“매우 좋습니다. 어제도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할 땐 가동도 더는 까불지 않았다.

“다만 속이기가 쉽지 않은 놈입니다. 진담을 하는지 농담을 하는지 구별하기 힘듭니다. 오히려 그놈이 저를 몇 번이나 속이려 들었습니다. 참나, 제가 한 수 위인 것도 모르고! 제가 그놈 코를 아주 납작하게 만들고 말겠습니다.”

묵묵히 창밖을 응시하던 묵용감이 입을 열었다.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가 보거라.”

영구가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뒤 재빨리 밖으로 나갔다. 어둠이 순식간에 그의 몸을 집어삼켰다.

* * *

혼사를 치른 후엔 신랑과 신부가 처가로 인사를 가는 법이었지만, 월향은 초왕과 왕비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찾아가지 않으려 했지만 백천범이 기어코 월향을 관저로 불렀다. 이제 막 혼사를 치른 부부가 잘 지내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월규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어찌 지내는지 꼭 봐야 아시겠습니까? 왕비 마마께서도 겪으신 일인걸요!”

“그때 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잖아. 동방 화촉을 밝히지도 않았으니 시집을 간 건 아니었지.”

백천범은 책상 앞에 서서 붓글씨를 쓰다 손목을 가볍게 거두었다. 그녀는 짐짓 서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월향이의 혼사는 떠들썩했잖아. 신방에서 정식으로 화촉도 밝혔을 거고. 나는 아니었어. 합방도 이곳에 와서야 한걸.”

월규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역시 경험자이십니다. 이제 합방 이야기에도 부끄러워하시지 않는군요.”

백천범이 웃음을 터뜨렸다.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땐 그런 이야기를 한들 부끄러울 게 없었다.

“다른 사내들도 왕야처럼 그걸 좋아하는지 궁금해.”

월규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월향이에게 물어보셔도 소용없습니다. 부군이 바보가 아닙니까. 그런 자가 무얼 알겠습니까?”

“그러니까 더 물어봐야지. 안 그러면 어떻게 아기를 가져?”

그녀가 붓을 내려놓더니 문득 자신의 배를 쓰다듬었다.

“왕야께서는 아주 부지런하신 편인데 왜 내 배꼽 색은 변하지 않지?”

월규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왕비 마마. 다른 사람 앞에선 절대 그런 말씀 마십시오. 괜히 비웃음만 사십니다.”

백천범이 그녀를 흘겨보았다.

“날 바보로 아는 거야? 나도 그런 건 알아. 월규 너랑 기홍 언니, 녹하 언니 앞에서만 말하는 거지, 다른 사람 앞에선 절대 안 해.”

월규가 그녀의 배를 바라보더니 잠시 생각에 잠겼다.

“예전에 배에 냉기가 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유일첩 의원의 약을 한동안 드시지 못했으니 차도가 없는 게 아닐까요?”

백천범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닐걸. 지금은 그때처럼 아프진 않아. 오히려 지금 더 좋아진 거야.”

“아무래도 의원을 모셔와 진맥을 하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은 대를 이어야 할 때입니다. 나라를 세우면 왕야께서 군주가 되시니 마마께서는 황후가 되시지요. 그렇다면 황자를 낳으시는 게 급선무입니다.”

“걱정하지 마. 태자 전하께서 군주가 되실 거랬어.”

월규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리더니 소리쳤다.

“예? 왕야께서 천하를 평정하셨는데, 태자 전하께서 군주가 되신다뇨? 그, 그럼 마마께서 황후 마마가 될 수 없지 않습니까!”

“난 황후가 되고 싶지 않아. 왕야께서 황제가 되는 것도 싫고. 황제는 후비를 많이 들여야 하잖아? 무엇 하러 다른 여인들과 지아비를 나눠 갖겠어. 절대 안 돼!”

“하지만…….”

월규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군주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가 아닌가. 누구라도 가장 높은 곳에 올라 천하를 갖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일이거늘.

“괜찮아. 주아 언니가 황후가 될 테니.”

월규는 또 한 번 놀라며 되물었다.

“황보주아요? 아가씨가 어찌, 태자 전하와…….”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거든.”

백천범이 눈을 찡긋거리며 소곤거렸다.

“지난번에 두 사람이 껴안고 있는 걸 봤어.”

그녀는 월규가 웃음을 터뜨릴 거라 생각하며 기대하는 눈빛을 보냈다.

정작 월규는 이를 갈며 조용히 중얼거리고 있었다.

“어찌 그런 못된…….”

백천범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잘되는 게 싫은 거야?”

월규는 태자를 욕한 게 부끄러웠는지 서둘러 해명했다.

“황보주아 아가씨는 원래 왕야의 사람이었는데, 어찌 태자 전하 곁으로 가겠습니까? 왕야께 너무 송구한 짓이지요.”

“왕야 곁에 있으면 난 어떡하고?”

그제야 월규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나쁜 일도 아니네요. 적어도 왕야를 빼앗아 갈 일은 없을 테니까요.”

백천범이 그녀를 바라보다 물었다.

“월규 네 생각엔 언니와 태자 전하가 이어지기는 어려워 보여?”

“소인의 생각엔 그렇습니다. 두 지아비를 어찌 섬기겠어요? 왕야께서 아가씨를 원치 않으시지만, 그렇다고 다른 사내에게 보내시겠습니까? 입에 올리기 좋은 일도 아닌걸요.”

백천범이 턱을 만지작거렸다. 월규도 이렇게 생각한다면 초왕도 생각했을 법한 일이다. 분명 자신에겐 말하지 않고 마음속에 감춰 두었으리라.

그때, 시녀의 기쁜 목소리가 백천범의 기분을 들뜨게 했다.

“왕비 마마, 월향 언니와 새신랑이 도착했습니다.”

백천범은 모든 생각을 접고 신이 난 목소리로 외쳤다.

“어서 폭죽을 터뜨리라고 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폭죽이 터졌다. 폭죽이 요란스레 터지니 사방이 순식간에 떠들썩해지며 화약 냄새가 멀리멀리 퍼졌다. 백천범이 서둘러 밖으로 뛰어나갔다.

“신부는 어디 있어?”

정원으로 달려 나가자 마침 월향이 양보전과 함께 반월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도홍색 치마를 입은 월향은 어린 부녀자들이 하는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 단아하면서도 아리따운 그녀의 모습은 시집을 가기 전과는 완연히 다른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백천범을 발견한 월향이 서둘러 인사를 올렸다.

“소인, 왕비 마마를 뵈옵니다. 그간 평안하셨습니까.”

그녀가 말하면 양보전이 뒤이어 따라 했다. 한껏 진지한 모습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백천범은 서둘러 두 사람을 일으켰고 준비해 두었던 봉투를 건넸다. 월향이 받지 않으니 양보전도 부인을 따라 받지 않았다.

백천범이 일부러 얼굴을 굳히며 서운한 척했다.

“왜, 너무 적은 거야? 우리 집에서 출가했으면서 왜 지금은 남 보듯 하는 건데?”

월향은 하는 수 없이 봉투를 받아 들었다. 부인이 받자 양보전도 얼른 봉투을 받아들었다.

백천범은 그제야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래야지. 어디, 우리 신부 얼굴 좀 보자.”

그녀는 햇볕 아래에서 월향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월향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풀썩 무릎을 꿇고 울음을 터뜨렸다.

“왕비 마마, 소인은 마마 곁을 떠나니 너무 속상합니다!”

양보전 역시 무릎을 꿇으며 긴장된 표정으로 월향을 힐끔거렸다. 속상하다니! 그는 덜컥 겁이 났다. 설마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려는 걸까.

백천범 또한 눈시울이 붉어진 채 그녀를 일으켰다.

“월향이 너, 넌 이제 한 사람의 아내야. 네 눈치를 보는 식구가 생겼는데 이런 모습을 보이면 어떡해. 게다가 멀지도 않은 거리잖아. 짬이 날 땐 내가 가서 묵을게. 그러니 마음 단단히 먹고, 집 잘 돌봐야 해.”

월향이 소매로 눈가를 닦아내다 옆에 엎드려 있는 양보전을 나무랐다.

“바보같이, 내가 무릎을 꿇는다고 같이 꿇다니요.”

양보전은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부인이 하는 대로 따라 하면 된다고 했잖아요.”

다들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백천범이 친위병을 불러 명을 내렸다.

“새신랑을 대청으로 데려다주세요. 왕야께서 돌아오시면 만나 보셔야지요.”

월향과 떨어져야 한다는 말에 양보전은 겁을 먹은 듯 굳어 버렸다. 그는 월향만 바라보며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월향이 아이를 달래듯 미소를 지었다.

“가시어요. 이곳은 안채라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이따 밥을 먹을 때 다시 만나요.”

양보전이 여전히 머뭇거리자 월향이 그에게 다정히 손짓했다.

“아이, 착하다. 괜찮아요, 어서 가 보세요.”

그제야 양보전은 얌전히 친위병을 따라갔다.

양보전이 나간 후, 월규가 월향을 놀리듯이 웃었다.

“아이고, 부군을 구슬리는 기술이 장난 아니네. 한마디에 저렇게 고분고분해지는 거야?”

월향은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요즘은 내 말밖에 안 들어. 어머님 아버님 말씀도 안 들어서 내가 두 분 말씀을 전달해야 한다니까.”

“너무 좋네. 아내에게 이렇게 순종하는 남편은 찾기 힘들잖아.”

방으로 들어간 세 사람 앞에 찻상이 차려졌다. 백천범은 다른 시녀들을 물리고 월규와 월향만 남겨 두었다. 그녀의 관심은 월향의 합방에 머물러 있었다.

어쩐지 음흉한 그녀의 눈빛에 월향이 어색하게 고개를 들었다.

“왕비 마마, 어찌 그런 표정으로 소인을 보십니까?”

“소인이라고 하지 마. 월규는 내 앞에서 잘만 말하는데 월향이 넌 시집까지 갔으면서도 소인이라고 하다니, 그러지 마.”

이윽고 백천범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월향이 너, 너희 둘, 그거, 했어?”

월향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시선을 피했다.

“어찌 그런 걸 물으십니까…….”

“말해 봐, 성공했어?”

어느새 붉어진 얼굴을 가로저은 월향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냈다.

“…아니요.”

“왜? 조금 모자라긴 해도 엄연히… 설마 그것도 못 하는 거야?”

“못하긴요.”

말을 꺼내는 게 여간 부끄러웠지만, 월향이 겨우 말을 이었다.

“어머님께서 가르쳐 주신 건지, 그이가 말을 꺼내긴 했는데……. 제가 아플까 무섭고 싫다고 합니다. 그래서 밀어붙이지 않은 거예요.”

백천범이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왜 그런 거야? 내가 봤을 때 너희는 얼른 아이를 가져야 해. 나중에 네가 나이가 들면 어떻겠어? 네 몸도 고된데 부군을 돌봐줘야 하잖아. 아이들이 있으면 널 도와줄 테니 숨 돌릴 틈이 생길 거야.”

월향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백천범이 자신을 이리 생각해 주다니! 부부간의 일을 털어놓아 부끄러우면서도 어쩐지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왕비가 그저 부부의 비밀을 캐물으려는 줄 알았던 월규는 그제야 제 생각이 엇나갔음을 깨달았다. 어린 왕비는 어느새 그녀보다도 훨씬 더 멀리 내다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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