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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38)화 (337/1,192)

제338화

머리를 다 정돈한 후엔 양쪽에 머리 꽂이를 꽂았다. 까만 머리칼 위에 피어난 도홍색 꽃송이는 사랑스러우면서도 매혹적이었다.

“오늘은 무얼 할 것이오?”

그가 그녀의 잔머리를 조심스레 빗어 넘기며 물었다.

“붓글씨를 쓸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이오?”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여겼는지, 그가 한참 후에 물었다.

“붓글씨를 다시 배우고 싶어요.”

그녀가 거울 속의 그를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배울 거예요.”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그가 허리를 살짝 숙여 몸을 가까이하고 웃었다.

“어찌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였소?”

백천범이 눈을 내리깐 채 조금 울상이 되어 말했다.

“저는 초왕비잖아요. 글자도 제대로 쓰지 못하면 비웃음을 살 거라고요.”

“감히 누가 그대를 비웃겠소?”

초왕이 돌연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 자는 본왕이 발로 걷어차고 말겠소!”

“글자를 잘 배우면 왕야도 도와드릴 수 있잖아요. 괜히 다른 사람에게 시키실 필요도 없고요.”

성을 내던 초왕이 멈칫했다. 그녀의 말은 너무 많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무얼 도와준다는 뜻이오? 내가 누구에게 무엇을 시켰길래?”

백천범이 얼굴을 붉히더니 웅얼거렸다.

“주아 언니한테 발원에 쓸 경문을 써 달라고 하시지 않았어요?”

“그건 태자 형님의 뜻이오.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씀하시길래 문 앞에서 주아를 마주친 김에 전했을 뿐이오.”

그가 얼굴을 가까이 붙이며 말을 이었다.

“어찌, 내가 그대의 기분을 상하게 했소?”

“그럴 리가요! 전 그저 왕야를 돕고 싶어요. 제대로 된 일도 하고 싶고요.”

“천범.”

그의 목소리가 한없이 진중해졌다.

“나 때문에 무리하지 마시오.”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예전에는 잘 몰랐는데 지금은 배워야 할 이유를 알았어요. 저를 위해서도 배우고 싶어요.”

“알겠소. 그대가 배우고 싶다면 내가 가르쳐 주겠소.”

“전 깨알같이 작은 해서체를 써 보고 싶어요.”

그 말을 들은 묵용감이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평범한 글씨를 잘 쓰기도 쉽지 않은데 깨알같이 작은 해서체라…….”

“절 얕보시는 거예요?”

백천범이 뾰로통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두고 보세요. 꼭 배우고 말 거예요.”

아직 상이 준비되지 않았기에 묵용감은 월규를 불러 종이와 붓을 준비하게 했다. 기억력이 좋은 백천범은 예전에 배웠던 걸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가 직접 입으로 외우면서 글자를 써 내려갔다.

“가로획은 평평하게, 처음은 각이 진 모양으로 썼다가 붓을 들어 올릴 땐 봉우리를 만들고, 세로획은 곧게 쓰다가 굵은 꼬리 만들기…….”

묵용감은 조용히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창문으로 쏟아진 햇빛이 온 방 안을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책상 앞에 앉은 백천범은 모든 정신을 집중해 글자를 쓰고 있었다. 팔을 들고 한 획 한 획 써 내려가는 모습이 어찌나 진지한지, 절로 숙연해질 정도였다.

양 갈래로 틀어 올린 머리와 보송보송한 얼굴은 아직 어린아이 같았지만, 어여쁜 눈매와 차분한 분위기가 제법 어른스러웠다. 그의 입가에 뿌듯한 미소가 걸렸다. 그의 어린 아내가 어느새 훌쩍 자라 있었다.

그가 백천범의 허리를 감싸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오후에 함께 관청에 가는 게 어떻소?”

백천범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왜요? 바쁘시잖아요?”

“내 옆에서 붓글씨 연습을 하시오.”

백천범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책상 하나를 따로 내줄 테니, 서로 방해하는 일이 없겠다고 짐작한 터였다.

막상 관청에 가니 서로를 방해하지 않았지만, 책상은 함께 써야 했다. 그는 그녀를 무릎 위에 앉힌 채 붓글씨를 쓰게 했고 자신은 의자 등받이에 기대 책을 읽었다.

그녀는 자리를 옮기고 싶었지만, 그녀가 꼼지락거릴 때마다 그가 허리를 꽉 붙들었다.

“이곳에서 하시오. 나와 가까이 있어야 수시로 가르쳐 주기 편하오.”

사실 그녀와 가까이 있고 싶었을 뿐, 다른 마음은 없었다. 그는 각자 할 일을 하면서도 그녀와 한 공간에서 안정적이고 따뜻한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얼마 뒤, 한 병사가 보고를 올리기 위해 안으로 들어왔다.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병사는 보고를 마친 후에도 답변이 돌아오지 않자 슬쩍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병사는 의자에 앉아 있는 사람이 초왕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하얗고 작은 얼굴에 머리를 양쪽으로 둥글게 틀어 올린 여인이 크고 까만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병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여인의 미소는 선녀처럼 어여쁘고 매혹적이었다. 그때 초왕의 준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고개를 들라 하였느냐?”

흠칫 놀란 병사는 서둘러 몸을 웅크렸다. 거의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있던 병사는 초왕의 대답을 들은 뒤에도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는 몸을 낮게 수그린 채 황급히 방을 나섰다.

* * *

뜨겁게 작열하는 태양 아래, 우렁찬 함성이 연병장을 뒤흔들었다. 한 무리의 사내들이 상의를 탈의한 채 사장풍의 구령에 맞춰 창술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 일사불란하고 절도 있는 동작이 이어지자 사장풍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의 흡족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질서정연했던 대열이 갑작스레 흐트러지더니, 다들 허둥대기 바빴다. 조금 전의 위풍당당하고 기세가 넘치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사장풍은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역시 오합지졸이 아닌가. 작은 일에도 이리 야단법석을 떨다니. 그러나 뒤를 바라본 그 또한 하마터면 도망칠 뻔했다. 사장풍은 허겁지겁 옷을 주워 입고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사앵앵에게 호통쳤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소란을 피우십니까! 대체 왜 온 것이오?”

“제가 오고 싶어 왔겠습니까?”

사앵앵이 코웃음을 치더니 뒤에 있는 가게 점원을 가리켰다.

“날이 워낙 더워 장병들이 더위를 먹을 수도 있으니 아버지께서 시원한 차를 가져다주라고 하셔서 왔을 뿐입니다.”

“사내들만 있다는 걸 알면서 어찌 여인이 온단 말입니까? 보십시오. 소란스럽기 짝이 없지 않습니까!”

사앵앵은 비뚤어진 그의 옷깃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제가 무슨 이유로 왔는지 정말 모르십니까? 장군님이 승낙하지 않으시면 아버지께서 날마다 절 보내시겠죠.”

사장풍의 얼굴이 사납게 굳어졌다.

“아버지께 전해 드리십시오. 그 일은 의논할 여지도 없습니다. 전 지금 혼인할 상황이 아닙니다.”

“아버지께서 그러셨어요. 초왕야께서 명하신 혼사니 거부할 수 없으시다고요.”

“내 앞에서 그 이름을 꺼내지 마십시오!”

묵용감의 이름을 듣자 머리끝까지 분노가 치솟았다. 이번만큼은 백천범을 제 옆에 둘 수 있을 줄 알았건만……. 유무전 그 인간이 모든 걸 망쳐 놓았다!

유무전은 며칠간 성안에서 상처를 치료한 뒤 마을로 돌아갔다. 두 마을은 제법 가까운 터라, 소식을 접한 사장풍은 한밤중에 복면을 쓰고 그를 찾아갔다. 그에게 포대 자루를 덮어씌워 호되게 두들겨 패 주니 울화가 조금 가시는 듯했다.

그 후, 유무전은 초왕이 상으로 내린 채찍을 들고 마을에서 소란을 피웠다. 자신을 때린 사람을 이 채찍으로 때려죽이겠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기도 했다. 더욱이 자신과 초왕과의 친분을 과시하며 초왕이 알게 되면 곧장 범인의 목을 칠 거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이 소식을 들은 사장풍은 그저 코웃음을 쳤다. 초왕이 아니라 옥황상제의 분노를 산다고 한들 두렵지 않았다. 하늘은 그에게 늘 불공평하지 않았던가. 초왕은 분명 백천범을 그에게 시집보내려 했다. 그러다 느닷없이 마음을 바꿨으니, 어찌 억울하지 않을까.

이번만큼은 그가 먼저 그녀를 만났다. 하늘이 그에게 다시 기회를 준 셈이다. 그러니 응당 그가 그녀의 곁에 있어야 했다. 그런데 또다시 뺏겨 버렸으니, 사장풍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기에도 벅찼다.

그중에서도 가장 화가 나는 건 초왕의 장난질이었다. 백천범을 가로챘으면서 그를 비웃고 사앵앵까지 떠밀다니! 사장풍은 지금껏 이리 사나운 여인은 처음 보았다. 어찌나 맹렬하게 달려드는지 당해 낼 방도가 없었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세 발짝 떨어져 있는 사앵앵을 힐끔 보았다. 열여섯 살의 여인은 따사로운 햇볕을 맞으며 허리를 곧게 펴고 서 있었다. 가만히 보면 그녀는 제법 아리따웠다. 치켜 올라간 눈썹에 동그란 눈, 얼굴엔 지지 않으려는 고집이 한가득 묻어 나왔다.

순간, 그는 알 수 없는 아련함을 느꼈다.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얼굴에서 백천범의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는 한동안 넋을 잃고 그녀를 힐끔거리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옷소매로 이마의 땀을 훔친 그가 성가시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어서 돌아가십시오. 어서요. 여기는 그쪽이 있을 곳이 아닙니다.”

사앵앵이 그를 흘겨보더니 당당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장군님 혼자 쓰시는 곳도 아니지요.”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점원을 도와 차를 따랐다. 이윽고 그녀가 당찬 목소리로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어서들 오십시오. 어서요. 감초와 인동꽃을 넣어 더위를 식히고 땀을 빼는 데 아주 좋은 차랍니다!”

비단 치마를 입고 머리에 반짝이는 장신구를 단 그녀는 한눈에 봐도 부유하고 귀하게 자란 티가 났지만, 저런 행동을 할 때면 정체가 아리송하기만 했다.

사람들을 향해 손짓하는 그녀를 지켜보던 사장풍은 들끓던 화가 단숨에 녹아내리는 걸 느끼고 헛웃음을 흘렸다.

사앵앵이 별안간 고개를 들어 올리자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뒤엉켰다. 그가 멋쩍게 시선을 옮기고 몸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점원이 찻잔을 들고 다가왔다.

“사 장군님, 차 드십시오. 아가씨께서 특별히 소인에게 차를 가져다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사장풍은 찻잔을 받아 들고 벌컥 들이켰다. 입 안에 달콤하고 시원한 향이 맴돌았다.

“너희 주인에게 고맙다고 전해 드리거라. 이곳에도 차가운 물이 있으니 앞으로는 보내주지 않아도 된다. 이 말도 함께 전하고.”

점원이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맹물과 이 시원한 차가 어찌 비교가 되겠습니까. 아침 일찍부터 약재를 넣고 한 시진이나 끓였답니다. 다 끓인 뒤엔 한참을 식혀야 가장 더울 시간에 맞춰 시원하게 마실 수 있지요. 이렇게 많은 이들에게 나눠 주려면 몇 번이나 더 끓여야 합니다.”

그가 커다란 통을 가리키며 말했다.

“장정들에게 모두 한 잔씩 돌아갔으니, 다 저희 주인 어르신께서 마음을 쓰신 덕분이지요.”

사장풍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병사들을 위해서 마음을 썼다니, 사앵앵을 어떻게든 붙여 놓기 위해 꾀를 쓴 게 분명하건만!

“마음은 받겠지만 내일부터 가져오지 말거라. 출전을 앞둔 병사들에겐 마실 물로도 충분하다. 입맛이 들면 해가 되는 법이다.”

점원은 여전히 히죽거리고 있었다.

“소인의 책임은 장군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뿐입니다. 어르신께서 어찌 생각하실지는 소인도 잘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우리 아가씨께서…….”

그는 말을 멈추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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