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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37)화 (336/1,192)

제337화

월규가 허리에 손을 얹더니 당장이라도 쥐어박을 듯한 기세로 말했다.

“제가 늘 뭐라고 하였습니까? 사내아이로 분장하는 건 좋지만 여인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라고 하였지요. 희락이가 아무리 어려도 열 살이 가까운 아이입니다. 어찌 피하지도 않으시고 그… 런 걸 보셨습니까, 정말 화가 나 죽겠습니다!”

백천범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너도 왕야랑 똑같은 반응이야?”

“왕야께서 화가 나지 않으시면 그게 더 이상한 일입니다! 정말, 어떻게 그런 말을…….”

얼마나 화가 났는지, 월규는 순간 규율도 잊고 오수진에서처럼 그녀에게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백천범은 어리둥절하게 월규를 보고 있었다. 꼭 그녀가 기르는 토끼가 된 기분이다.

월규가 별안간 자책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왕비 마마께 제대로 가르쳐 드리지 못한 탓입니다. 왕야를 찾아가 죄를 고해야겠어요.”

백천범이 음식을 우물거리며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됐어. 뭐 하러 찾아가, 화가 나셨으니 네 가슴팍을 걷어차실 수도 있어.”

사실 월규도 홧김에 내뱉은 말이다. 정말 왕야를 찾아가 죄를 고한다면 큰일이 날 게 뻔했다. 제 발로 찾아가서 화를 입다니, 바보나 하는 짓이 아닌가. 그러나 찾아가지 않아도 초왕의 분노가 자신에게 미칠지도 몰랐다. 여기까지 생각이 닿자 월규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왕비 마마, 이 일은 마마께서 정말 잘못하셨습니다. 어느 부부든 상대에게 그런 말을 들으면 화가 날 수밖에 없지요. 왕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처럼 얼굴도 보지 않으시는 건 절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질질 끌수록 일만 더 그르치는 법이지요. 서로 상대하지 않으면 사이도 멀어지지 않겠습니까? 후원에 계시는 또 다른 분을 잊지 마십시오. 이대로 왕야를 밀어내시면 안 됩니다.”

가만히 들어 보니 월규의 말이 일리가 있었다. 황보주아 때문에 걱정이 되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서먹하게 지낼수록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떨어져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묵용감의 마음에서 더 멀어질 듯한 초조함마저 느껴졌다.

그녀가 월규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어떻게 해야 해? 왕야를 찾아가 봤지만 신경도 쓰지 않으시던걸.”

월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번 일은 마마께서 잘못하셨으니 직접 해결하려고 하셔야지요.”

“이미 노력했다니까. 관청에 찾아가서 왕야 앞에 서 있었는데 날 상대도 하지 않으셨어.”

월규가 그녀를 흘겨보더니 입술을 삐죽였다.

“마마께서는 왕야와 혼사를 치르시지 않았습니까. 이런 일도 제게 물으시다뇨. 뭐, 손도 좀 잡고, 입도 맞추고 하면 되겠지요.”

얼굴이 어느새 붉게 달아오른 월규가 몸을 휙 돌려세웠다. 백천범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월규도 외로운 걸까……?’

식사를 마친 후, 백천범은 찻잔을 든 채 칠흑같이 어두운 바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월규가 몇 번 그녀를 살펴보았지만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러는 동안 차는 싸늘하게 식어 버렸다. 따뜻한 차로 바꿔 주려고 백천범에게 손을 뻗는 순간, 그녀가 별안간 찻잔을 힘껏 내리쳤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붙잡고 급히 밖으로 나갔다. 월규가 잡을 새도 없었다.

다른 시녀들이 등불을 들고 급히 따르려 했지만, 월규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길을 보시는 덴 문제없으니 그리 걱정하지 마.”

월규는 백천범이 어디로 가는지 짐작하고도 남았다. 누군가 함께 가면 분명 부끄러워할 터였다.

정원 대문까지 한달음에 달려간 백천범이 고개를 내밀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등불이 환하게 빛나는 걸 보니 초왕 혼자 일하는 게 아닌 듯했다. 그녀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상하게 긴장이 되었다.

예전보다 좀 더 자랐기 때문일까? 그에게 먼저 다가가는 일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그의 품에 안겨 거리낌 없이 애교를 부리던 예전의 자신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고 천천히 나아갔다. 문 앞을 지키던 보초병들이 그녀에게 서둘러 예를 갖추었다. 그녀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가볍게 손짓을 해 보였다.

무역 통관과 관련된 조례를 살펴보던 묵용감은 시야에 그녀가 담기자 흠칫 놀랐다. 표정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어느새 종이에 쓰인 글자는 그의 머릿속에서 말끔히 날아가 버렸다.

성이 난 탓에 며칠간 그녀를 모른 척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그녀가 알게 해 주고 싶었지만 정작 쓴맛을 본 건 그였다. 매일 밤 잠든 그녀 곁에 누우면 날카로운 발톱이 심장을 긁는 듯 고통스럽기만 했다. 낮에는 일에 몰두할 수 있으니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금만 짬이 나면 눈앞에 그녀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몇 번이나 그녀를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애써 마음을 억눌렀다. 그녀가 찾아와 넉살 좋게 말을 걸기도 했지만, 그는 미적지근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녀가 어떻게 나오는지 알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화가 나면서도 후회가 밀려왔다. 자신이 먼저 한 발짝 내디디면 이런 대치도 모래처럼 허물어질 터였다. 다만 대장부로서의 미묘한 자존심이 그의 발목을 붙들고 있었다. 여전히 그녀를 일깨우기 위해, 푸대접을 하고 있지만 마음만 괴로워지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와 평소처럼 인사를 건넸다.

“왕야, 바쁘세요?”

“조금 바쁘오.”

“피곤하시죠?”

“그렇소.”

만약 그녀가 조금이라도 눈치를 보고 있다면 ‘어깨를 주물러드릴게요’ 같은 말이 나와야 하지 않는가.

정작 그녀는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

“오늘은 그만 쉬세요. 이 많은 일을 언제 다 끝내겠어요.”

“어쩔 수 없소. 건국 초기에는 많은 일을 결정해야 하는 법이오.”

백천범은 냉담한 태도로 일관하는 묵용감의 모습에 마음이 욱신거렸다. 대체 그녀더러 어찌하란 말인가?

그때, 한 관원이 문서를 가지고 들어왔다.

“왕야, 소관들이 작성한 도읍 문건 초안입니다. 살펴봐 주십시오.”

“태자께서도 보셨느냐?”

“모든 사안을 왕야께 결정하시도록 맡기셨습니다. 태자 전하께서는 상류에 있는 금릉이 도읍으로 적합하다고 보십니다. 이전 황조의 고도였던 만큼 기반도 갖춰져 있고 면적도 큽니다. 더욱이 옛 궁전까지 남아 있습니다.

옛터에서 서쪽으로 두 배가량 면적을 넓혀 공사를 진행하면, 내년에는 공사를 끝내고 천도할 수 있을 겁니다. 금릉은 난강으로 유입되는 양수강揚水江을 끼고 있지요. 수군을 배치하면 황성을 수호하기도 용이하고, 북방의 철기 부대를 견제할 수도 있습니다.”

묵용감은 그의 말을 주의깊게 듣고 있었지만 시선은 자꾸만 백천범에게 향했다. 살짝 고개를 숙인 그녀는 의기소침한 듯했다. 지난번처럼 아무 말도 없이 가버리려는 것인가…….

그때, 그의 손바닥으로 그녀의 손가락이 살며시 파고들었다.

그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손끝까지 요동칠 정도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가 그녀의 손가락을 꽉 움켜쥐고 마른 침을 삼킨 뒤,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맞닿은 두 사람이 나란히 만개한 꽃처럼 환하게 웃음 지었다.

애정이 넘치는 초왕과 왕비를 보고 있자니 관원은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이렇게 잔뜩 보고했는데, 초왕이 어디까지 들은 걸까?

한번 붙잡으니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묵용감은 관원을 내보내고 그녀의 손가락을 꼭 붙잡았다. 그가 장난기가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뭐 하고 있소?”

“문을 두드리고 있잖아요.”

백천범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왕야께서 문을 언제 여시는지 보려고요.”

“문을 열지 않으면?”

“계속 두드려야죠. 왕야께서 열어 주실 때까지요.”

그녀의 말에 묵용감이 곧장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만 돌아갑시다.”

“일은 다 끝내셨어요?”

“어찌 금방 끝낼 수 있겠소. 내일 다시 하면 되오.”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춘 그가 이어 코끝에도 입을 맞췄다. 어느덧 잠긴 목소리가 그의 말을 희미하게 전해 왔다.

“이만 돌아가 쉬는 게 좋겠소.”

쉬겠다던 초왕의 말은 반어법이었다. 백천범은 한밤중이 지나도록 잠들 수 없었다. 몸을 둥글게 말고 머리를 베개에 파묻은 그녀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이제 됐죠? 내일 못 일어나시면 안 돼요.”

묵용감은 땀으로 흠뻑 젖은 그녀의 등 위에 고개를 부비며 천천히 안으로 비집고 들어섰다. 나른하게 잠긴 목소리가 그녀를 달랬다.

“마지막이오, 약속하겠소.”

역시나 이런 쪽에서 초왕의 약속이 지켜지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그를 탓할 수만도 없다. 며칠이나 그녀를 홀대했으니,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마음의 빚을 갚아야 했다.

이튿날, 두 사람은 늦게까지 침대를 벗어날 수 없었다. 장막 틈으로 밝은 빛이 스며들어오며 부드럽게 정신을 일깨웠다.

한바탕 전쟁을 겪었던 백천범이 겨우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어느새 그녀는 침대 가에 축 늘어져 있었다. 커다랗고 따뜻한 손이 천천히 등을 쓸어내렸다. 옅은 졸음이 묻어나는 사내의 목소리가 나른하면서도 매혹적으로 그녀의 몸을 감쌌다.

“우리 아기…….”

그가 그녀의 귓불을 입에 머금고 속삭였다.

백천범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살짝 성이 난 목소리를 내었다.

“제가 또 왕야를 믿으면 더는 백씨가 아니에요.”

그녀의 귓가를 낮고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간질였다.

“이미 백씨가 아니지 않소. 나와 혼인했으니 그대는 이제 묵용씨요.”

한참 동안 묵용감의 품에 안겨 있던 백천범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햇살을 머금은 요가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벌써 정오예요. 식사를 하시고 관청으로 가셔야죠.”

“알겠소. 그대 말대로 하지.”

초왕이 쇠뿔 빗을 들고 왕비의 머리를 빗겨 주었다.

“너무 오랫동안 빗겨 주지 못했으니 솜씨가 어떨지 모르겠소.”

백천범이 작게 웃었다.

“성인식도 치렀는데 또 어린아이 같은 머리를 해 주시려고요? 규율에 맞지 않는다고 흉을 볼 거예요.”

“내 곁에선 규율 따윈 지킬 필요 없소. 이리 보기 좋지 않소?”

초왕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머리를 만지작거렸다.

“그대는 양 갈래로 틀어 올릴 때가 가장 예쁘오.”

그는 넘겨 두었던 앞머리를 이마 위로 빗어 내렸다. 까맣고 풍성한 앞머리가 눈썹을 가리니 그녀는 한층 더 어려 보였다. 마치 그의 눈앞에 처음 나타났던 때로 돌아온 듯했다.

백천범은 거울을 바라보더니 곧 히죽거리며 말했다.

“이대로 밖에 나가면 시집도 가지 않은 아가씨인 줄 알겠어요.”

초왕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녀의 말은 그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시집을 가지 않은 여인처럼 보여서, 허튼수작을 부리는 이라도 있으면 절대 가만둘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시작한 일을 도중에 멈출 수도 없으니, 그는 이를 악물고 계속 머리를 빗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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