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6화
종일 바빴던 백천범에게 드디어 짬이 났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해가 서쪽으로 기울며 옅은 주홍빛이 하늘에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토끼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와 풀밭에서 뛰노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때, 황보주아가 두 시녀를 데리고 다가와 안부 인사를 건넸다.
마침 심심했던 터라, 백천범은 기쁜 얼굴로 월규를 불렀다.
“어서 언니한테 걸상을 가져다줘.”
월규가 낮은 걸상을 나무 아래에 내려놓았다. 황보주아는 살포시 웃으며 걸상에 앉았다.
“셋째 오라버니가 보이지 않는군요. 오늘은 왕비 마마 곁을 지켜 주지 않으십니까?”
“전 혼자서도 잘 있는걸요. 왕야께서는 요즘 너무 바쁘셔서 얼굴도 보기 힘들어요.”
사실 그녀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조금 난감했다. 그날 밤, 그녀의 말실수 이후로 초왕은 그녀를 상대도 하지 않았다. 아침에는 그녀가 일어나기 전에 방을 나섰고 밤에는 그녀가 잠든 후에야 돌아왔다.
처소와 그리 멀지도 않아, 그녀가 앞쪽 관청에 찾아가기도 했다. 그녀가 찾아가니 그의 안색도 나쁘진 않았지만, 너무 바쁜 탓에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에게 방해가 되고 싶진 않았기에, 결국 그녀도 발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셋째 오라버니께서 바쁘긴 하시지요.”
황보주아가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오라버니께서 남북을 각각 통치하자고 하셨을 땐 농인 줄만 알았습니다. 정말로 하실 줄은 몰랐지요. 다들 북쪽에서만 살았으니, 남쪽에서 지내는 게 익숙지 않은데 말입니다. 오라버니를 따르는 장병들도 저마다 가족이 있습니다. 한데 지금은 연락도 끊긴 채 지내지 않습니까. 그 걱정과 슬픔을 차마 헤아리지도 못하겠습니다.”
황보주아의 근심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셋째 오라버니께서도 아시겠지요. 황제가 어떤 사람인데요. 나라가 반으로 갈라졌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겠습니까? 지금 이십만 기병이 위수 강변을 지키고 있습니다. 황제의 명만 내려지면 언제든 남쪽으로 쳐들어오겠지요.
지금 셋째 오라버니께서는 나라를 세우시느라 바쁘시지만, 적방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언제든 남하하여 아직 세우지도 못한 나라를 혼돈에 빠뜨리고도 남겠지요. 그리 되면 남쪽 전역에 시체가 나뒹굴고 강물은 피로 물들지 않겠습니까.
셋째 오라버니께서도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지금은 나라를 세우는 데에만 전념하시느라 다른 데 신경 쓸 여력이 없으시겠지요. 태자 오라버니께서도 타이르셨지만 듣지 않으십니다. 기회가 되신다면 왕비께서도 셋째 오라버니께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의 오라버니는 왕비의 말씀만 들으십니다.”
백천범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녀는 애당초 깊게 고민하지 않고 휴전 이야기를 꺼냈다. 휴전만 하면 모두가 평안한 삶을 살 줄 알았건만, 그녀가 모르는 이면에는 너무나 복잡한 사정들이 있었다.
그녀가 우물쭈물하다 입술을 뗐다.
“제가 왕야께 휴전을 하라고 말씀드린 거예요. 계속 전투를 하면 백성들이 평안하게 살 수 없으니까요. 게다가 성이 불타기도 했잖아요. 전쟁을 하다 또 성이 불타면요?
물론 언니 말도 맞아요. 다만 제가 보기엔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들이에요. 우리가 북쪽 사람들이긴 해도 강남은 살기 좋은 곳이잖아요. 기후도 알맞고 풍경도 좋고 먹을 것도 넘쳐나요. 장병들과 가족들이 떨어져 지내는 건 가슴 아픈 일이지만……. 왕야와 태자 전하께선 누구보다 현명하시니 해결할 방법을 찾아내실 거예요.
그리고 황제 폐하는… 왕야께서 폐하는 그리 나쁜 분은 아니랬어요. 그저 간신들이 폐하의 눈을 가리고 있는 거라 들었어요.”
그녀가 머쓱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왕야께서 말씀하신 간신이 제 아버지긴 하네요.”
황보주아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몰랐다. 이렇게 눈치 없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지아비가 자신의 아버지를 간신이라고 부르는데 치욕스러워하기는커녕 웃어넘기다니.
“그렇다면… 왕비께서는 제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십니까?”
비록 황보주아의 말이 옳다고 해도 백천범은 자신의 견해를 굽히지 않았다.
“언니 말이 맞아요. 다만 그 일들은 시간이 있다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에요. 꼭 전쟁만이 정답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황보주아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들을 생각이 없다니 더 말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다만 한 가지 소득을 얻었다. 초왕이 휴전과 함께 남북을 각각 통치하자고 했던 이유는 초왕비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행복한 삶을 보내려고 모든 걸 내팽개친 것이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초왕은 굳센 기개와 위엄을 가진 사람이었다. 대의를 위할 줄 알고, 멀리 내다볼 줄 알았다. 지금은 어떤가? 그저 부인과의 삶만 생각하는 작은 사내가 되고 말았다. 그녀는 묵용감이 수치스러우면서도 씁쓸한 기분에 입술을 깨물었다.
역시 좋아하는 마음과 은애하는 마음은 결이 다르다. 좋아하는 이에겐 그저 잘해 줄 뿐이지만, 은애는 물불 가리지 않고 상대에게 헌신하고 또 헌신하길 멈추지 않는다. 유별난 짓은 예삿일이고, 설령 다른 이들의 비웃음을 사더라도 상대가 기뻐하면 즐거워했다.
초왕비는 지금 그 은애를 한껏 받는 사람이니,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녀가 슬쩍 화제를 돌렸다.
“날이 정말 덥습니다. 남쪽의 여름은 북쪽보다 지내기 힘들군요.”
“그러게요. 며칠 전에는 흐리고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해가 쨍쨍 내리쬐네요. 토끼들도 아침이나 저녁에만 데리고 나와야 해서 아쉬워요.”
황보주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가뭄이 제일 걱정입니다. 아무리 강남 수향이라 해도 한번 가뭄이 들면 큰일이니까요. 어제는 셋째 오라버니께서 제게 경문經文을 쓰라고 하시더군요. 가뭄이 오래 이어지면 절에 가서 비를 내려 달라는 발원을 올려야 하니까요.”
백천범은 황보주아가 붓글씨를 쓰던 모습을 떠올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니는 지난번처럼 그런… 글씨를 쓰세요? 그때 왕야께서 뭐라고 하셨더라……. 아, 용이 날아오르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친다고 하셨어요.”
황보주아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이번에는 아주 작은 글씨를 써야 합니다. 금가루로 만든 묵을 사용해 깨알만 한 해서체로 경문을 쓰지요. 다 쓴 뒤에는 책자로 만들어 절에 바친답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일종의 규율입니다. 예부터 재난이 닥치면 황후 마마께서 비빈들을 이끌고 경문을 써서 직접 절에서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백천범이 머쓱한 웃음을 보였다.
“언니, 절 비웃지 마셔요. 사실 언니가 말하는 서체가 어떤 글자인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왕비 마마를 왜 비웃겠습니까. 사람마다 상황이 다른걸요. 저는 어려서부터 선생을 모셔 글을 배웠습니다. 배우고 싶지 않아도 배워야 하는 상황이었지요. 어쨌든 제게는 좋은 일이었습니다. 저희 가문에서 글자를 쓸 줄 모르면 비웃음을 샀으니까요.
왕비께서는 상황이 다르지 않으셨습니까? 왕야 곁에 오신 뒤에야 배울 기회가 생긴 걸로 압니다. 그 때문에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습관이 되어 구속받는 걸 싫어하시지요. 더욱이 마음을 쉽게 가라앉히지 못하시니 배움을 싫어하시는 듯합니다. 다만 모든 사람마다 뜻하는 바가 다르니, 그런 건 별일 아닙니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웃으며 인사를 올렸다.
“날이 조금 선선해졌군요. 셋째 오라버니께서 재촉하시기 전에 경문을 쓰러 가겠습니다.”
황보주아가 떠난 뒤, 백천범은 멍하니 앉아 넋을 놓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황보주아의 말이 전부 맞았다. 다만 이상한 기분이 자꾸 드는 건 왜일까…….
월규가 코웃음을 쳤다.
“개과천선한 줄 알았더니, 정곡을 후벼 파는 건 변하지 않았군요. 글자를 쓸 줄 모르면 비웃음을 산다는 둥,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습관이 됐다는 둥,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한다는 둥, 결국 자신보다 왕비 마마가 한참 떨어진다는 말이잖습니까?”
백천범이 시무룩해져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 언니 말이 틀린 게 아니야. 언니에 비해 내가 부족한 건 사실이잖아. 태비 마마께서도 난 아무것도 할 줄 모른다고 하셨어. 내가 비웃음을 사는 건 상관없지만, 왕야까지 비웃음을 살까 걱정이야.”
그녀가 이어 한숨을 내쉬었다.
“왕야처럼 촉망받는 분께서 나 같은 쓸모없는 사람을 아내로 맞으시다니, 정말 난처하시겠다.”
월규가 깜짝 놀라 대답했다.
“세상에나, 촉망이란 어려운 말도 쓰시는데, 어딜 봐서 쓸모없는 사람이라 하십니까? 제가 보기에는 황보 아가씨가 질투하시는 겁니다. 왕야께서 마마를 이렇게나 총애하시는데, 싫으신 건 안 하시면 그만이지요.”
백천범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토끼를 가리켰다.
“나는 매일 저 애들과 놀기만 하는데 뭐. 이런 걸 뭐라고 하는지 알아?”
“뭐라고 하는지요?”
“완세상지玩世喪志, 진지하게 살지 않고 원대한 포부도 없다는 말이지.”
월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고, 마마. 말도 참 잘하십니다. 그런 건 그저 심심풀이, 즉 여가를 보내는 거라 하지요. 황보 아가씨도 늘 삵을 껴안고 다니지 않습니까?”
백천범은 말없이 어두워지는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녀가 별안간 물었다.
“언니가 무슨 글씨로 쓴다고 했지?”
“깨알만 한 해서체 말씀이십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깨의 낱알만큼 작은 해서체로 글씨를 쓴다는 말입니다.”
백천범이 그제야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먹는 깨였구나. 나는 꾀를 부린다고 할 때의 꾀인 줄 알았지.”
“…….”
* * *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초왕은 바쁘다는 이유로 관청에서 식사를 해결했다. 백천범은 슬픔에 잠긴 한숨을 내쉬며 식탁을 바라보았다. 묵용감이 없으니 그녀도 기운이 나지 않았다.
월규가 빈자리를 바라보며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
“왕비 마마, 대체 어찌하셨길래 왕야께서 이토록 화가 나셨습니까? 며칠 동안 식사도 하러 오지 않으시다니요.”
차마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해 줄 수도 없으니, 백천범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길어지는 침묵은 월규의 궁금증을 키울 뿐이다. 그녀가 상냥한 목소리로 타일렀다.
“소인에게 말씀해 보시어요. 소인이 도움을 드릴 수도 있지 않습니까.”
백천범이 시무룩하게 고개를 저었다.
“도움 못 줘.”
“말씀을 안 해 주시는데 도움이 못 되는지 어찌 아신답니까? 당사자들이 나서기 힘든 일도 있는 법입니다. 그럴 땐 누군가 중간에서 해결해 줄 수도 있지요. 어서 말씀해 보시어요. 대체 무얼 하신 것입니까?”
“사실 별것도 아니야.”
“무슨 일인데요?”
“그게, 그러니까… 예전에 희락이의 거기를 봤다고 말했거든.”
“…희락이의 그, 그걸 보셨다고요? 왜 저는 모르고 있었죠?”
“네가 안 물어봤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