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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35)화 (334/1,192)

제335화

사성성은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사앵앵의 팔을 몰래 쿡쿡 찔렀다. 사앵앵은 그제야 사장풍 쪽으로 몸을 살짝 틀었다.

사장풍도 초왕의 위협적인 눈빛을 받긴 마찬가지였다. 결국 그도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제 언뜻 봐서는 나름대로 화기애애한 모습이었다.

초왕은 오늘 유독 상냥하게 사람들을 대했다. 거드름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었다. 그는 향신들과 강남의 기후, 지형, 수리水利, 토양, 재배에 적합한 농작물 등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며 겸손한 유생 같은 모습을 보였다.

농업과 상업에 관심이 많았던 터라, 그는 아랫사람들에게 물어보는 일을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향신들도 초왕이 우대해 주는 느낌에 그가 질문이라면 뭐든 진심을 다해 대답했다.

백천범은 남북을 나눠 통치하려 하는 초왕의 의도를 잘 알았다. 남쪽을 더욱더 강성하고 부유하게 만들어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들고자 하는 마음도 알 수 있었다.

포부와 재능을 가진 사내는 늘 다른 이들을 끌어당긴다. 백천범은 새삼 경외하는 눈빛으로 자신의 지아비를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 그보다 더 완벽한 사내는 결코 없을 것이었다.

술자리가 어느 정도 이어지자 다들 거나하게 취해 얼굴이 붉어졌다. 자연스럽게 분위기도 한층 흥이 올랐다.

초왕은 향신들과 조운漕運(배로 물건을 실어 나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느라 열을 올리고 있었다.

그때, 사앵앵이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백천범은 얼른 그녀를 뒤따랐다. 아래층으로 술을 가지러 가던 사앵앵은 발소리를 듣고 한번 돌아보더니 다시금 걸음을 재촉했다.

백천범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앵앵아, 아직도 화난 거야?”

사앵앵이 쌀쌀맞게 대꾸했다.

“사기꾼. 저를 완벽히 속이셨습니다.”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사과할게.”

백천범이 맞잡은 두 손을 들어 올리며 허리를 숙였다.

사앵앵은 사과를 받아주기는커녕 발을 구르며 낮게 호통쳤다.

“저를 해하실 생각이십니까? 누가 보면 어찌하시려고요! 다들 절 죽이려 들 거예요!”

“아냐, 그럴 일 없어.”

백천범이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내가 있는데 누가 감히 손을 대겠어?”

점원들이 두 사람 주변을 끊임없이 오가는 통에 이야기를 나누기가 쉽지 않았다. 백천범이 저만치에 있는 모퉁이를 가리켰다.

“저쪽에서 잠시 얘기 좀 하자.”

“저는 할 말 없습니다.”

사앵앵은 여전히 화가 난 듯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백천범은 그녀를 끌고 가며 자연스럽게 웃어 보였다.

“가자, 나리들은 술을 드시니 우리는 저쪽에서 얘기 좀 해.”

사앵앵은 결국 못 이기는 척 걸음을 옮겼다.

창가에 기대니 찬란한 햇살이 쏟아졌다. 백천범이 상냥한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

“잘 지냈어?”

사앵앵은 눈을 내리깔며 여전히 냉담한 표정을 보였다.

“왕비 마마 덕분에 아주 잘 지냈지요.”

백천범은 알아듣지 못한 척 태연히 웃었다.

“그래? 잘 지냈다니 다행이다.”

그녀가 또다시 말을 붙였다.

“사 장군과는 어때?”

사앵앵이 비로소 시선을 올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건 왜 물으십니까?”

“사 장군은 정말 괜찮은 사람이니까. 얼굴도 잘생겼고, 위풍당당한 대장부잖아. 예전에는 도성을 지키는 제독이었는데 지금은 왕야의 장군이 된 거야. 게다가 젊으니, 앞날이 창창하다고 할 수 있지.

백성들이 분을 풀 수 있도록 엄수의의 목을 베어 성문 앞에 걸어 둔 사람이 바로 사 장군이야. 다들 영웅이라 부를 만하지. 성안에 사 장군을 좋아하는 아가씨가 얼마나 많은데. 그래도 내가 볼 때 사 장군은 앵앵이 너랑 제일 잘 어울려. 네가 사 장군과 잘되면 얼마나 좋을까.”

사앵앵이 코웃음을 치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마마께서는 저희 아버지와 같은 수업을 들으셨습니까? 똑같이 말씀하시는군요.”

백천범이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나랑 사 주인장은 식견이 뛰어나니까 비슷한 말을 하는 거지.”

“식견이 뛰어나긴요!”

사앵앵이 언짢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그분의 태도만 아니라면, 저도 신경 쓰지 않았겠죠. 하지만 저 태도 좀 보십시오. 억지로 끌려와 싫은 티를 팍팍 내지 않습니까?”

사앵앵은 잔뜩 서운했는지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제가 염치없이 애원해야 한다면 못 할 거 없지요. 처음도 아니니까요. 그래요, 이 사람을 쫓아다녀도 안 되고, 저 사람을 쫓아다녀도 안 된다면 이분은 어떻게든 제 손에 넣고 말겠습니다! 손에 넣자마자 내쳐서, 그간의 수모를 풀겠어요!”

백천범은 멍하니 눈을 깜박이다 곧 그녀를 달랬다.

“왜 그렇게 생각해. 내가 여인만 아니었어도 진작 승낙했을 거야! 너희 집안에 장가오면 얼마나 좋아, 출세를 앞당길 수 있는데.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마.”

사앵앵이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사 장군님은 어째서 쫓아도 얻지 못한단 말입니까?”

“그, 그분은 조금 거만한 성격이라서…….”

백천범은 조금 부자연스러운 대답을 내놓았다. 따지고 보면 자신과도 얽힌 일이다. 사실대로 털어놓자니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우물쭈물하다 대답을 쥐어짰다.

“좀 더 힘을 내 보자. 사 장군이 손쓸 수 없을 만큼 따라다녀 보는 거야.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사 장군도 너 같은 여인을 어찌 마다하시겠어? 아직 보름 넘게 오수진에서 지내야 하니까 기회가 있을 거야. 내 도움이 필요하거든 언제든 얘기하고.”

사앵앵이 조금 미심쩍은 듯 백천범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저와 사 장군님을 이렇게까지 엮어 주시려 하는 걸 보면… 다른 의도가 있으신 거죠?”

“아냐, 아냐! 그런 건 절대 아냐.”

무슨 의도가 있을까. 그녀는 사앵앵과 사장풍에게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함께하며 행복을 누릴 수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고 바랄 뿐이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갑작스레 커다란 그림자가 둘 사이로 파고들었다. 사앵앵의 시야를 차단한 그는 서둘러 백천범의 손을 끌고 자리를 떴다.

“어째서 밖에 나와 있소? 한참이나 찾았잖소.”

“앵앵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안 되오. 앞으로 사앵앵과 단둘이 만나지 마시오.”

“왜요?”

“왜냐니?”

묵용감이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저 여인이 그대에게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알지 않소?”

“앵앵이는 여인이에요. 그리고 예전 일은 다 오해잖아요.”

“그래도 안 되오!”

묵용감은 여느 때보다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가 한번 억지를 부리기 시작하면 정말 방도가 없다.

“그 여인이 그대를 바라보며 눈을 굴리고 있었소. 무슨 수를 부리려는 게 분명하오.”

백천범은 기가 막혔지만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연회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마무리되었고, 사장풍이 다가와 예를 갖추더니 곧장 자리를 떴다.

백천범은 이층에서 그를 지켜보았다. 건장한 청년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말에 올라타더니 채찍을 휘둘러 달려 나갔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따사로운 햇볕이 감싸고 있었지만, 어쩐지 홀로 비를 맞는 듯 쓸쓸하고 처량해 보였다.

그녀도 마음이 아프긴 마찬가지였다. 그가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 그녀도 잘 알았다. 그저 사앵앵이 그의 마음에 들어가 그가 입은 상처를 치유하길 바랄 뿐이었다.

* * *

초왕과 초왕비 일행은 저녁까지 먹은 후에 성으로 돌아왔다. 마차 바퀴는 덜컹거리며 굴러갔고, 마차를 호위하는 친위병들은 일정한 발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창문 발이 나부꼈지만 춥지 않았다. 몸에 바람이 닿아도 따사롭고 평화로운 느낌이었다.

그 순간, 백천범은 알 수 없는 적막함에 사로잡혔다. 월향은 늘 함께 지내며 고난을 이겨낸 자매와 다름없었건만, 이렇게 헤어지다니……. 직접 혼수를 마련하고 혼사까지 치르며 기쁜 하루를 보냈는데 막상 월향을 두고 돌아가려니 마음이 욱신거렸다.

그녀는 초왕의 품에 기대어 한 손으로 그의 옷깃을 꽉 움켜쥐었다. 조그만 입술을 앙다물고 있던 그녀는 곧 차오르는 눈물을 글썽였다.

묵용감이 그녀의 마음을 어찌 모를까. 그가 가볍게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나이가 차면 누구든 출가하는 법이오. 조만간 기홍과 녹하, 월규도 그리할 텐데 그땐 어쩌려고 이러시오? 아무리 좋은 일도 끝이 있지 않소. 그 애들은 인생에서 만나는 나그네와 같은 존재요. …우리 두 사람이야말로 영원히 헤어지지 않는 진정한 가족이오.”

초왕이 아무리 달래 주려 해도 그녀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어쨌든 곁에 있던 사람이 사라지는 일 앞에서 기분이 쉽사리 나아질 리가 없다. 그녀는 돌아오는 길 내내 침묵을 지켰다.

시녀들의 시중을 받아 목욕을 마치고 얇은 침의로 갈아입은 그녀는 조용히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묵용감은 잔뜩 가라앉은 그녀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위로의 말을 수없이 건네도 그녀가 듣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었다. 그는 적당한 화제를 꺼내 관심을 돌리려 했다. 장막 위의 구름무늬를 바라보며 궁리하던 그가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몽둥이를 보고 싶지 않소?”

“무슨 몽둥이요?”

그녀는 눈을 감은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어두워서 다행이었다. 그의 얼굴은 타오르는 불길만큼이나 붉게 물들어 있었으니.

“예전부터 내 몽둥이를 보고 싶어 하지 않았소?”

그녀가 몸을 틀어 그를 슬쩍 바라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제가 모를 줄 아셨어요? 몽둥이는 무슨, 쪼끄만…….”

묵용감이 황급히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디서 감히, 작다니! 그는 작정한 듯 그녀에게 훤히 보여 주었다. 백천범은 제법 식견이 높은 사람인 양 깐깐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들과는 좀 다르네요?”

대번에 묵용감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무슨 뜻이오? 설마 다른 자들의 것을 보았단 말이오?”

그녀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희락이랑 다른 애들이 누가 소변을 더 멀리 누는지 시합을 했었거든요. 그때 멀리서 잠깐 봤어요.”

그는 기가 막힌 듯 그녀에게 원망의 눈빛을 보냈다.

“어찌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소? 그대는 여인이잖소!”

“애들이잖아요. 게다가 그땐 남장을 하고 있었다고요. 다들 저를 형으로 알고 있으니, 억지로 피하면 절 비웃었겠죠.”

그는 그녀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우스갯소리 삼아 말을 꺼냈지만, 자신의 기분만 상하고 말았다. 그가 잠시 씩씩거리더니 몸을 돌려 누웠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난 그의 뒷모습에서 그녀를 향한 원망이 강하게 느껴졌다.

백천범이 그의 등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하다 비위를 맞췄다.

“왕야께서 그런 시합을 하셨다면 분명 일등을 하셨을 거예요. 당연한 거죠. 이렇게나 크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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