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4화
“마님, 사시겠다고 하셔서 소인이 값을 깎아 드리지 않았습니까? 바가지는 조금도 씌우지 않았습니다. 저희 가게 평판이 어떤지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입소문이 얼마나 자자한데요!”
그가 엄지를 치켜들어 자신을 가리켰다.
“다른 집들과 비교한다 해도 이쪽 사람이 아니면 알아보기도 힘듭니다. 칠만 그럴싸하게 해놓고 황화리라고 하면 보통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한답니다. 평범한 녹나무로 만들어 놓고 마님을 속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 이게 황화리인지 녹나무인지는 어떻게 알아요?”
백천범이 팔선상을 톡톡 두드리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소리가 조금 둔탁하네요. 황화리이긴 해도 남해의 황화리는 아니죠?”
점원은 어느새 땀까지 흘리며 울상을 지었다.
“정말 귀신같으십니다, 마님. 얼마를 원하십니까?”
백천범이 손바닥을 쫙 펼쳐 내밀었다.
“이 정도요.”
“얼마요?”
점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다 곧 알아차린 듯 기겁하며 말을 이었다.
“…오천 냥이요? 아이고, 마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단번에 천칠백 냥 넘게 깎으시다니요. 주인어른께서 아시면 저를 죽이려 하시고도 남습니다.”
“그럼 주인장을 불러주세요.”
“주인어른께서는 오늘 휴가를 내셨습니다. 소인이 어렵사리 큰손을 만났는데 마님께서 좀 봐주십시오. 소인도 체면을 세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천 냥은 정말 안 됩니다.”
안 된다고는 했지만 어쩐지 긴장하는 기색이었다. 사실 오천 냥도 괜찮은 금액이다. 이윤이 그리 많이 남지는 않지만,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는다. 거래를 하고 은자를 손에 넣어 운용할 현금이 생기는 것, 장사꾼들에게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이 현금이다! 만약 육천육백 냥의 거래를 성사시킬 수 있다면, 그는 주인장 단번에 부주인장이 될지도 모른다!
백천범은 그를 빤히 보더니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럼 관두세요. 다른 곳에서 살게요.”
막 문턱을 넘어서려는데 점원이 다급히 외쳤다.
“마님, 잠시만요. 소인은 정말 한 푼도 남는 게 없지만, 마님과의 연을 위해 해 드리겠습니다. 다음에도 필요한 게 있으시거든 꼭 이곳을 찾아주십시오.”
“알겠어요, 알겠어요.”
백천범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지금은 현금이 없으니 물건이 준비되면 부윤 관저로 계산할 사람을 보내주세요.”
부윤 관저라는 말에 점원이 말을 더듬거렸다.
“부, 부윤 관저에서… 어, 어느 분을 찾으면 되겠습니까?”
백천범이 잠시 고민에 빠졌다. 예전이라면 학평관을 찾으면 될 일이지만 지금은 학평관이 없다. 초왕의 곁에서 가계를 관리하는 사람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면…….
“영구라는 분을 찾아 주세요. 초왕야의 호위 무사입니다. 다른 분과 헷갈리지 마세요.”
말을 마친 그녀는 손을 흔들며 가게를 나섰다.
“그럼 나중에 봬요!”
북쪽 말씨와 부윤 관저, 초왕 곁의 영 나리까지……. 설마 이 마님이……! 점원은 생각이 척척 이어지자 곧장 무릎을 꿇었다. 심장이 벌렁거리다 못해 튀어나올 듯했다. 아이고, 세상에! 저분이 초왕비가 아니라면 대체 누구겠는가!
백천범이 가구를 산 곳은 보정각寶鼎閣이라는 가게로, 가구 업계에서는 최고로 손꼽는 곳이었다. 주인장은 낮에 있었던 일을 듣고는 점원을 호되게 야단쳤다.
“초왕비가 어떤 분인지 모르는 게냐? 남쪽의 황후 마마이시다. 황후 마마께서 친히 납시셨는데 영광으로 생각하진 못할망정, 값을 올려? 가뜩이나 많은 이들이 선물을 보내고 싶어 안달인데, 우리는 연줄이 없어 못 보내고 있단 말이다. 한데 넌 마마께 값도 올리고 돈도 받으려 해!”
말할수록 화가 치밀어 올라, 주인장은 급기야 점원을 걷어찼다.
“같이 일한 게 한두 해도 아닌데 이리 눈치가 없어서야, 대체 어찌 먹고살래?”
혼쭐이 난 것도 모자라 얻어맞기까지 했지만 점원은 조금도 억울하지 않았다. 자신이 눈치가 없어 일을 그르쳤으니 억울할 수도 없었다! 대체 어느 집 부인이 시녀의 혼수를 이렇게까지 장만해 준단 말인가!
초왕비가 주문한 물건은 이튿날 아침 일찍 부윤 관저에 도착했다. 물건을 배달한 이는 돈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 않았다. 물건을 주는 이가 언급을 하지 않으니, 받는 이도 자연스레 묻지 않았다.
줄곧 혼수를 생각하고 있던 백천범은 물건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뛰어갔다. 영구에게 누군가 돈을 받으러 오지 않았는지 물었지만, 없었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대문을 지키는 보초병들에게도 물었지만, 다들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점원의 기억력을 의심했다. 누군가 그녀에게 오천 냥을 빚지면 그녀는 꿈에서도 잊지 않을 터였다.
초왕이 물건을 살피며 그녀를 놀렸다.
“평소에는 그리 아껴 쓰는 사람이 가구에만 오천 냥을 썼단 말이오? 여기 머리 장식부터 장신구까지 합치면 부잣집 규수의 혼수나 다름없겠소.”
백천범이 그를 흘겨보았다.
“왕야, 아까우신 거예요?”
“난 그저 그대가 안타깝소.”
그가 그녀를 품에 안더니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이것 좀 보시오. 며칠 만에 핼쑥해지지 않았소.”
백천범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 쉽게 핼쑥해지면 그간 다 헛먹은 거였네요. 왕야도 너무 아까워하지 마세요. 월향이도 쉽게 결정한 게 아니에요. 다만 부군이 조금… 머리가 그렇다 보니 월향이가 고생을 할까 걱정이에요. 그러니 수중에 뭐라도 있어야 든든하지 않겠어요? 정말 고생스러운 날이 온다 해도 겁먹지 않을 테니까요.”
묵용감도 월향의 선택이 의아했다. 백천범과의 친분을 생각하면 훗날 관리와 혼사를 치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시골 바보에게 시집을 간다니? 누가 봐도 그녀의 선택은 기름을 안고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꼴이었다.
다만 묵용감은 월향의 결정을 반대하지 않았다. 정말 불구덩이에 뛰어드는지, 사서 고생을 하는지는 본인만이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그는 알 수 없는 동질감도 느끼고 있었다. 예전에는 다들 백천범을 바보라고 했지만, 그는 어느새 바보 같은 그녀에게 완벽히 홀리지 않았던가.
그녀는 바보 같은 구석이 조금이나마 있긴 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말하는 그녀의 부족한 면은 그 무엇보다 귀한 장점이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쓰는 돈은 아까워하면서도 시녀의 혼수에는 망설이지 않고 큰돈을 쓰는 사람이다. 그는 그녀의 부족한 면을, 더없이 사랑스러운 장점으로 여겼다.
이틀을 더 기다려도 계산할 사람이 오지 않아, 백천범은 하인 편에 돈을 보냈다. 그러나 돈을 받지 않겠다는 수상쩍은 반응만 돌아왔다.
그녀는 의아할 따름이었다. 엄연히 거래를 했는데 물건을 보내놓고도 돈을 받지 않겠다니?
소식을 들은 초왕은 상황을 곧바로 이해했다.
“그대가 누구인지 알아차렸을 테지. 초왕비가 물건을 사는데 누가 돈을 받으려 하겠소. 그저 그대를 공경하는 것이오.”
“그건 말도 안 되죠.”
백천범이 딱 잘라 말했다.
“이건 장사잖아요. 제가 왕비라고 위세를 부리고 싶지도 않고, 제 명성을 더럽힐 순 없어요.”
살짝 성이 난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되겠어요. 제가 다녀올게요.”
“내가 데려다주겠소.”
요즘 초왕은 그녀가 어딜 간다는 말만 들으면 충직한 강아지처럼 따라가려 들었다.
“안 돼요. 왕야가 찾아가시면 죄다 무릎을 꿇겠죠. 그럼 전 제대로 따질 수도 없게 된다고요.”
“그대 앞에서는 그들이 무릎을 꿇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오?”
그의 말이 맞았다. 백천범은 의자에 앉아 턱을 괴고 울상을 지었다.
결국 묵용감이 영구를 보냈다. 영구의 냉랭한 태도를 무서워하지 않을 사람은 없으니, 그를 보내면 쉽게 해결되리라. 역시나, 영구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하고 돌아왔다.
* * *
유월 아흐렛날은 황도 길일이었다. 월향은 꽃가마를 타고 부윤 관저를 나섰다. 십 리에 달하는 혼수 행렬까진 아니었지만 제법 호화롭고 기세등등한 대열이 이어졌다. 그녀의 가마를 따르는 대열은 수성을 한 바퀴 돈 뒤 오수진으로 향했다.
원래 혼삿날에는 신랑이 신부를 맞이하러 와야 하지만, 양보전에게는 시키지 않을 계획이었다. 그가 말에 앉아 있으면 모양새가 그리 좋지 않을 게 뻔했다. 괜히 손가락질을 당하면 월향의 얼굴에도 먹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신랑 측 대열이 다가왔다. 떠들썩한 무리 가운데 신랑이 타는 커다란 말이 서 있었다. 붉은색 비단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말 위에 양보전이 올라타 있었다. 가슴에 붉은 꽃을 꽂고, 깃털이 꽂힌 관모를 쓴 그는 멋스러운 붉은 예복까지 갖춰 입었다. 눈동자는 또렷하게 빛났고,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다운 듬직함마저 엿보였다.
월향은 창문 발을 살짝 들고 밖을 바라보았다. 시야에 양보전이 들어온 순간, 그녀는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았다. 말에 올라탄 그는 지난번처럼 수척하고 넋을 놓은 모습이 아니었다. 윤기가 흐르는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드리웠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가 탄 마차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는 서둘러 발을 내렸다. 놀란 나머지 가슴이 쿵쿵 울려 댔다.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심호흡을 했다. 누가 저 모습을 보고 그를 욕할 수 있을까! 지금의 그는 아무리 봐도 신부와 잘 어울리는 사내였다.
연회석은 사성성의 제안에 따라 취선루에 차려졌다. 그는 돈을 받지 않고 연회석을 차려 주겠다고 약속했다. 초왕과 초왕비의 체면 때문이 아니라, 월향의 선택에 진심으로 감동했기 때문이다. 충분히 관리에게 시집을 갈 수 있는 여인이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고생길에 뛰어들다니, 게다가 상대를 보살피기까지 하겠다니! 그런 결정은 쉽게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월향을 칭찬하기 바빴다. 어떤 이는 월향이 속세에 내려온 선녀라며 찬사를 늘어놓았고, 어떤 이는 양보전의 목숨을 구해 준 보살님이라고 불렀다.
초왕과 왕비는 상석에 앉아야 하므로 별실로 안내되었다. 초왕의 곁은 마을에서 명성이 자자한 이장과 그가 데려온 몇몇 향신鄕紳(향촌에 살던 과거 합격자나 퇴직한 벼슬아치)들이 지켰다. 물론 오수진에서 직위가 가장 높은 사장풍도 함께했다.
초왕은 굳은 표정의 사장풍을 힐끗 보더니 사성성에게 말했다.
“자리도 남았는데 주인장의 딸도 함께하는 게 어떤가.”
사성성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왕야. 소인이 금방 불러오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앵앵이 그의 손에 이끌려 별실로 들어왔다. 억지로 사장풍의 옆자리에 앉았지만, 두 사람은 서로 본체만체하다가 아예 서로를 등지고 앉았다.
백천범은 그들을 다소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사앵앵이야 아직 어리니 이상할 게 없었지만 사장풍은 장성한 사내가 어찌 저리 유치한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