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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33)화 (332/1,192)

제333화

모자가 떠나자 이장이 단도직입적으로 말을 꺼냈다.

“향이 아가씨, 볼 일이 있어 오신 겁니까?”

오기 전까지만 해도, 월향의 생각은 명료했다. 그저 양보전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계단에 멍하니 앉아 있는 그를 본 순간, 그녀는 온몸이 산산이 부서지는 듯했다. 너무나 아파서 숨을 쉬기도 버거웠다.

보통 사람과 달라도 상관없었다. 월향의 마음에 작고도 단단한 결론이 맺혔다. 자신은 그의 손을 절대 놓을 수 없다. 아니, 놓지 않을 것이다. 그였기에 잡은 손이었다.

그녀의 침묵에 이장이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말을 이었다.

“아가씨, 돌아오시지 말았어야 합니다. 저 애에게 또 희망을 주게 되었으니, 오히려 저 애가 힘들어질 뿐입니다.”

월향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볼일이 있어 온 게 맞습니다. 올해 혼사를 정하고 내년에 혼례를 올리기로 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조금 힘들 듯합니다…….”

그녀의 말뜻을 이해한 이장이 서둘러 답했다.

“그 일은 걱정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아가씨가 어떤 분인데, 저희가 염치없이 굴 순 없지요. 만약 그 일로 오셨다면, 보전이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타이르다 보면 언젠간 저 애도 깨닫겠지요.”

그가 한숨을 내쉬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우리 조카는 운이 나쁜가 봅니다. 어릴 땐 열병을 앓아 머리를 다치더니, 이제는 어렵사리……. 아무래도 팔자를 받아들여야겠지요.”

이장이 연신 탄식을 내뱉었다. 주름진 눈가가 옅게 젖어 반짝였다.

“…외숙부님.”

별안간 들려 온 월향의 음성이 그를 탄식의 늪에서 끌어올렸다.

이장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향이 아가씨, 어찌…….”

“오늘은 외숙부님과 상의를 하기 위해 왔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습니다. 저이는 제가 보이지 않으면 하염없이 기다리겠지요. 그러니 혼사를 앞당겨 치르는 게 어떨까 합니다.”

이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을 덜덜 떨었다.

“향이 아가씨, 그, 그게 정말입니까?”

“물론입니다. 이렇게 먼 길을 오며 외숙부님을 속이겠습니까?”

이장은 도무지 믿기지 않았는지 연신 얼굴을 쓸어내렸다.

“저는 아가씨가… 왕야의 곁에 계시니 혼사는 절대 불가능할 줄 알았습니다. 이리도 인자하실 데가! 정말 꿈만 같습니다!”

쑥스러워진 월향의 얼굴이 옅게 물들었다.

“외숙부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정혼이 아이들 장난도 아니고… 약속은 지켜야죠. 제가 싫지 않으시다면요.”

“세상에,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장은 펄펄 뛰며 연신 허리를 굽혔다. 그가 급히 방 밖을 향해 소리쳤다.

“어서 나와 보거라. 어서! 우리 집안에 경사 났다, 경사가 났어!”

양보전의 어머니가 깜짝 놀라 뛰어나왔다. 평소 침착하고 냉정하던 오빠의 얼굴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가 기쁨에 젖어 말을 멈추지 못했다.

“향이 아가씨가 혼사를 앞당기자는구나. 그 말을 하려고 오셨어! 정말 잘됐지, 우리 보전이가 이리도 복을 받았구나!”

양보전의 어머니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어색하게 월향을 바라보았다.

“그게… 정말입니까?”

월향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입니다. 혼사를 앞당겨 치르고 싶습니다. 그럼 제가 저이의 곁에서 돌볼 수 있을 테니까요.”

“세상에, 보살님!”

양보전의 어머니가 결국 무릎을 꿇었다.

“아가씨는 정말 저희에게 보살님입니다. 제 가엾은 아들이, 보잘것없는 아들이… 이리 선녀처럼 곱디고운 분을 얻다니요. 정말로…….”

월향이 급히 그녀를 일으키며 따뜻한 표정을 보였다.

“어머니, 저를 남처럼 여기지 마시어요. 혼사를 정했으니 한 식구나 다름없습니다. 저이를 위해서만이 아니에요. 저를 위한 결정이기도 합니다. 함께 있으면 저도 저이를 걱정하며 마음 졸이지 않을 거예요.”

양보전의 어머니가 월향의 얼굴을 감쌌다. 부드럽고 따스한 감촉에 감정이 북받쳤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목 놓아 울기만 했다. 그간 남몰래 애끓어왔던 그녀를 위로해 주기 위해, 하늘이 보낸 이였다.

물을 가져온 양보전은 울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를 보며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왜 우는 거예요? 아내가 돌아왔는데 웃으셔야지요.”

“그래, 보전이 말이 맞다. 웃어야지. 암, 오늘 같은 날은 더더욱 웃어야지.”

이장이 얼른 소매로 눈가를 훔치며 환하게 웃었다.

“경사다, 경사야! 가장 좋은 날을 골라 혼사를 치르자꾸나.”

* * *

난생처음 혼수 장만을 하자니 백천범은 여느 때보다 들떴다. 월향과 월규를 데리고 수성 안팎을 다니던 그녀가 손가락으로 하나씩 헤아려 보았다.

“적어도 이불이랑 침대보 여덟 쌍, 머리 장식 네 쌍, 붉은 자기 병 두 쌍, 장식장 두 쌍, 녹나무 상자, 녹나무 함, 걸상, 반짇고리 함, 장신구 함, 원앙 베개는 있어야겠지? 그리고 그릇이랑 가위, 자, 거울, 되, 빗…….”

“아이고, 왕비 마마, 그만 세십시오.”

월규가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누가 보면 왕비 마마의 따님이 시집가는 줄 알겠습니다. 어휴, 부디 제가 시집갈 때도 이렇게 해 주셔야 합니다.”

백천범이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질투하는 거야? 시집을 가고 싶어도 갈 사람이 있어야지.”

월규는 약이 오른 듯 코웃음을 쳤다.

“정말 괜찮은 사람을 찾을 테니 두고 보십시오. 저는 그런 머리…….”

월규가 급히 말을 멈추고 난감한 표정으로 월향을 바라보았다.

월향은 그저 평온한 표정으로 월규를 보았다.

“괜찮아. 그이의 머리에 이상이 있는 건 다들 아는 일인데 뭐.”

백천범이 팔꿈치로 월규를 쿡 찔렀다.

“월규 네 혼수는 월향이의 절반만 해 줄 거야.”

월규가 입술을 삐죽이며 물었다.

“…왜요?”

“눈치가 없으니까.”

어느새 그들은 가구를 파는 가게 앞에 다다랐다.

“여기부터 들어가 보자.”

입구에 서 있던 점원은 그들을 보고 곧장 굽실거리며 응대했다.

“들어와서 구경하십시오. 뭐가 필요하십니까? 화장대? 장식장? 저희는 정말 좋은 나무로만 만듭니다. 이 모양 좀 보십시오. 요즘의 유행 그대로랍니다. 칠색은 또 어떻고요, 색을 세 번이나 칠했습니다. 이 나무 상자를 보십시오. 정말 정교하지 않습니까? 수성 아가씨들이 아주 좋아합니다.”

“네. 예쁘네요. 다른 것도 있어요?”

백천범은 고개를 치켜들고 당당하게 가게를 둘러보았다.

“녹나무 함이랑 녹나무 장식장 두 쌍이 필요해요. 음, 미인탑美人榻(주로 부녀자가 사용하는 좁고 긴 형태의 낮은 침대나 평상)도 괜찮네요. 무슨 나무로 만든 거예요?”

점원이 활짝 웃으며 얼른 대답했다.

“아가씨, 정말 보는 눈이 탁월하십니다. 멀구슬나무로 만들었는데 아주 튼튼하고 색도 예쁘지요.”

“네. 이것도 하나 주세요. 팔선상은 황화리黃花梨로 만든 거죠?”

“예, 예. 정통 남해 황화리로 만들어 짜임이 아주 촘촘하지요. 여기에 자개를 박은 황화리 좌식 탁자까지 맞추시면 어떻겠습니까? 한 벌로 만들어 같이 두면 아주 멋스럽답니다.”

백천범이 손을 내저으며 사내처럼 호탕하게 말했다.

“그럼 한 벌로 하죠, 뭐.”

월향은 백천범이 가게의 물건들을 몽땅 사들일까 겁이 났다. 그녀가 백천범의 팔뚝을 붙잡고 조용히 말했다.

“옷이랑 이불 정도면 됩니다. 이런 건 그쪽 집에도 다 있습니다.”

“그 집 건 그 집 거고, 네 건 네 거지. 이건 혼수로 마련해 주는 건데 하나도 많지 않아.”

점원은 그들의 대화를 놓치지 않고 곧장 눈을 반짝였다.

“혼수를 장만하러 오신 거였군요. 그럼 해당화를 새긴 이 침대는 어떠십니까? 이 침대도 황화리로 만들었답니다. 올해 만들었으니 경사와 아주 잘 어울리는 가구지요. 좋은 침대를 써야 대도 금방 잇고 평생 평안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답니다.”

월규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가 일찍 생기는 게 침대 때문이라고요?”

점원은 청산유수로 말을 늘어놓으며 두꺼운 낯짝을 자랑했다.

“그럼요. 이 침대는 희 선생님을 특별히 모셔서 만들었습니다. 성에서 가장 뛰어난 사부님이시지요. 그분이 만든 침대를 부부가 쓰면 사이가 돈독해지고, 아이들이 쓰면 건강해지고, 노인들이 쓰면 수명이 길어진다니까요.”

내버려 두면 종일 허풍을 떨 기세였다. 백천범이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알겠어요, 알겠어요. 그만 하세요.”

그녀가 허리를 굽히고 침대에 새겨진 조각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괜찮네요. 침대도 하나 주세요.”

월향이 황급히 그녀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아, 아닙니다. 대체 돈을 얼마나 쓰시려고요?”

“우리 왕… 주인께서 돈이 부족할 일은 없어.”

백천범이 태연하게 점원을 불렀다.

“계산서 좀 써 주세요. 전부 얼마예요?”

점원은 백천범이 아직 시집을 가지 않은 처녀인 줄 알았다. 그러나 옆에 있던 여인이 그녀를 부인이라고 부르자 급히 웃으며 말했다.

“젊은 마님이셨군요. 송구합니다, 제가 눈치가 없었습니다. 얼른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그녀의 화려한 옷차림과 호탕한 기질로 미루어 보아, 부잣집 마님이 분명했다. 점원은 자연스레 비싼 값으로 계산을 시작했고, 주판을 튕기는 소리가 몇 차례 울리다 멈추었다.

“마님, 전부 여덟 개입니다. 워낙 시원시원하시고 너그러우시니 소인도 장사할 맛이 납니다. 그래도 마님께 손해를 드릴 수는 없지요. 원래는 육천칠백오십칠 냥 팔 전인데 깔끔하게 길한 숫자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육천육백 냥만 주십시오. 길한 숫자 육이 두 번이나 들어갔으니 이 얼마나 복이 가득합니까. 혼사는 다른 건 몰라도 복이 가장 중요하지요.”

월향의 안색이 대번에 굳어졌다.

“너무 비쌉니다. 차라리…….”

월규는 빙그레 미소만 지으며 백천범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왕비가 있으니 굳이 자신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 왕비는 그간 장사를 해오던 사람이 아닌가. 장사 솜씨로 따지면 눈 앞의 점원에게 뒤처질 사람이 아니다.

역시나 백천범이 활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정말 말씀을 잘하시네요. 다른 사람이었다면 깎을 엄두도 못 냈겠죠? 하지만 저도 장사를 하는 사람이에요. 장사하는 사람 중 값을 깎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이곳 물건이 괜찮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곳들과 비교는 해야지요.

이렇게 하죠. 다른 가게도 가서 비교해 볼 테니까 계산서를 주세요. 여기가 가격이 가장 괜찮으면 이곳에서 사지요.”

점원은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다른 곳과 비교를 하겠다니! 입에 침이 마르도록 열성적으로 응대를 했건만! 꼭 젊은 마님의 손 위에서 한바탕 놀아난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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