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32화
비로소 기억이 떠오른 월향은 놀라면서도 기쁜 기색으로 물었다.
“셋째 형님이셨군요! 정말 오랜만입니다. 다들 잘 지내고 계십니까?”
“잘 지내고말고요.”
셋째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수진이 왕비 마마의 친정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다들 얼굴이 활짝 폈지요. 성에 물건을 팔 때도 오수진에서 왔다고 하면 순식간에 팔릴 정도랍니다.”
월향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잘되었습니다. 왕비 마마께서도 늘 오수진에 가고 싶다고 하십니다. 지금은 왕야께서 바쁘시니 다음을 기약하고 계시지요.”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셋째의 안색이 점차 굳어졌다. 그는 한참 동안 월향을 그녀를 바라보더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좋은 일이 있다면, 사실 그 애가…….”
월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누구 말씀이십니까?”
셋째가 씁쓸한 웃음을 머금었다.
“누구겠습니까. 우리 집안 아우 말입니다. 날마다 아가씨가 사시던 집을 찾아가 청소를 하고 있습니다. 그뿐입니까. 청소가 끝나면 대문 앞 계단에 앉아 밤이 되도록 빨리 돌아오라며 중얼댑니다. 부모님이 데리러 와야 겨우 돌아갈 정도랍니다. 참 불쌍해 죽겠습니다.”
월향의 손이 흠칫 떨렸다. 그녀가 차마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를 내었다.
“저, 정말입니까?”
“처음에는 마을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습니다. 아가씨를 찾겠다고요. 그러다 누가 알려 줬는지, 용케도 성으로 달려가다가 개울에 빠졌지 뭡니까? 한동안 얼굴이 온통 상처투성이였습니다.
그 애 어머니가 끌어안고 우시는데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더군요. 이장님이 집을 지키며 얌전히 있으면 언젠가 아가씨가 돌아올 거라고 속인 덕에 겨우 잠잠해진 겁니다.”
“그럼 설마… 지, 지금도…….”
자신을 찾았을 양보전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월향은 가슴이 찢기는 듯한 고통에 입술을 꼭 깨물었다. 결국 그녀가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진 관사가 곧장 셋째를 꾸짖었다.
“이보게, 왜 아가씨를 울리고 그러는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는, 이 일은…….”
“아뇨, 괜찮습니다.”
월향이 서둘러 눈물을 닦고 셋째에게 말했다.
“가서 더는 기다리지 말라고 타일러 주십시오.”
셋째가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말을 들으면 다행이게요.”
진 관사가 사나운 눈빛을 보내자 그가 급히 대꾸했다.
“물론입니다. 돌아가면 더는 기다리지 말라고 잘 타일러 보겠습니다.”
셋째가 식자재를 내려놓고 발길을 돌렸다. 월향은 당근이 든 광주리를 든 채 오도카니 서 있기만 했다.
그녀와 양보전이 혼사를 약속한 일은 다들 알고 있었다. 성으로 돌아오며 흐지부지되었으니, 감히 입에 올리는 이가 없을 뿐. 진 관사가 탄식을 내뱉더니 그녀를 다독였다.
“아가씨, 그리 고민하지 마십시오. 그저 바보일 뿐입니다. 부디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십시오.”
월향이 코를 훌쩍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바보가 아닙니다. 다른 이들보다 더 멀쩡한 사람입니다.”
말을 마친 그녀가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진 관사는 눈만 끔벅거리며 서 있었다. 바보가 어찌 다른 이들보다 멀쩡하단 말인가?
월향이 돌아오자 월규가 호들갑을 떨며 소리쳤다.
“어딜 놀러 갔다 이렇게 늦게 와, 빨리빨리 교대해야지!”
농담을 듣고도 월향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월규가 그녀를 유심히 살폈다. 세상에, 눈가는 온통 빨갛게 물들고 표정은 더없이 침울했다.
“누가 괴롭혔어?”
월규가 얼른 물었다.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뭐라고 한 거야?”
월향이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저었다.
“왕비 마마의 시녀를 누가 괴롭히겠어.”
“그럼 눈은 왜 이렇게 빨간 건데?”
“눈에 먼지가 들어가서.”
“기분도 안 좋아 보이는데?”
“아무 일도 없어.”
월향은 딱 잘라 말하곤 토끼들에게 당근을 먹였다.
도통 말을 하지 않으니 월규는 그저 눈여겨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날부터 월향의 말수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웃는 일도 사라졌다. 결국 월규 뿐만 아니라 백천범도 알아차릴 상태에 이르렀다.
백천범이 월향을 불러 묻기 시작했다.
“기분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월향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고향이 그립기라도 한 거야?”
“왕비 마마께서 계신 곳이 소인의 집입니다.”
“…역시 무슨 일이 생긴 거지?”
“…….”
“설마 돈 문제야?”
“…….”
“그러면, 가족이 보고 싶어?”
보고 싶다. 그 말이 월향의 가슴을 세차게 내리쳤다. 그녀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저는…….”
“옳지, 우리 월향 언니가 외로웠던 거구나.”
백천범이 손뼉을 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거야 해결할 수 있지! 왕야께 잘 말씀드려서 좋은 사람을 찾아 달라고 할게.”
“그게 아니라, 저는…….”
월향이 입술을 힘껏 깨물더니 고개를 조아렸다.
“왕비 마마, 부디 은덕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소인이 오수진에 다녀올 수 있도록 한 번만 허락해 주십시오.”
백천범은 활짝 웃더니 선뜻 승낙했다.
“그래, 나도 가고 싶었던 참인데 같이…….”
“소인의 말은… 소인 혼자 다녀오고 싶습니다.”
월향은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담아 둔 말을 털어놓았다.
“왕비 마마께서 가시면 왕야께서 함께 가시려 할 테지요. 지금 왕야께서는 공무로 바쁘시니 한동안은 가실 수 없을 터입니다. 소인은…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옆에 있던 월규가 눈을 부릅뜨더니 소리쳤다.
“너, 설마… 아니지? 아직도 그… 바보를 생각하고 있는 거야?”
* * *
바람에 부슬비가 흩날려 사방이 뿌옇게 번지고 있었다. 여인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인의 흰 외투와 사모紗帽는 물에 젖은 그림처럼 흐릿하게 물들어 갔다.
비가 오는 탓에 오가는 이들도 적었다. 여인에게 경계심 가득한 눈빛이 쏟아졌다. 작은 마을을 오가는 이들이야 정해져 있으니, 익숙지 않은 차림의 여인은 눈길을 끌 수밖에 없었다. 다만 어딘가 낯설면서도 익숙한 분위기에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인이 발걸음을 재촉하자 땅에 끌리는 치맛단이 조금씩 젖어 들었다.
어느덧 여인은 길가 끝에 있는 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집 앞 계단에는 한 사내가 앉아 중얼거리고 있었다. 사모에 가려진 여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어찌 이리 수척해졌단 말인가? 튀어나온 광대뼈와 움푹 파인 두 뺨이 사내를 더욱더 초췌하게 만들었다. 앞을 향한 두 눈망울은 뿌연 거리를 반사할 뿐이었다.
예전에는 제법 통통하고 웃음 가득한 얼굴이었건만……. 지금은 그저 숨을 쉬고만 있는 듯했다.
월향이 비틀거리며 다가가자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부인, 얼른 와요. 내가 깨끗하게 청소했어요. 창문도 대문도 잘 잠갔어요. 얼른 와요. 부인…….”
결국 월향은 무너지듯 흐느끼며 목소리를 내었다.
“보전…….”
나지막한 목소리가 양보전의 정신을 일깨웠다. 고개를 든 그는 앞에 서 있는 여인을 멀뚱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모를 벗은 월향의 얼굴은 눈물 자국으로 가득했다. 양보전은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순식간에 그의 눈시울도 붉게 흐려졌다. 그대로 빗물에 쓸려갈 듯 위태롭게 서 있던 양보전이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부인, 돌아왔군요. 부인, 이제 가지 말아요. 혼자 두지 말아요.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그가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며 지난날을 알려 주려 했지만 목구멍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음이 목소리를 집어삼켰다. 양보전은 오도카니 서서 눈물만 떨구었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너무나 그리웠다. 그런데도 막상 그녀를 마주하자 쉽게 다가갈 수 없었다.
월향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여전히 울고 있는 그를 안아 주었다.
“바보, 무엇 하러 날 기다려요?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려고…….”
“그럼 계속 기다릴 거예요. 계속이요.”
양보전이 엉엉 울며 가까스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럼… 언젠간 돌아올 테니까요.”
어느새 모여든 사람들이 그들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떤 수군거림이나 목소리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볼 뿐이었다. 아들을 데리러 왔던 양보전의 어머니만이 몰래 눈물을 훔쳤다.
월향이 결국 목 놓아 울며 그를 때렸다.
“어찌 이리 바보 같단 말입니까, 어찌 이리……!”
“나 바보 아니에요.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요. 들어가서 봐 줘요. 그동안 얼마나 깨끗하게 청소했는데. 문도 꼭꼭 잠갔어요. 나 미워하지 말아요, 향이. 나에게 시집오겠다고 약속해요. 나 버리지 말아요. 나 미워하지 말아요. 제발요…….”
울음이 터져 나와 월향은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서럽게 흐느끼며 그를 때리고 또 때렸다. 양보전은 정말 바보였다. 비바람이 부는 추운 날에 밖에 서서 하염없이 기다리다니. 목숨이 아깝지 않단 말인가? 얼마나 많은 날을 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단 말인가?
그때 양보전의 어머니가 눈물을 닦고 다가왔다.
“비가 오니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아가씨가 정말 오실 줄은 몰랐네요. 우리 보전이의 목숨을 구해 주셨습니다.”
어느새 이장도 다가와 대문을 열어 주었다. 비로소 사람들에게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제야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갔다.
“향이 아가씨가 왜 돌아온 거지?”
“돌아와서 해야 할 일이 있는 거 아닐까. 나였다면 안 돌아왔을 거야. 보전이한테 괜한 희망만 준 거잖아. 다시 떠나면 보전이가 어떻게 견디겠어?”
“그러니까. 불쌍해서 못 봐 주겠네, 정말. 멀쩡하던 애가 저리 되었으니, 어휴. 양씨네 내외만 힘들겠지. 자식이라고는 아들 하나밖에 없는데 모자란 건 둘째 치고… 저리 괴로워하는 모습을 어떻게 보나.”
“향이 아가씨는 왕비 마마의 시녀잖아. 평범한 아가씨들과는 다른데……. 이번 혼사를 누가 감히 입에 올리겠어. 보전이만 이해를 못 하는 거지. 에휴, 하늘도 무심하시지…….”
집 안으로 들어온 양보전은 자신 때문에 월향의 옷이 더러워진 걸 알고 황급히 옷소매로 얼룩을 닦았다. 그러나 자신의 옷은 이미 더러워져, 문지를수록 얼룩이 커지기만 했다. 마음이 급해진 그는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울먹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월향이 서둘러 그를 다독였다.
“괜찮아요. 더러워진 건 빨면 그만인걸, 잘못한 게 아니에요.”
양보전이 그제야 자신의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내일 우리 아내한테 새 옷 좀 사 주세요. 집에 왔는데 갈아입을 옷도 없어요.”
“그래, 그래.”
그녀가 자신의 오라버니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이장이 얼른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보전아, 네 엄마랑 부엌에 가서 물 좀 끓여 오너라. 향이 아가씨가 왔는데 마실 물도 내어 주지 않는 게냐?”
양보전은 아내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그녀의 곁에서 멀어지기가 아쉬웠다. 그가 자꾸만 월향을 바라보며 꾸물거렸다.
그의 어머니가 얼른 옷깃을 잡아당겼다.
“어서 가자, 불 지피는 것 좀 도와줘.”
양보전은 끌려가면서도 월향에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월향은 그의 마음을 안다는 듯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어디 안 갈 테니 어서 다녀와요.”
그제야 양보전이 어머니를 따라 부엌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