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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왕비초장성 (331)화 (330/1,192)

제331화

태자가 흥분한 그녀를 끌어안고 만류했다.

“주아야, 냉정해지거라. 지금은 때가 아니다.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초왕은 한번 내린 결정은 바꾸지 않으니, 나조차 그 애를 설득할 방법이 없구나. 지금으로서는 그 방법뿐…….”

“어떤 방법 말씀이십니까?”

황보주아가 그의 품 안에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이내 총명한 눈빛을 반짝였다.

“초왕비를 말씀하십니까?”

“그래. 초왕비의 말이라면 초왕도 뜻을 바꿀지도 모른다.”

황보주아가 잠시 침묵한 끝에 입술을 떼었다.

“네, 한번 해 보겠습니다.”

울타리 뒤에 숨어 있던 백천범은 한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두 눈에 부둥켜안은 두 사람이 똑똑히 새겨졌다. 세상에, 황보주아와 태자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니!

조금 혼란스러웠다. 기쁘기도 하고, 가슴이 흥분으로 요동쳤다. 백천범은 그녀의 기분을 설명할 수 없었다.

황보주아와 태자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닌가. 어쨌든 연적 한 명이 줄어드는 데다 태자에게도 짝이 생기는 일이다. 다만 초왕이 이 사실을 알고도… 기뻐할까? 황보주아는 그가 예전에 좋아했던 여인이었으니 기분이 복잡할지도 모른다.

태자와 황보주아가 사라진 후에야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묵용감은 자신의 아내를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잠시 측간에 다녀온 사이에 백천범이 사라져 버렸다. 그는 서둘러 영구를 불러들였다.

“어서, 병사들을 풀어 왕비를 찾거라!”

식사를 하던 중에 무슨 소란이란 말인가? 그도 다소 놀랐지만 곧바로 대답했다.

“왕야, 어디에서 찾으면 되겠습니까? 지시를 내려 주십시오.”

초왕이 벌컥 성을 내었다.

“본왕이 그걸 알았으면 널 부르겠느냐? 우선은 관저 안을 샅샅이 뒤지고, 정 찾지 못하면 거리를 뒤지거라.”

드물게도 흥분한 묵용감에게 영구는 침착한 태도로 일관했다.

“알겠습니다. 사라지신 지는 얼마나 되셨습니까?”

“일각 정도 되었다.”

결국 초왕이 짜증을 내며 손을 내저었다.

“어찌 말만 하고 있느냐? 이러다 더 멀리 갈 수도 있거늘! 어서 찾거라!”

서둘러 정원 대문을 나선 영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초왕은 예전 일 때문에 덜컥 겁을 먹은 게 분명했다. 왕비가 고작 일각 정도 보이지 않았다고 저리 초조해하다니…….

어쨌든 초왕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으니, 영구는 서둘러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곧 병사들이 횃불을 들고 떼를 지어 왕비를 찾으러 다녔다.

마침 치맛자락을 붙잡고 걸어오던 백천범의 눈에 몽둥이를 든 병사가 수풀 안을 들여다보는 모습이 비쳤다.

그녀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병사에게 물었다.

“무얼 찾고 있는 거예요?”

병사가 고개도 들지 않고 답했다.

“왕비 마마요.”

“왕비가 고양이도 아니고, 어째서 수풀 속을 찾고 있어요?”

병사가 대번에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감히, 왕비 마마께 고양이라니……! 앗, 왕비 마마! 왕비 마마를 찾았습니다. 왕비 마마를…….”

놀라기도 잠시, 병사는 잔뜩 신이 나 횃불을 마구 흔들어 댔다.

백천범이 그를 얼른 만류했다.

“흔들지 마세요. 불꽃이 떨어질지도 모르니까요.”

아무래도 판단력이 좀 떨어지는 병사인 모양이다. 그녀는 혀를 차고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별안간 그가 앞을 막아 세웠다.

“왕비 마마, 가시면 안 됩니다.”

“왜요?”

“제, 제가 와, 왕야께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왕야께 절 보내면 상이라도 내리실까 봐서요?”

백천범이 키득이더니 그에게 손짓했다.

“내가 상을 줄 테니 고개를 내밀어봐요.”

병사는 아무 의심 없이 고개를 내밀었다. 백천범은 두 손가락을 구부려 그의 이마에 묵직한 꿀밤을 날렸다.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감싸 쥔 병사를 보며 박장대소를 터뜨린 백천범이 다시 잽싸게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그녀를 찾아 한 무리의 친위병들이 왔다. 그제야 그녀는 아까의 병사가 아니라 묵용감의 판단력이 흐려졌음을 깨달았다.

처소로 돌아오니 묵용감이 방 안에서 원을 그리며 서성이고 있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그가 백천범을 보자마자 다가와 힘껏 끌어안았다.

“어딜 갔던 것이오? 깜짝 놀랐잖소.”

어찌나 세게 끌어안는지, 코가 다 짓눌릴 지경이었다. 그녀가 코맹맹이 소리를 내었다.

“얼른 병사들을 철수시키세요. 저게 다 뭐예요? 자기 집에서 길을 잃는 사람도 있어요?”

묵용감은 그제야 자신의 조치가 과했음을 알아차렸다. 백천범을 보니 비로소 마음이 진정되고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어찌 그녀가 또 도망쳤다고 믿었던 걸까?

그녀를 놓아준 그가 헛기침을 하며 속마음을 숨겼다.

“밖이 어두우니 혹여 어디에서 넘어지기라도 했을까 봐…….”

백천범은 어설픈 변명을 늘어놓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 때문에 이렇게 불안해하신다면, 황보주아의 마음이 변했다고 해도 그리 충격을 받진 않으실 거야.’

생각을 마친 그녀는 그를 앉히고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왕야, 말씀드릴 게 있어요.”

묵용감은 자신도 모르게 긴장하고 말았다. 돌아온 후 그녀가 이토록 진지한 모습으로 말한 적이 있었던가? 그는 그녀의 입술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왕야께서 조금 불편해하실 수도 있어요. 마음의 준비를 해 두세요. 제가…….”

“되었소. 말하지 마시오.”

묵용감이 급히 그녀의 말을 끊었다.

“늦었으니 이만 들어가 쉬시오.”

“아직 말 안 했어요. 그보다 이건 왕야와 관련된 일이라고요!”

“그대와 관련된 일이기도 하오?”

백천범이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저한테는 좋은 일이긴 한데, 왕야께는…….”

“그럼 말해 보시오.”

묵용감이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에게 좋은 일이라면 뭐든 상관없었다. 자신에게 어떠하든, 그게 대수일까!

백천범은 자신이 보았던 광경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말하면서도 그녀는 그의 안색을 살피느라 연신 힐끔거렸다. 묵용감의 표정은 시종일관 담담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그가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그게 다요?”

“네. 왕야, 괜찮으세요? 주아 언니가 이제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거잖아요.”

그는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잘된 일이오.”

“왕야께도 좋은 일이에요?”

“물론이오. 두 사람이 함께한다면, 기쁘오.”

그의 얼굴에는 한 점의 미련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시름 놓은 백천범이 헤헤 웃었다.

“그 둘도 기쁘고 저희도 기쁘니까, 모두에게 좋은 일이네요. 앞으로 주아 언니가 제 형님이 되는 거라면, 정말 잘되었어요. 늦었으니까 전 이만 씻으러 갈게요.”

백천범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묵용감은 뻔뻔하게 뒤를 따랐다.

“부인, 이 지아비가 그대와 함께 씻고 싶소.”

백천범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안 돼요. 왕야는 절 괴롭히시잖아요.”

묵용감은 굴하지 않고 그녀를 구슬렸다.

“하면 이 지아비가 목욕 시중을 들겠소. 어떻소?”

그러나 백천범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흘겨보았다.

“다를 게 뭐예요? 왕야가 안에 계시면 절 괴롭히신다니까요.”

“목욕간에서는 절대 건드리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소. 침소에서만…….”

백천범이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런 약속을 지키신 적 없는걸요. 따라오지 마세요. 따라오시면 오늘은 서재에서 주무셔야 할 거예요!”

묵용감은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멀어지는 아내의 뒷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 * *

월향은 아침 일찍 뒤쪽 부엌으로 향했다. 토끼들에게 먹일 당근을 가져올 생각이었는데, 아직 식재료가 도착하지 않았다. 문 앞에 서서 기다리는 그녀를 보고, 부엌을 관리하는 진 관사가 황급히 의자를 가져왔다.

“아가씨, 어서 앉으십시오. 이런 일을 아가씨께서 하시다니요, 말씀만 하시면 소인이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원래 제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칠 순 없지요. 힘이 드는 일도 아닌걸요. 산책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예전부터 부윤 관저에서 일해 온 진 관사는 상전들이 도망칠 때도 관저에 남아 있었다. 식솔을 이끌고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이 함락된 후엔 끔찍한 상황을 각오했지만, 초왕은 그의 목숨을 살려 주고 계속 부엌을 관리할 수 있도록 자비를 베풀었다.

옛 주인은 그를 버리고 도망쳤지만 새 주인은 옛일을 잊고 계속 그에게 일을 맡겼다. 사람의 행동은 감정에 따르는 법이 아니던가. 그는 초왕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에 요령 한 번 피우지 않고 최선을 다해 부엌을 관리했다.

“역시 초왕의 저택에서 오신 분은 다르시군요. 예전에는 마님들을 모시는 시녀들도 주인 행세를 했었습니다.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어쩌다 오는 날이면 하인들에게 어찌나 안하무인이었는지 모릅니다.”

월향이 웃으며 그를 다독였다.

“똑같은 하인인데 굳이 거들먹거릴 필요가 있겠습니까? 사람은 언제 어느 곳에서 만날지 모르는 법입니다. 나중에는 다른 분을 모실 수도 있지 않습니까. 저희 왕비 마마께서는 누군가와 연을 맺으면 새로운 길이 하나 더 생기는 거라고 하셨습니다.”

진 관사가 엄지를 척 들어 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역시, 왕비 마마께서는 참으로 지혜로운 분이십니다.”

월향이 자랑스럽다는 듯 말했다.

“그럼요. 조금 짓궂으시긴 해도 얼마나 좋은 분이신데요. 왕야께서도 마마 앞에서는 고분고분해지신다니까요.”

그때 식자재를 나르는 이가 수레를 끌고 들어왔다. 수레에 실린 광주리에는 각종 과일과 채소가 수북하게 담겨 있었다. 멀찍이서 진 관사를 발견한 그가 목청을 높였다.

“진 나리, 식재료를 가져왔습니다. 받을 사람 좀 불러주십시오.”

진 관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서 지금 오는가. 우리 아가씨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토끼 나리들이 먹어야 하니 당근부터 꺼내 놓게.”

채소를 가져온 이가 허리를 숙이며 미소를 지었다.

“날이 밝자마자 이슬을 지르밟고 온 것입니다. 토끼 나리들의 식사 시간을 어길 수는 없지요.”

그가 서둘러 작은 광주리를 뒤적거렸다.

“전부 달고 싱싱하니, 토끼 나리들도 좋아할 것입니다.”

월향은 가까이 다가가 당근을 받아 들었다. 그가 문득 월향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니, 향이 아가씨가 아닙니까?”

어딘가 낯이 익었지만 기억이 나지 않아, 월향이 주저하며 물었다.

“누구… 신지요?”

“향이 아가씨, 절 몰라보시는 겁니까?”

그자가 짧은 윗옷을 끌어당기고 옷매무시를 가다듬더니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오수진 양씨 집안 셋째입니다. 알아보시겠습니까?… 양보전이 우리 집안 형제입니다. 혼사를 정할 때 저도 갔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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